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1.수도회 창설자편 (9)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5-03-20 수정일 200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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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속주회를 창설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 전하라”

‘구속주회’ 설립, 사죄경 읽으며 고해신자 배려

『이 가난한 시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사제를 만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어 신앙의 신비에 대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냥 죽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태리 나폴리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다 「세속을 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살아라」는 깨달음으로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던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1696∼1787)는 어느날 새로운 부르심을 듣는다.

바로 경제적으로 빈곤한 처지에 있으면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교리 지식도 무지하고 종교적으로 내버려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이었다.

당시 그가 살고 있던 이탈리아 나폴리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만큼 화려함과 부를 지니고 있었고 그같은 대도시의 성격이 그렇듯 3만여명에 이르는 도시 빈민이 번창한 도시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

알폰소는 그러한 시대적 곤궁에 해답을 찾기 위해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찾아 어려움을 돌보았으나 육체적 한계에 부딛쳐 어느 산골 마을로 휴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그는 목동들 소작농 영세농민들을 만나게 됐고 이들의 가난함과 종교적 황폐함에 경악했다. 그가 후에 「제2의 회개」라고 밝힌 농촌 사람들과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구속주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나폴리에 많은 사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도시 밖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았음은 큰 충격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폰소는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도회를 창설했다.

이로써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루가 4, 18)고 하신 말씀을 따라 나폴리의 서민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새롭게 자신을 던졌다.

이미 오래전 귀족 집안으로서 법률가로서의 특권을 버린 그였지만 새로운 부르심에 그는 그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732년 알폰소는 가난한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타고 빈농가로 자리를 옮겼다.

알폰소의 전기를 처음 저술한 탄노니아는 이에대해 『알폰소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란 것을 확신한 후 자신의 힘을 모아 용기를 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폴리 전체를 봉헌하면서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살다가 이 배움이 부족한 목동들과 농부들 사이에서 죽기로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1734년 빌라 데글리쉬아비에 첫 번째 수도원을 세운 알폰소는 키오라니 일리체토 파가니 등에 차례로 분원을 설립했고, 1749년 교황 베네딕도 14세가 수도회 회칙을 인가했다.

창설 배경에서 보듯 구속주회의 영성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알폰소가 수도회에 정해준 표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였다. 여기에는 「충만한 구원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의미도 포함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하고 섬세한 사랑을 우리의 가슴속에 지니고 다닙시다』라고 강조한 알폰소의 뜻에 따라 회원들은 마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서는 목자처럼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복판을 찾아 수도원을 지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 배움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복음을 선포했던 회원들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순한 말과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알폰소는 『모든 이들이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강론할 것, 하느님 말씀의 빵을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도 받아먹고 배부를 수 있도록 잘게 나누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알폰소는 한편 당시 교회안에 팽배하던 얀세니즘과 윤리적 엄격주의에 거슬러 사람을 해방시키는 복음을 제시한 인물로 꼽힌다.

얀세니즘 영향으로 엄격한 생활이 강조돼던 상황에서 많은 사제들이 사죄경 낭독을 거절하기 일쑤였지만 알폰소는 고해소에서 항상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하며 신자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사죄경을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엄한 윤리를 강조한 얀세니즘의 흐름 안에서도 고해소에서는 자비와 부드러움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매우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죄를 지은 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스레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그는 얀세니즘과 윤리적 엄격주의가 결코 복음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얀세니즘 및 엄격주의의 주장들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같은 활동은 후대에 큰 업적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787년 살레르노에서 사망한 알폰소는 1839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시성됐으며, 1871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됐다. 또 1950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고해 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됐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