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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세계교회사 인물 100選] (42) 수도회 창설자편 (4) 아시시의 성 도미니코 (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4-12-19 수정일 2004-12-19 발행일 2004-12-19 제 242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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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리 열정적으로 설교
이단 맞서 정통 교리 전파
설교자회 도미니코회 창설
성 도미니코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다.
12∼13세기의 교회는 제2차 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이단자」들의 척결을 논의할 만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이단 운동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특히 가타리(Cathari)파 같은 경우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기사 귀족 영주 심지어 일부 성직자들까지 추종자가 생기는 현상을 빚었는데 이들은 교회를 부정하고 마니교에서 주장하는 이원론을 믿으며 교계제도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순회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이들의 세력 확장은 교회는 물론 국가의 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우려를 낳게 했고 심지어 이단 조사를 위해 파견된 교황 사절이 암살되고 알비(Albi) 지방의 가타리파를 근절할 목적으로 십자군이 조직돼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미니코수도회(일명 설교자 수도회, Ordo Praedicatorum)의 창설자 성도미니코(Dominicus 1170∼1221)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12∼13세기 교회 쇄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그는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가타리파 등 이단에 맞서 교회 정통 교리를 전파했고 수도회 설립 역시 그러한 참된 신앙을 적극 수호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 북부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출생한 도미니코는 사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성직 교육을 받았으며 교육 중심지로 유명한 팔렌치아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성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들에 의해 성직의 길을 걷도록 키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자들은 자녀를 가지면 일찍부터 결혼 생활을 할 것인지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성직을 준비하는 자녀를 두는게 큰 기쁨이었다.

성인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환한 빛의 등불을 입에 문 강아지 한 마리가 품속으로 들어와 그 등불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로 인해 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예수님께로 인도할 위대한 설교자를 잉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또 성인은 이마에 반달 모양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그 어머니가 꾸었던 꿈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부를 마친 도미니코는 고향 교구 오스마(Osma)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이 됐는데 참사위원이란 중세 유럽 주교좌 성당에 있던 제도로 성당 중앙 제단 주변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중요한 일을 함께 결정하는 사제들을 말한다.

이를 시작으로 공동 생활을 하게된 도미니코는 외교 사절로 덴마크 등 북부 유럽을 다니면서 이단 운동에 위협받고 있는 교회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로인한 심각성을 체험하게 됐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이단에 대응키 위한 시토회 설교 수사회에 합류한 도미니코는 9년 동안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설교자회 창설을 구상했다. 이단의 위협에 빠진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같은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절감에서다.

그가 구상한 수도회는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면서도 세속 가운데 살며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적극적인 수도회였다.

1215년 툴루즈(Toulouse)에서 첫 회원을 모집하고 풀크(Fulk) 주교 허락하에 활동에 돌입한 도미니코는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단체를 인준하는 교황 문서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인 수도회 기틀을 마련했고 그 다음해 교황청에서 발행한 공문을 통해 명실 공히 설교자 수도회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교회 상황에서 설교를 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주교들에게 제한돼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같은 교황청의 관심은 수도 생활안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그간 교회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목 형태를 선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증인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고 또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말과 행동은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다웠다.

1233년부터 시작된 그의 시성 절차에서 증언자로 나선 사람들은 『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열렬히 기도했으며 또 밤새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는 상당히 시끄러워서 그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 형제들이 잠을 깨기도 했다』고 전했다.

도미니코는 교회와 복음의 진리에 열렬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운동이나 공식적인 교회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참 가치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다감한 성품을 지녔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의지가 강하고 통솔력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책을 팔고 있는 도미니코.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