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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6.신학·철학자편 (3)성 보나벤투라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5-06-19 수정일 200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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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리용 공의회 준비 소명을 받고 동서방교회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하다 1274년 7월 15일 리용에서 세상을 떠난 성 보나벤투라의 유해가 운구되고 있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이르지 못해”

“신앙의 빛 반드시 따라야”

철학과 신학의 영역 구분

교황 레오 13세가 『신비가들의 왕자』라고까지 불렀던 성인. 보나벤투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스콜라 신학자로서 중세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이브 콩가르는 성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신학은 『은총의 산물』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일러준다. 보나벤투라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신앙 진리에 있어서 철학 자체의 한계를 분명히 밝혔다. 신앙의 빛이 없는, 즉 신학에서 분리된 철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 올바르게 밝힐 수 없다. 이성이 신앙에 의해 스스로를 넘어서지 않고 그 자체에 머문다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성은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진리의 빛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콩가르는 여기에서 성 토마스와 보나벤투라의 신학의 차이를 말한다.

『성 토마스는 신학을 신앙의 확신에 대한 성장으로 보며 이 확신들이 인간의 이성과 합치해 지식의 체계로 세워진다. 신학도 다른 모든 것처럼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성장 발전해 초자연적 신앙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나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이성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막역한 벗으로 지냈던 보나벤투라는 그러나 신학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랐다. 성 토마스가 주지적이고 분석적이었다면 성 보나벤투라는 주의적이고 신비적이었던 것이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 1274) 성인은 이탈리아 중부 비테르보 근처의 산골짜기 마을 바뇨레조에서 태어나 이 곳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기초학문과 종교교육을 받은 뒤, 당시 유럽 학문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본래 이름은 조반니 디 피단차였으나 124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수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이름을 바꾸게 된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어렸을 때,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된 그는 어머니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중재 기도를 청했고 기적적으로 치유가 됐다.

이때 성인께서 축복하기를 『O, buona ventura!』(오, 좋은 일이 올지어다!)라고 했는데,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1235년부터 6년 동안 파리대학교 문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243년에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같은 해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이후 1248년까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이후 2년 동안 성서를 가르쳤고 1250년에는 명제집 학사 학위를 받고, 당시의 신학교과서인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저서 「명제집」(Sentences)을 강의했다. 또 1253년에는 정식교수가 되어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한편 파리가톨릭대학에서 그는 역시 교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친분을 맺고 일생의 교분을 이어갔다.

1257년 2월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우선 학자로서 자기가 속한 이 신생 수도회를 공격하는 외부 세력으로부터 수도회를 변호하는 일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총장으로서 수도회 내부의 여러 유파로부터 수도자들을 보호해야 했다. 아울러 그는 가톨릭 교회 안팎의 이단 사상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활발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했다.

1273년, 그는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에 의해 알바노의 교구장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추기경에 서임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열린 제2차 리용 공의회를 준비하는 소명을 받고 동서방교회의 화해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공의회 4번째 회기 중인 1274년 7월 15일 리용에서 세상을 떠났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는 보나벤투라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식스토 5세는 1588년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특히 보나벤투라는 일반적으로 그의 뛰어난 덕을 기려 「세라핌적 박사」(Seraphic Doctor)로 불린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신학과 철학 분야에서 뛰어난 저서를 많이 남겼다. 사상적으로 그는 플라톤-아우구스티노 노선에 연결돼 있다. 이데아론 때문에 그는 플라톤을 따른다고 할 수 있고, 사상 체계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아우구스티노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노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누구도 아우구스티노보다 철학과 신학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다고까지 말했다.

보나벤투라 성인의 영적 학설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며 동시에 인간이고 스승인 동시에 형제이고 임금이며 친구이고, 영원한 말씀인 동시에 사람이 된 말씀이고 창조주이며 구세주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은 구속에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나무이며 생명의 책으로서 인간에게 생명을 보장해주는 나무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한 보물이 담긴 책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책을 발견해 읽는다면 그는 영생을 얻을 것이며,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이 받은 능력으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적 능력들을 정화해야 한다. 즉, 먼저 조명을 받고, 정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상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접점을 보고 그분이 구원의 중재자임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탈혼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은총, 그리고 깨달음과 훈련이 필요하다. 강한 원의와 기도 역시 필요하다. 그러한 탈혼의 경지에 도달하면 인간은 어떤 욕망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보나벤투라는 이 탈혼이 위에서 오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때 인간 이성의 지성적 활동은 너무나 강한 신적 빛에 의해 멈춰지고, 영혼은 빛난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인간이 이성보다는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한 차원 높게 고찰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피조물을 통해서 매개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에 대한 경험적 인식」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