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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성화의 날 특집] 사제의 첫마음

입력일 2018-05-29 수정일 2018-05-30 발행일 2018-06-03 제 309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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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닮은, 착한 목자로 살겠습니다”
6월 8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덕의 삶을 살아가는 사제들의 첫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올해 사제품을 받은 새 신부부터 40년 가까이 사목자의 길을 걸어온 사제에 이르기까지 서품성구를 정했을 때의 첫마음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새기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 김용수 신부(미카엘, 서울 서대문본당 보좌, 2018년 2월 1일 서품)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서품식 후 강복하고 있는 김용수 신부.

제 서품성구는 베드로가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 호수로 뛰어드는 구절입니다. 베드로처럼 저도 주님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주저앉고 싶거나, 망설여지는 순간에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든 베드로를 닮은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의 3가지 모습을 묵상하며 사제직에 대한 확신을 키웠는데요. 신학생 시절에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하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천사처럼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스스로 죄 많은 비천한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군 제대 후 복학해서도 성소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요. 망설임 안에서 복학한 후 묵상 중에 문득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께서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가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뭐라고 할 지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서품 전 30일 대침묵 피정 중 베드로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속 베드로의 모습이 저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이어주신 형제들’ 덕분입니다. 처음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자고 이끌어 준 이도, 신학교 생활을 하며 힘들 때 기댔던 이도, 제 자신을 다잡게 해준 이도 동기를 비롯한 선후배 사제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저와 함께 고민했던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선지 서품식에서 가장 울컥했던 순간도 형제애가 느껴졌을 때입니다. 처음 만난 어르신 신부님들께서 “형제가 된 걸 축하한다”며 안수를 주실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대기실에서 30여 명의 동기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도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이 모습 그대로 함께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 이웃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종이라 부르시지 않고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닮아 누구나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 조정제 신부(오딜론, 마산교구 사파동본당 주임, 1992년 8월 19일 서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조정제 신부의 서품상본.

신학대학 1학년 때, 선배 신부님들의 첫 미사에 참례하고 받은 상본과 성구들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여 누구에게 빼앗길세라 동료들에게 “내 것”이라고 선언하고 감히 1학년 때 미리 정해버린 성구가 바로 마태오복음 10장8절의 말씀입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생이 된 것도, 신학교를 무사히 잘 마치고 사제로 서품을 받은 것도, 모두가 하느님과 신자 분들로부터 ‘거저 받은 은총과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넘치는 은총과 사랑을 평생 잊지 말고 살자며 선택한 말씀이었고, 나를 언제나 되돌아 볼 수 있게 일깨워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26년간 사제로 살아오면서 그 말씀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 무모한 선택을 한 철 없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거창본당 주임을 맡아 새 성당을 짓게 됐을 때 일입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건설업체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후 자금을 마련 못해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멸치, 김, 미역을 판매하며 눈물겹게 노력한 본당공동체, 그리고 전국에서 기도와 정성을 보태주신 신자들 덕분에 하느님의 집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와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제법 시간이 흘러 지금의 제 모습을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점점 더 많이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적게 주고 있는 저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길에 나서며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도 제대로 못 그리고 있는 저 자신을 나무라는 부담으로 다가올 때 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꾀가 납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루카 10,7) 지금에 와서 이렇게 서품성구를 바꾸면 안 되겠지요? 이 말에 본당 신자 분께서 호통을 칩니다. “신부님, 마 그냥 첫 마음으로 사소.”

‘씰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고양이라도 제대로 그리라고 핀잔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 받아들이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모든 것, 제가 거저 받았음을 다시 고백합니다.

■ 김용찬 신부(요한 사도, 서울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평양교구 1호 사제, 2016년 2월 5일 서품)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사제로서 낮은 삶을 다짐하고 있는 김용찬 신부.

제 성구는 조금 특별합니다. 10여 년 동안 고민한 끝에 사제직과 평양교구에 대한 확신을 준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면서 사제직에 대한 꿈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신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0여 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회의감이 밀려왔고 하느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9살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북한선교를 위한 평양교구 신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마음에 불타오르는 열정과 확신이 생겼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사제품을 받던 날, 서품식 내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닥에 엎드릴 때부터 울컥하기 시작했는데 안수를 받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꿈은 지금 당장이라도 북한에 가는 것입니다. 평소 친한 동기들에게는 “내가 평양에 가기 전에 죽으면 북한 지역에 묻어 달라”는 말을 합니다. ‘평양교구’는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화해와 일치의 관점에서 꾸준하게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평양교구 신학생으로 입학했을 땐, 저도 평양에 가면 일단 성당 등 건물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체사상이 뼈에 박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 묻혀 살며,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실천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서울이든, 아프리카든, 평양이든 장소는 달라도 결국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 장인산 신부(베르나르도, 청주교구 원로사목자, 1979년 6월 15일 서품)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을 밤에는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얼마나 좋으니이까’(시편 92편, 공동번역 성서)

1979년 독일 쾰른대성당에서 거행된 장인산 신부 서품식.

사제의 본분은 하느님께 대한 마음가짐을 신자들에게 생활로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에 이 구절을 저의 서품성구로 삼았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온종일 주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제들에게 내리신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신 분께 기쁨으로 찬미 드립니다. 또 하루를 보내면서 중간중간 삐뚤삐뚤 걸어도 바르게 잡아 세워주심에 감사드립니다.

6·25전쟁 중에 아버지가 전사하시고, 어머니는 4살, 1살 어린 아들 둘을 품에 안고 대구에서 너무나 가난한 피란생활을 하셨지요. 그런데 제가 덜컥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저를 업고 성모당에 가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셨고, 매일 밤 ‘하느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엾이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밤에 안 주무셔도 사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기도의 은덕으로 하느님께서는 저를 후유증 없이 치유시켜주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베르나르도야, 너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 받았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으니 사제가 되어 매일 감사미사를 봉헌하면 참 좋을 듯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에겐 그 말씀이 큰 축복의 말로 들렸습니다. 간절히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어린 시절, 동생 장인남 대주교와 성체강복 흉내를 내는 놀이도 하곤 했지요. 동생보다 3년 일찍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독일에서 공부를 하느라 서품은 동생보다 도리어 3년이 늦었습니다. 40여 년 전 독일 쾰른대성당에서 진행된 서품식 중, 이미 사제가 된 동생이 안수를 해주는데 너무나 큰 감동과 기쁨이 밀려들었습니다. 또한 서품식 때 화답송 지휘를 맡게 된 것도 감동적인 체험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최근 발표하신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특별해서 불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쓰시겠다고 하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을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평생, 주님께서 연주하실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울림통을 가진 악기가 되고 싶습니다.

■ 김대건 신부(베드로, 대전 복수동본당 주임, 2005년 1월 25일 서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편 1절, 공동번역 성서)

서품식에서 기도하고 있는 김대건 신부.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 행복을 누립니다. 제가 먼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건축공학을 공부하다 25살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사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름도 ‘대건’이라 지어주셨는데요. 저는 그저 부모님의 바람으로만 생각하고 성소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군 제대 직후 돈을 잘 벌고 싶은 마음에 빠져든 이른바 ‘다단계’로 인해 부정적인 체험을 했고, ‘내 꿈이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새롭게 고민했습니다. 잊고 있던 사제성소가 떠올랐죠. 사제가 되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었고, 신학생 때부터 프라도 사제회의 영성도 따르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제품을 받기 한 달 전에 건강이 안 좋아진 걸 알게 됐지요. 서품식은 겨우 치렀지만 첫미사도 제대로 집전하지 못하고 병원에 가야했고, 중증근무력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본당에 부임해서도 겨우 한 달 남짓 머물렀습니다. 수술, 중환자실, 다시 요양…. 목소리조차 거의 나오지 않아서, 사제로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저의 서품성구가 다시 힘이 됐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어둠의 골짜기를 가고 있는 것 같아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봐주신다는 것을 투병생활 중에 온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사제는 직무를 통해 성화되기도 하지만 존재 자체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제로서,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직무수행, 즉 미사와 각종 성사 집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렇지만 많은 신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투병하는 저를 보면서 ‘저렇게 견디는 신부님도 계시는데, 내 앞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나도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많은 이들을 위한 희망의 도구로 쓰신 것입니다. 이젠 매 순간, 내가 뭔가를 하겠다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고 계신가를 깨닫기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