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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 특집] ② 지역으로 보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오혜민·이우현 기자
입력일 2008-09-14 수정일 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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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순교정신

한반도를 수놓다

124위 순교자 전국 골고루 분포

최다 순교 지역은 ‘한양’ 29.8%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를 순교지역별로 알아본다. 순교자들의 대부분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 출생지와 순교지가 같게 나타났다. 한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천주를 알고,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124위 중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된 순교자들과 순교지는 당시의 박해상황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묵상하게 한다.

▧ 한양 (옛 서울, 37명, 29.8%)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한 주문모 신부를 비롯 서소문 밖, 당고개 등에서 총 37명이 순교해 전 지역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냈다. 특히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심아기 바르바라 등은 한양의 포도청에서 숨을 거뒀는데 대부분 매를 맞아 숨졌다.

▧ 경기도 (13명, 10.5%)

경기도는 감영과 여주, 양근, 포천, 죽산, 광주 남한산성 등이다. 대부분이 경기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24위 중 경기도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13명이다. 조용삼 베드로, 최창주 마르첼리노, 윤유오 야고보 등이 경기도에서 숨졌다.

▧ 강원도 (3명, 2.4%)

124위 중 강원도에서는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지타 등 3명이 원주에서 순교했다. 이들의 출생지는 충청도 서산, 홍주 등으로 추정된다.

▧ 충청도 (18명, 14.5%)

충청도는 홍주, 정산, 청주, 덕산, 해미, 공주, 예산, 대흥 등 순교지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원시장 베드로와 방 프란치스코, 이도기 바오로, 원시보 야고보, 정산필 베드로 등 18명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 전라도 (24명, 19.4%)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 24명이 전라도에서 순교했다. 24명 중 22명이 전주에서 순교했으며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최여겸 마티아가 무장에서 숨을 거뒀다. 전라도에서 출생한 순교자가 가장 많지만 한양과 경기도, 충청도에서 출생한 사람들도 이곳에서 다수 순교했다.

▧ 경상도 (29명, 23.4%)

경상도는 대구, 함안, 진주, 통영, 상주, 동래, 울산 등에서 29명이 순교했으며 이 중 대구가 19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시우 알렉시오, 서석봉 안드레아, 구한선 타대오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고 충청도에서 출생한 사람들도 이곳에서 다수 순교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두 순교자 이야기

▧ 충청도- 원시장 베드로

원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경, 즉 56~57세가 됐을 때 사촌 형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했다. ‘시장’은 그의 관명이다.

본래 그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줬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데도 열중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체포돼 홍주 관아로 끌려갔다. 치도곤 70대 등 온갖 문초를 받았지만 천주를 배반하지 않고 어느 날 그를 만나러 온 교우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관장은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했으나 소용이 없어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으로 그의 나이 61세였다.

▧ 전라도-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총명한데다 품행이 단정했던 바오로는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한다. 이 무렵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됐으며 1787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 바오로는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권상연과 함께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지냈다. 이 소문은 널리 퍼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들은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1791년 10월의 일이다.

그들은 전주 감영으로 이송돼 문초를 받아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형선고를 받자 윤지충은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지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했다. 1791년 12월 8일, 그의 나이 32세, 그는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칼날을 받았다.

오혜민·이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