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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8) 로마교회의 기원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1-01-21 수정일 2001-01-21 발행일 2001-01-14 제 223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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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베드로 순교로 굳건한 터전 마련
로마를 처음 방문한 순례자들이 받는 감흥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도시 전체가 웅장한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유물과 유적, 빼어난 예술 작품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요, 전세계 가톨릭 신앙의 심장부에 서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다른 또 하나의 반응은 신앙이 소박해야 한다는 어렴풋한 신념에서 나오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하는 푸념이다. 하늘을 찌르는 웅장한 성당과 조각품들은 신앙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가난한 이들의 교회와는 거리가 먼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마에서 오래 거주한 한 한국인 교포는 『건물의 웅장함이나 화려함에 매혹될 필요도 불평할 필요도 없다』며 『중요한 것은 이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리스도교 역사의 짙은 흔적이 담겨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렇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신비가 담겨 있는 교회이며 그야말로 보편교회를 일컫는 대명사요 상징이다. 더욱이 이곳의 주교는 바로 교황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사도들로 부터 내려오는 사도적 계승을 이어받아 전세계 보편교회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보편교회의 대명사·상징

로마는 테베레강을 중심으로 기원전 8세기에 이 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로마는 기원전 9세기말부터 7세기 초까지 팔라티노 언덕에서 살았던 목동과 농부들에게서 시작됐다고 한다. 왕정과 공화정시대를 거쳐 로마제국시대가 기원전 31년경 시작됐다. 이후 200여년 동안을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부른다.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펼쳐진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로마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마카베오 상 8장이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예수는 로마의 통치하에서 탄생했고(루가 2장) 로마 총독인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루가 23장). 로마가 직접 복음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로마 황제들의 지배는 분명 하게 언급되고 암시돼 있다(마르 12,13-17 마태 22,15-22 루가 20-26 요한 11,48).

로마서 집필 이전 공동체 존재

로마 교회가 언제 생겼는지, 즉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오로의 로마 서간을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오로는 59년에서 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로마 시외의 아피오 광장과 트레스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온 로마의 신자들과 만나기도 했다. 바오로는 약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비록 감시 상태였지만 방문객들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와 복음에 대해 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바오로가 체포되는 경위는 사도행전 21장 17절부터 36절에 적혀 있다.

베드로사도의 경우에는 로마 도착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글레멘스의 고린토서간과 외경인 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함께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글레멘스 1세 교황이 95년경 고린토 교회로 써보낸 편지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한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순교했다고 한다. 64년 7월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 모질게 박해했는데 이 박해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르툴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타치우스는 두 사도의 순교의 해를 64년으로, 에우세비오는 67년으로 기술 하고 있다.

두 사도의 순교 사실로 인해 로마교회는 굳건한 터전을 마련한다. 두 사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역이었고 이들이 로마에서 순교에 이름으로써 로마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에 연관 되게 되고 로마의 주교는 교황으로서 전세계 보편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확고한 자리를 갖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로마로 집중

사실 로마는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이지만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분파로 이해됐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다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자연스럽게 집중되게 됐다.

「로마 교회」라고 할 때 이는 제국의 수도로서 「로마」와 구원사적 신비로서의 「교회」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는 로마라는 일개 지역교회의 의미를 넘어서 보편교회의 대명사이다. 로마는 이미 제국의 수도로서 정치적으로 중심지였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로마는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으로 인해 지역교회를 넘어선 새롭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이었다.

이후 로마 주교는 스승처럼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린다. 글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