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제주 4·3 70주년 전국 청소년·청년 평화·신앙 캠프

정다빈 기자 melania@catimes.krrn이창준
입력일 2018-07-17 수정일 2018-07-18 발행일 2018-07-22 제 3104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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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상처 딛고 화해와 상생 노래하다
전국 10개 교구 700여 명 참가
기념관·위령탑·빌레못굴 등 방문
오해·편견 대신 진실 마주한 자리
4·3 올바로 이해하며 신앙적 성찰

7월 14일 4·3평화기념관을 방문한 참가자들이 비문조차 기록할 수 없었던 4·3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백비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다.

“동백꽃 피고 질 때면 너도 울고 나도 울었지. 이제는 말하리라. 우리 화해하고 함께 살자고.”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4·3을 기억하며 이제 화해와 상생의 세상으로 함께 가자고.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위원장 문창우 주교)는 7월 14~15일 1박2일간 제주 4·3 평화공원 등지에서 ‘제주 4·3 70주년 전국 청소년·청년 평화·신앙 캠프’를 열었다. ‘또한 그들의 영혼과 함께’를 부제로 펼쳐진 이번 행사에서 전국 10개 교구 700여 명의 젊은이들은 순례와 기도를 통해 4·3을 바로 알고 평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동참했다.

■ 제주 4·3 그리고 한국교회

지난 70년간 제주 4·3은 잊힌 역사였다. 70주년을 맞은 올해 4·3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여러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70년의 세월동안 쌓인 오해와 편견 그리고 상처는 4·3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을 힘겹게 했다.

한국교회는 지난 1월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를 발족해 제주 4·3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여정을 걷고 있다. 지난 2월에는 4·3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고, 4월에는 전국적으로 추모미사와 행사를 열었다. 이번 ‘제주 4·3 70주년 전국 청소년·청년 평화·신앙 캠프’ 또한 미래세대인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4·3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신앙적 성찰의 시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 함께 걷는 아픔의 길

전국 곳곳에서 모인 참가자들은 제주 4·3평화공원을 방문해 4·3평화기념관과 위령탑 등을 돌아봤다. 4·3평화기념관은 4·3 사건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4·3 사건의 피해 양상과 규모, 4·3 이후 화해와 상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등 4·3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망라하고 있는 전시관이다. 원주교구에서 참여한 청년 한수현(라파엘라)씨는 “4·3 사건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4·3평화기념관을 돌아보며 이름으로만 듣던 4·3의 진실을 깊이 알고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순례단은 참혹한 학살의 현장 ‘빌레못굴’로 이동했다. 빌레못굴은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의 수색작전에 의해 인근 애월면의 주민 29명이 집단학살당한 장소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빌레못굴에 숨어 지내고 있다 발각돼 살해당했고 빌레못굴 안에서는 동굴 안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시신도 여러 구 발견됐다. 원주교구 유지영(모데스타) 수녀는 “빌레못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참 아쉽다”면서 “어둡고 낮은 길을 기어 동굴 안으로 숨어 들었을 주민들의 마음에 상상으로나마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7월 14일 4·3 후유장애를 앓다 선종한 고(故) 진아영(마리아) 할머니의 생전 삶터를 방문한 참가자들.

생전에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졌던 고(故) 진아영(마리아) 할머니의 삶터도 방문했다. 진아영 할머니는 4·3 당시 알 수 없는 괴한의 총에 맞아 턱을 잃었고 평생 제대로 말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늘 입 아래를 가리고 있어 ‘무명천 할머니’라 불렸다. 순례 길잡이를 맡은 제주교구 이원규(라파엘) 신학생은 “할머니의 삶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삶이었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던 외로운 일생”이었다면서 “4·3 피해자들의 삶, 4·3사건의 아픔을 할머니는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 캄보디아에서 온 편지, 고통을 나누는 연대

이번 캠프에는 캄보디아 바탕방지목구 청년 4명과 성직자 2명이 참가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최대 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4·3처럼 캄보디아는 급진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200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다.

청년들을 이끌고 제주를 찾은 비네이 겟(Viney Nget) 신부는 4·3 순례가 “전쟁의 기억이 떠올라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내 “어디에나 고통은 있지만 하느님이 주신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며 “아픔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에서 캄보디아의 희망을 본다”고 덧붙였다.

서른한 살의 캄보디아 청년 키 리케(Ky Rike)씨는 캄보디아 내전 중 태국의 난민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기에 여러분의 감정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에게 일어난 비극을 통해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부르시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이제 우리가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데 앞장서자”고 덧붙였다.

제주교구 청소년들은 7월 15일 파견미사에서 그동안 모아 온 연대 기금 50만 원을 캄보디아 청년들에게 전달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순례의 여정 속에 평화를 향한 연대가 싹트고 있었다.

7월 14일 4·3평화기념관을 방문한 참가자 뒤로 ‘화해와 상생’이라는 4·3의 새로운 가치를 안내하는 문구들이 보인다.

■ 4·3을 돌아보는 신앙적 성찰

14일 제주 탑동 해변공연장에서 열린 ‘그들의 영혼과 함께’ 축제와 15일 제주 주교좌중앙성당에서 열린 파견미사는 모든 참가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4·3에 대한 신앙적 성찰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들의 영혼과 함께’ 축제에서 제주 중문본당 김선영(데레사)씨는 학살을 피해 들어간 동굴 안에서 태어나 버려졌지만 끝내 살아남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술했다. 4살 아들을 안고 도망가기 위해 갓난아이었던 김씨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김씨의 어머니는 3일 후 동굴로 돌아왔다. 김씨는 용케 살아 있었다. 김씨는 “그 이후로도 죽을 고비는 여러 번 있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훗날 세례를 받고 나서는 하느님이 나를 당신의 작은 도구로 쓰시고자 나를 살려두셨구나 생각했다”며 함께한 청소년들에게 “다시는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김씨는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사제(제주교구 홍석현 신부)로 길러냈다.

이어 축제 무대에 오른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우리는 분단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힌트를 4·3에서 얻을 수 있다”며 “4·3은 우리 민족사의 탈출기이며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할 매듭”이라고 말했다. 또한 “위대한 변혁은 모두 젊은이들이 이뤄낸 것”이라고 강조하며 “70년 전 4·3이 왜 일어났는지, 70년 전 제주에서 젊은이들은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볼 때 과거에 없던 새로운 미래를 그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15일 열린 파견미사에서 강론한 문창우 주교 또한 “4·3을 성찰할 때 우리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70년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저항하고 물리치고자 했던 것들이 더 잔인하고 교묘해진 형태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자”고 당부한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냉전 시대의 논리를 4·3에 적용하지 말고 두려움과 불신을 극복한 새로운 평화의 질서를 향해 나아가자”고 덧붙였다.

7월 15일 제주 주교좌중앙성당에서 강우일 주교 주례로 봉헌된 파견미사.

정다빈 기자 melania@catimes.krrn이창준 제주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