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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세계교회사 인물 100選] (3) 교황편 (2) 성 대 레오1세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4-01-11 수정일 2004-01-11 발행일 2004-01-11 제 238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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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신앙 옹호’ 고대 교회 초석 마련
‘이탈리아의 구원자’ 로마 시민 신뢰 절대적
173편 서간, 100여편 강론 등 방대한 저술
교회 역사 안에서 교황으로서는 처음 「막뉴스(Magnus, 大)」로 불리게된 45대 교황 성 대 레오 1세(St. Leo Magnus I, 440~461)

그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요약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가지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로마시의 수호자가 되었던, 당시 서방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3세기경 교회의 가장 큰 논쟁 꺼리중 하나는 그리스도론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그리스도는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은가?」「그리스도는 한분 이신 하느님의 현현에 지나지 않은가?」 등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단일성 또는 상이성 문제에 대한 관심들이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 인근 수도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가 주도한 단성론은 그리스도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돼 있어 실제로는 신성 하나만이 있다는 주장으로 예수의 인성이 의문시되고 또 예수의 구원 업적과 교회의 구원 신비도 의문시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451년 10월 8일 개최된 칼체돈 공의회는 레오 1세 교황의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신학 논술,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이라고 불리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을 기초로 이같은 단성설을 단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에서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결합되어 있음」을 신조로 선포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이 서한은 역사가들에 의해 교황의 첫 「무류적 성좌선언」(無謬的聖座宣言)으로 평가된다.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라파엘로 작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아틸라 왕을 설득하러 나서는 레오 1세 교황」은 452년 훈족의 침공을 받아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군의 왕을 만나 직접 담판, 멸망 직전에서 구해냈던 레오 1세의 용감성과 권위 위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아틸라 왕을 설득하러 나서는 레오 1세 교황」(바티칸박물관 소장)
레오 1세 교황이 재위하던 시절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로마대제국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고트족의 로마 공격에 이어 훈족이 로마를 침입했고 속수무책이었던 발렌티누스 3세 황제는 교황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레오 1세는 만토바의 회담을 통해 화평을 얻어내고 아틸라 왕은 진지를 거두어 돌아가게 됨으로써 로마를 지킴과 동시에 교황의 위상을 크게 부각시켰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이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또한 455년 가장 야만적인 반달족이 가이세릭을 앞세우고 로마를 쳐들어 왔을 때도 레오1세는 적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로마를 그들 손에서 완전히 구출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로마 시민들을 살육에서, 로마시를 방화로부터 구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같은 노력들을 통해 레오 1세는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부각됐고 로마 시민들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교황직이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레오 1세는 173편의 서간들과 100여편의 강론들을 남겼다. 공식 문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서간과 강론은 신학적인 의미뿐 아니라 라틴문학사안에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서간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전까지 가장 광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당시 교황들 중에서 레오 1세는 대부분의 강론이 전해져 오는 유일한 교황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서간 내용이 교황 재직시에나 사후에도 교회 안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사제로서의 설교 직무에 충실했던 모습, 종교적으로 매우 돈독했던 신심을 엿보게하는 레오 1세의 강론집은 그후 전례적인 용도로 자주 이용돼 왔던 것과 함께 로마의 마니교 이단과 아르스의 힐라이우스주의와의 논쟁, 에우티케스 이단에 대한 반박 내용 등 교의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그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은 또 이들 강론을 통해서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했다. 재위기간중 로마의 수위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던 그는 이런 면에서 베드로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세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인명록은 이와관련 레오 1세가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권위에 의존해서」 결정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레오1세는 성서가 진술하는 두가지 근거를 들어 교황의 수위권을 역설했다. 즉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위임된 것은 단지 베드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좌에 등극하는 후계자들을 통해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학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교황 칭호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와함께 레오 1세는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황은 전체 교회를 위해 책임을 진다고 밝혔고 결국 자신들의 교구 내에서 행사하는 주교들의 지도권 ,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 내에서 행사하는 수도 대주교와 총대주교들의 지도권은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교황과의 일치로 통합된다고 밝혔다.

레오 1세는 신앙에 관해서도 탁월한 가르침을 제시했던 교황이었다. 175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레오 1세를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로 선포, 그같은 업적을 기렸다.

461년 11월 10일 서거한 레오 1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축일은 11월 10일.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