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5-15 수정일 2018-05-15 발행일 2018-05-20 제 3095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하느님 진실로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실행돼야
참된 기도 바탕된 관상은 일상으로 드러나기 마련
삶의 중심에 주님 모실 때 사랑받고 있음 깨닫게 돼

찬미 예수님.

이미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 은총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더 잘 이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인지와 정서의 차원에서 살펴봤습니다. 이제는 행동(의지)의 차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모두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을 지나시다가 마르타라는 여자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시죠. 예수님을 초대한 마르타는 당연히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런 마리아가 못마땅했는지, 마르타는 예수님께 당신 동생을 좀 타일러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교회의 전통 안에서 많은 이들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을 각각 그리스도인 삶의 두 측면인 활동과 관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 왔고, 마리아가 좋은 몫을 택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서 활동보다는 관상이, 일보다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해석을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해석에 근거해서, 우리 신앙인은 세상일에 관여하기보다는 기도생활과 같은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활동과 관상은 구별되는 것일까요? 기도와 일을 두부 자르듯이 딱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앞서 인지 차원에서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정서 차원에서는, 신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온전히 알아듣고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습니까?

또다시, 사랑하는 연인들의 예를 들게 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는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져가죠. 함께 있든 떨어져 있든, 그 사람의 존재가 내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그저 내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요? 서로 떨어져 있는데도 한 번도 연락을 안 하거나, 혹은 일이 너무 바빠서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거나, 나중에 그 사람이 알게 되면 속상해 할 일을 그저 내가 좋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그 사랑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느님을 참되게 알아듣고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모습이 삶 안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해야 하니까 일부러 애를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겨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죠. 의지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인지 차원이나 정서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그저 나 혼자 마음 편하자고 하느님 안에서 도피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 마음의 고통이 있을 때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로부터 위로와 평안함을 얻는 것에서만 신앙생활의 만족을 느끼고 있다면, 그런 분은 아직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고 또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관상과 활동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특성은 있지만, 그것이 아주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대로 이뤄진 관상이라면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도라면, 그 기도가 제대로 잘 된 것인지를 의심해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뤄지기 위해서는 참된 기도가 밑받침돼야 합니다. 참된 기도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겉모습은 아무리 선한 것처럼 포장돼 있다 할지라도 실상은 나 자신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행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상과 활동 사이의 논리적인 순서, 어느 것이 더 먼저인가를 따지면 관상이 더 먼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관상과 활동은 이처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이웃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사랑하시는 다른 이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성경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씀드리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난 모습, 좋은 모습만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추하고 약한 모습, 한계와 죄성을 많이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 안에 하느님께 대한 인지 차원에서의 온전한 지식과, 정서 차원에서 그분을 삶의 중심으로 모신다는 면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들었고 그래서 그분이 내 삶의 중심이 되신다면, 자연스레 내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도가 ‘은총으로 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깨달음이 삶의 구체적인 행동들 안에서 드러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미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쉽게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의지입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