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믿음의 사람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
입력일 2018-03-13 수정일 2018-03-13 발행일 2018-03-18 제 308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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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살아서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로 구원된다는 믿음 가져야
살아온 날들을 놓고 하느님 앞에서 시험 본다 해도
심판 아닌 자비로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 기억해야

찬미 예수님.

고통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것이 우리 삶의 지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탓 없이 주어지는 어려움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해 괴로워하기 보다는 나의 모든 지식과 이해와 존재를 넘어서는 하느님께서 결국에는 나의 선과 행복을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 삶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어떠세요? 하느님께서 나의 선과 행복을 바라신다는 것이 잘 믿겨지시나요? 우리 삶이 평온할 때는 그런 하느님을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죠.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계속되면 그 선하심과 사랑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잘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로마에 공부하러 가서 처음으로 학기말 시험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아홉 달 동안 이태리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태리어로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업 내용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나중에 강의록을 해석하면서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죠. 그래서 초기에는 ‘이렇게 해서 무슨 공부가 되겠나?’ 하는 생각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을 치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서의 시험은 대부분 교수님과 일 대 일로 마주 앉아서 질문을 듣고 답하는 구술 형식으로 치러지기 때문에 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시험을 치러나갔고, 그 안에서 교수님들의 자비하심도 많이 느끼고 또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죠.

그런데 마지막 남은 여섯 번째 시험이 하필이면 제일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다른 과목은 그래도 내용을 이해하면서 수업을 따라갔었는데, 이 과목은 한 학기 동안 무슨 내용을 다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과목이었죠. 시험까지 3일의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제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기만 했습니다.

결국 시험 날이 되어 교수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수님께서 학기 중에 제가 제출했던 과제물 내용을 설명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내심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내용을 설명하려는데, 이태리말로 하는 것이 또 쉽지가 않죠. 우리말처럼 매끄러운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단어들만 생각나는 대로 띄엄띄엄 말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 듣고 계시다가 ‘이제 되었으니 그만 나가보라’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씀하시더군요. 마음이 다급해진 저는 다시 설명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말을 이어갔지만, 여전히 같은 단어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교수님께서 굳은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사람이 시험 봐야 하니까 그만 하고 나가라.”

그렇게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나왔는데 마음이 참 좋지 않았습니다. 문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시험을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시험을 본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썩 잘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답을 할 수는 있겠다. 통과는 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시험에 임해왔던 저였습니다. 나름으로 믿는 구석은 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믿는 구석 없이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시험을 치러야 했으니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사실 아주 큰일은 아닙니다. 준비가 잘 안되어서 시험에 떨어진다면 번거롭기는 해도 나중에 시험을 다시 보면 될 일입니다. 만일 여러 시험에 통과를 못해서 낙제를 하고 그래서 한 학년 공부를 다시 하게 되더라도, 역시 아주 큰일은 아닙니다. 다시 하면 되는 일이죠. 만약에 로마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교구로 돌아오게 된다면 어떨까요? ‘기껏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다 마치지도 못하고 중간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스스로 창피할 수는 있지만, 이 역시도 제 삶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교구로 돌아오더라도 사제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안타까움도 번거로움도 창피함도 다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삶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보는 시험이라면 어떨까요?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언제고 하느님 앞에 서서 각자가 살아온 날들을 놓고서 시험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시험을 정말 보게 된다면, 그 시험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다른 시험이야 떨어져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보는 시험에 떨어진다면요? 모르긴 몰라도 우리 영혼의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물론 나름으로 우리는 그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중심이 아니라 너중심으로, 하느님 뜻대로 선하게, 성실하게 또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우리들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의 시험을 준비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통과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래, 이 정도면 성인 같은 삶까지는 아니어도, 떨어지진 않을 거야. 낮은 점수로라도 통과는 할 거야’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더라도, 하느님 앞에서의 시험을 통과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마지막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준비를 잘 했고 그래서 시험에 통과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부족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과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내가 그럴 만해서, 자격을 갖추어서 받아주시고 통과시켜 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음에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자비로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누구죠? ‘신앙인’,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셋 중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 참조)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지만, 우리 스스로를 ‘애덕인’이 아닌 ‘신앙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그분과의 참된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2코린 5,7)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