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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5.신학·철학자편 (2)성 베르나르도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5-06-12 수정일 200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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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베르나르도는 시토회 출신으로 16~19세기 영성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림은 리발타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베르나르도」.
“수세, 혈세 화세로 대체 가능”

온유한 성격 엄격한 고행

성직자 사치 방종에 단호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였으며 구원된 자로서 창조하였다. 그 사랑의 최상의 증거는 말씀의 강생이며 구원이다.

그 사랑의 또 다른 증거는 성모의 출현이다. 성모는 또한 구원의 위대한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시토수도회 출신으로 에크하르트(Eckehart), 단테,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회 등 16~19세기 영성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 베르나르도(1090~1153)는 전형적인 「수도자적 신학」의 사상을 드러낸 인물로 꼽힌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새로운 유형의 사유를 도출해낸다기 보다 풍부한 내적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서를 참고 자료로 삼았으며 그 다음은 교부들의 수도자 생활 규칙에 관한 저서들 특히 「베네딕도 규칙서」같은 것을 참고했고 「전례」도 참조했다.

특히 구원 사업안에서 마리아가 보였던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신학적 견해를 드러내 보였던 베르나르도는 또 「세례론」 등을 통해 성사 신학에 대한 입장을 언급하면서 『수세(水洗)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혈세(血洗)나 화세(火洗)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그들 부모의 신앙 덕분으로 의화(義化)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그의 수도 신비적인 사상과 관련 『베르나르도의 신학은 하느님께로의 인격적인 상승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하고 『그의 교의적인 가르침과 수도적인 가르침은 분리될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수도생활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관상 기도에 전념하도록 고무시켰으며 또 한편 시토회를 개혁과 확장의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초기 시토회의 개념을 정착시켰다.

어머니 사후 시토회 입회

부르고뉴 귀족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피종 근처의 퐁텐 성에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샤티용의 생 보를 학교에서 중세 시기 삼학(三學)으로 불리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포함한 교육을 받으며 매력적이고 재치 있으며 학식과 웅변력을 갖춘 젊은이로 성장했다.

그러나 1107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의 말처럼 「완전한 회심을 향한 먼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1112년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토회에 입회했다.

당시 가장 엄격했던 시토회 규율에 따라 신학적 영성적 교육을 받았으며 1115년에는 대수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부르고뉴와 상파뉴 경계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계곡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1115년 샬롱 쉬르 마른의 주교이자 학자인 샹포의 기욤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베르나르도는 수도원 근처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극도의 절제된 생활로 공동체를 엄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의 상당수 초기 저술 활동은 이시기에 이뤄졌다.

1125년 자립 체계를 갖춘 클레르보 수도원 원장이 되면서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와 다른 나라에도 클레르보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애정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그의 성격은 명성을 불러 일으켰고 수도원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한편 그는 온유한 성품과 반대로 성직자들의 사치 방종이나 유다인들에 대한 박해 등을 얘기할 때는 대단히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클레르보 수도원장이 된 후 1130~ 1145년 정도까지 베르나르도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원숙하고 활동적인 시기를 보냈으며 당시 그리스도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의 제자였던 에우제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베르나르도는 제2차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순회 설교를 요청받고 십자군의 순수한 의미를 심어주는 설교를 펼쳤고 알비파(Albigenses)에 대항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다.

후대 서양 신비학의 기초

사상과 영성 면에서 교회 생활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성인들 중 한명으로 꼽히는 성 베르나르도는 당시 출현한 초기 스콜라 학파의 변증법적인 방법에 맞서 성서와 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살아간 수도자였고 직관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금욕적이고 전례적인 전통과 강하게 연결된 인물로 평가된다.

생 모르(Saint Mour) 학파의 대표적 전기 작가 마비용(J.Mabillon)은 베르나르도에 대해 『마지막 교부이지만 첫째 교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인바 있다.

무엇보다 그의 논문에 나타난 신심과 신비학은 후대 서양 신비학의 기초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학파에서는 성 베르나르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노선을 수용하였고 17세기 프랑스 학파는 베르나르도 신학의 기초적 노선과 깊은 연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신학자들과 설교가들 그리고 금욕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엄격한 고행과 지병으로 체력 소모가 컸던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사망했으며 1174년 교황 알렉산델 3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리고 1830년 교황 비오 8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됐고, 교황 비오 12세는 성인의 서거 800주년을 기념해 1953년 5월 24일 「꿀처럼 단 박사」라는 뜻의 「독토르 멜리풀루우스」(Doc tor Mellifluus)를 발표한바 있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