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제가 사람을 때렸습니다 / 이연세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rn
입력일 2018-03-27 수정일 2018-03-27 발행일 2018-04-01 제 3088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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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초, 봄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쌀쌀한 야간에 병사들의 야간사격 통제를 나갔습니다. 검은 그림자만 어른거리는 어둠 속! 자칫 방심하면 예측하기 어려운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온몸의 신경 촉수들이 날을 세웠습니다. 병사들에게 안전교육을 단단히 실시하며 재차 삼차 주의를 강조하고, 탄약분배소와 좌우측 사선(射線)에 통제 간부를 배치함은 물론 군의관과 앰뷸런스도 대기시켰습니다.

조용한 정적을 깨고 “땅, 땅, 땅”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사격이 3분의 1쯤 진행됐을까, 어디선가 “딱 딱 딱” 껌 씹는 소리가 곤두선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껌을 뱉으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사선에 있던 사수들의 사격통제를 마치고 표적을 확인하던 중이었습니다. 옆에서 부사수를 하던 병사 한 명이 계속 껌을 씹고 있었습니다. 순간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야 이 00야! 제 정신이 아니로구나! 여기는 사격장이야. 잘못하면 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부사수는 표적 확인 때 사선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차렷!”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병사의 뺨따귀를 세차게 후려 쳤습니다. 병사는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웅크렸습니다. 웅크린 병사의 엉덩이를 가격하자, 힘없이 경사지로 굴렀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격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로 교육을 했겠지요. 그러나 사격장에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소대장 시절, 사격장에서 소대원의 사고를 경험했던 트라우마가 분노 폭발의 트리거(방아쇠)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처벌과 함께 신상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분노는 활화산이 터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끓어오른 분노는 사람의 이성을 집어 삼기는 블랙홀입니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잠언 16,32)고 했지만, 한 번 불이 붙은 분노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후회를 하게 될 텐데도 말입니다.

다행히도 그때 구타를 당했던 병사는 국군수도병원의 검진 결과 별다른 증상이 없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병사에게 가했던 폭력을 생각하면 죄스런 마음과 함께 소름이 돋습니다. 만약 그 병사가 잘못됐더라면 그 죗값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삶은 격랑 속에 휘말려 지금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병사가 잘못을 했더라도 분노의 마음을 다스렸어야 했습니다. 당시 구타가 일부 용인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폭력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이름도 얼굴도 희미하지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를 빕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51,3-5)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