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주최 심포지엄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18-06-26 수정일 2018-06-27 발행일 2018-07-01 제 310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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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우촌 신앙 교육이 맺은 열매: 교회지도자들의 뿌리를 찾아서’ 

‘뿌리 깊은’ 가족 신앙, 한국교회 이끄는 지도자 키웠다
한국인 첫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부터 염수정 추기경·최창무 대주교 등 
성장과정과 가족 신앙 내력 등 분석
순교영성 깃든 교우촌에서 자라며 독실한 가족 신앙 자연스레 습득 성가정의 역할·중요성 되새겨야

냉담 교우 비율 증가, 신자 증가율 둔화 등 침체와 위기의 징후들이 점차 뚜렷해지는 한국교회가 오늘의 난관을 넘을 해법을 과거 교우촌에서 찾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총원장 전진욱 신부) 순교영성연구소(소장 백남일 신부)와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원종현 신부)는 공동주최로 6월 23일 오후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제3회 ‘교우촌의 믿음살이와 그 지도자들’ 심포지엄을 열었다.

‘교우촌 신앙 교육이 맺은 열매: 교회지도자들의 뿌리를 찾아서’를 주제로 택한 이번 심포지엄은 순교자로부터 이어진 순교영성이 교우촌의 가정 내 신앙과 인성교육에 큰 영향을 줌으로써 한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을 배출한 점을 밝혀 현대 신앙인들에게 가정교육의 나침반을 제시했다.

심포지엄은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거나 이끌고 있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인 고(故) 노기남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서울대교구 총대리 손희송 주교, 전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성장한 교우촌의 역사와 신앙 전통을 살펴보는 순서로 진행됐다.

6월 23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공동주최한 ‘교우촌 신앙 교육이 맺은 열매…’ 주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이 종합토론을 하고 있다.

■ 황해도 지역의 복음전파와 수안교우촌

-노기남 대주교 출신 교우촌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는 ‘노기남 대주교의 성장 배경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한국인 첫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1902~1984)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평양 논재, 황해도 수안, 강원도 이천 등의 교우촌과 공소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과 노기남 대주교 구술 자료인 「회상록」을 교차 확인하는 방식으로 노 대주교의 신앙의 뿌리를 추적했다.

조 신부는 “노 대주교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은 현재는 답사를 갈 수 없고 연구 자료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며 “노 대주교의 어린 시절 성장에 있어 그의 부모가 어떻게 신앙을 유지하면서 자녀들에게 그 유산을 물려줬는지, 어떻게 성소를 키웠는지 규명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노 대주교가 격변기 속에서 한국인 첫 주교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뿌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강한 신앙이었고 그가 성장했던 논재, 수안, 곡산 등의 교우촌이 남긴 유산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 진천 새울에서 안성 노루목 옹기점으로 이어진 믿음살이

-염수정 추기경 출신 교우촌

차기진(루카)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는 ‘염수정 추기경 집안의 삶과 신앙을 중심으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염 추기경 집안인 파주 염씨 가계와 신앙 내력을 살폈다.

시간적으로는 1700년대 후반부터 약 200년에 해당하고 공간적으로는 파주 염씨 집안이 대대로 거주해 온 진천 새울, 안성 노루목 등의 교우촌이 연구대상이다.

차 박사는 “염 추기경 집안은 옹기점 신앙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준다”며 “옹기점 신앙공동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점토와 연료를 따라 끊임없이 이주해야만 하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끈질기게 신앙을 지켰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차 박사 연구결과에 따르면 파주 염씨 집안은 진천 사기장골→진천 새울→충주 숭선→여주 오감→안성 노루목→안성 건지리→서울 피울 등으로 새 옹기점 터전을 찾아 차례로 이주했다.

파주 염씨 집안은 천주교 집안과 혼인을 맺어 성가정 공동체의 결합으로 믿음이 더욱 단단해졌고 이것은 성소의 배경이 됐다.

■ 연천공소 부부회장의 믿음살이와 신앙의 내력, 풍수원에서 원심이까지

-손희송 주교 출신 교우촌

원재연(하상 바오로) 교수(중앙대 교양학부)는 손희송 주교 부모인 손광호(마태오, 1970년 선종)·양 마리아(2014년 선종) 부부의 신앙을 추적해 손 주교를 비롯한 밀양 손씨 집안 출신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 배경을 찾았다.

원 교수는 “손 주교 부모는 1956년경 강원도 풍수원에서 경기도 북부 연천으로 이사해 1957~58년경 아버지가 먼저 의정부본당 연천공소 회장으로 임명된 후 1970년 뇌출혈로 선종할 때까지 13년간 성실히 공소회장직을 수행했고 이어 어머니가 공소회장직을 이어받아 1978년까지 약 9년간 공소를 맡았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 공소회장직을 부자간 혹은 삼촌과 조카 간에 계승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부부 간에 이어서 공소회장을 맡는 경우는 같은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이것은 부부 사이에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형성돼 있었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원 교수는 “손 주교 집안에서 춘천, 수원, 원주교구 사제와 수도자가 다수 탄생한 것은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세심하게 배려한 손 주교 부모의 신앙에 바탕한다”고 말했다.

■ 교구장을 낸 교우촌 전통, 갈곡리공소

-최창무 대주교 출신 교우촌

김정숙(소화 데레사) 교수(영남대 사학과)는 최창무 대주교가 신앙을 키운 갈곡리공소를 파주지역 천주교 신앙의 발상지이며 못자리라고 규정하고 “갈곡리 교우촌은 1890년대 형성된 후 100여 년 동안 중림동약현본당부터 법원리본당까지 6개의 관할 본당을 거치며 일제강점기, 6·25전쟁, 산업화 시기 등 교우촌 붕괴 조건들을 이겨냈고 옹기촌에서 농촌으로, 직장인 거주지역으로 적응해 왔다”고 소개했다. 갈곡리공소는 현재도 지역 25세대 가운데 22세대가 가톨릭신자이고 아직까지 삼종을 울린다.

갈곡리 교우촌에서는 ‘하느님의 종’ 김치호 신부, 최창무 대주교 등 사제와 수도자들이 배출됐고 2017년에도 강명호 신부(의정부교구)가 사제품을 받았다.

갈곡리 교우촌 출신 사제들은 자신의 영명축일을 고향에서 지내는 전통을 지키고 있으며 최 대주교 역시 금경축을 고향에서 기념했다. 김 교수는 “갈곡리 교우촌 신자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살아왔다”고 평가했다.

■ 전교회장 김기호와 그 가문의 믿음살이

-김운회 주교 출신 교우촌

금경숙(마르가리타) 박사(춘천교회사연구소)는 김운회 주교의 고조부인 김기호(요한·1824~1903) 전교회장과 후손들의 신앙활동을 연구해 집안 대대로 내려온 믿음살이를 추적했다.

황해도 수안 출신인 김기호 회장은 베르뇌 주교를 도와 서흥을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경기도 의왕 하우고개로 가족을 피난시켰다. 이 때부터 하우고개 교우촌은 김기호 회장과 그 가문의 신앙 활동 근거지가 됐다.

김기호 회장은 1876~1890년까지 블랑 주교를 도와 전교활동과 교리서 저술, 공소회장 교육 등에 종사했다. 은퇴 후에도 하우고개공소에 머물며 자서전인 「봉교자술」(奉敎自述)을 썼으며 하우고개성당을 지었다.

김기호 회장의 아들 김상일, 손자 김성묵, 증손 김재환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 유산을 간직했다. 금경숙 박사는 “김기호의 증손 김재환이 지은 「신앙인의 유산-4대에 걸친 발자취」는 김기호 회장 가문의 믿음살이 역사를 알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 여산 성치골 김해 김씨 등의 입교와 교회 활동

- 김선태 주교 출신 교우촌

서종태(스테파노) 교수(전주대학교 사학과)는 김선태 주교가 어린 시절을 지낸 성치골 교우촌을 “전주교구의 신앙 못자리 같은 곳”이라고 규정했다. 전라북도 완주군과 익산시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천호산 자락에 자리한 성치골 교우촌과 공소는 1839년 기해박해 전후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고 1846년 병오박해 때는 당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은신해 두어 달을 지냈던 곳이다.

성치골 교우촌에서는 전주교구 김현배, 이병호, 김선태 주교와 다수의 사제들이 배출됐다.

서종태 교수는 “성치골 교우촌 신자들은 초대 교회와 같이 신분 차별 없이 재물을 서로 나누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며 “특히 김해 김씨 집안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은 김해 김씨 가문은 경제적으로 넉넉해 신앙교육과 세속교육을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