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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22) 예수님의 세례

입력일 2004-02-15 수정일 2004-02-15 발행일 2004-02-15 제 2385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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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처녀들은 시집가서 첫날밤에 물을 받아서 몸을 씻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때 밀기가 목적이 아니고 엄숙한 제의적인 행위였다. 몸을 정결히 닦는 의식은 원래 아프로디테에게서 왔다는데, 새 신부는 사랑의 여신에게 부부 금슬을 기원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몸을 닦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도 제의적인 성격이 크다. 단순한 물에 거룩한 말씀이 보태지면서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입문한다. 세례는 원래 뉘우침을 상징했다. 지난 죄업에 대한 뉘우침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가시화한 것이다. 눈물이 꼭 티끌만 씻어내지 않는 것처럼, 몸에 묻은 때를 물로 씻으면서 우리 영혼의 불결을 함께 닦아내고 정결케 하여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의식이다. 일찍이 요한은 세례를 통하여 뉘우침과 자책을 일깨웠다. 가령 빌라도가 예수에게 몹쓸 판결을 내린 뒤에 대야를 가져다 손을 씻고는 이제 자기한테는 죄가 없다고 발뺌한 것을 보면, 이천년 전 팔레스티나에서는 물로 씻는 행위가 적어도 일상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께서도 요한에게 찾아가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당황해서 손을 내젖는 요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설득하신다.

『모든 율법을 실현하는 일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다』( implere omnen iustitiam을 공동번역 성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옮겼다). 다시 말해 뉘우칠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옛 율법과 정의를 완성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려고 세례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가 저질렀던 분노, 욕망, 자만, 거짓에 대한 말없는 질책이기도 하다.

세례 장면은 미술에서 무척 자주 등장하는 단골주제이다. 서기 3세기 초의 로마 칼릭스투스 지하묘굴의 벽화 그림에서 처음 등장한 뒤, 예수님은 미술의 역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맨몸을 자주 드러내셨다. 중세시대 세례 장면을 보면 대개 나이 많은 할아버지로 의인화된 요르단 강이 긴 수염과 머리카락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채 큼직한 물독을 쏟아 붓고, 요한은 손을 내밀어 예수님이 물 밖으로 나오시는 것을 돕는다. 이처럼 강물 속에 몸을 푹 담궜다가 물 밖으로 걸어 나오시는 것이 옛 세례 장면의 도상적 특징이다. 세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밥티스모스」(baptismos)도 원래 「담근다」는 뜻이다.

또 그림 위쪽에 손이 하나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세례를 마친 뒤 예수님의 귀에 들렸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손과 빛살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또 12세기부터는 손이 사라지고 그 대신 하느님이 직접 얼굴이나 상체를 황금빛 구름 사이로 내미는 것도 흥미로운 변화이다.

「예수 세례」의 재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14세기 초에 일어난다. 예수님이 물 속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는 물가에 서 있는 예수님께 요한이 물을 떠다가 머리 위에다 부어드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물 밖으로 급히 나오시느라 본의 아니게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연출했는데, 이제는 가만히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되니까 그림도 퍽 점잖아졌다. 또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는 것도 그림에 기품을 더해준다.

그런데 유독 미술작품 가운데 세례 장면이 많은 이유는 무얼까? 제단화에도 「예수 세례」의 주제는 차고 넘칠 만큼 흔하다. 대답은 바오로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의 세례가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예수님 속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강물이고 우리는 그 거룩한 강물 속에 몸을 담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속으로 몸을 담궜고, 또 그의 죽음 속으로 몸을 담궜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로마서 6, 3 baptizati sumus in Christo Iesu in morte ipsius baptizati sumus를 공동번역 성서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라고 옮겼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영혼과 육신이야말로 구원의 강물이요, 그 강물에 몸을 적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몸처럼 살아 숨쉬는 일체화된 생명체라고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비유이다. 또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유비(類比analogy)이다. 이런 사상은 그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몸 안에 담궜습니다』(1고린토 12, 13 in uno Spiritu omnes nos in unum corpus batizati sumus를 공동번역 성서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마셨습니다」라고 옮겼다. 「받아마셨다」는 그릇된 번역이다. 독일어 성서의 「getrankt」라는 표현을 오역한 것으로 보인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1년경, 167×116㎝, 국립미술관, 런던. 마태오 복음서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표현은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비둘기가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날아내려 오는 것과 같았다」는 뜻인데, 화가들은 조금 상상력을 더해서 마치 성령이 비둘기로 『짜잔~』 둔갑해서 날아온 것처럼 그리곤 했다. 한 술 더 떠서 세례 장면뿐 아니라 성서의 다른 장면에 등장하는 성령까지 무조건 비둘기로 그려댔다. 덕분에 그림 속에서 성령을 찾기는 수월해졌다.
「뷔르츠부르크의 시편」에 실린 그림. 1240년경, 18×13.5㎝, 소장처 미확인. 물가에서 옷을 받쳐 들고 시중하는 천사의 소재는 동방교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가 라틴 지역에도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