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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정의로운 평화 / 손서정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입력일 2018-01-09 수정일 2018-01-09 발행일 2018-01-14 제 3078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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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2학년인 작은 아이가 느닷없이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묻는다. 학교에서 서예가를 모셔서 붓글씨로 가훈을 써주는 특별한 행사를 계획한 모양이다. 우리 가족은 그날 저녁 갑자기 둘러앉아 각자 제 안에 있는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 놓으며 가훈을 급조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초등학교 때 처음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고 무척 곤란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 경우는 거꾸로 가훈이 너무 많아 그걸 어떻게 적어갈지를 걱정했었다. 유달리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가훈 100조’라는 제목의 노트를 마련해 빽빽이 채우고 계셨다. 하루 세 번, 3분씩 이를 닦는 세세한 일상생활의 원칙부터 당시 머리에 입력되기엔 심오한 철학까지 담겨있었던 걸 떠올리며 나의 게으름을 반성했다.

어쨌든 그날 저녁은 여러 개의 후보를 떠올리다 막상 정하지는 못한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묵상을 하던 중에 ‘즐거운 사랑, 정의로운 평화’라는 구절이 머리에 정돈돼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말했더니 좋다고 한다. 그런데 즐거운 사랑은 웃기다고 하더니, 결국 하교 후에 들고 온 멋진 붓글씨는 ‘정의로운 평화’였고, 그날부터 우리 가족의 가훈이 됐다.

평화를 말하면 그저 고요한 평온을 떠올리기 쉽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런 고요함이 표면 아래에 들끓는 갈등과 불의를 덮어버려 평화가 유지되는 듯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무시된 평온은 결국 폭발돼 더 큰 갈등으로 터져 나온다.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합의를 거쳐 갈등상황을 정의롭게 하나씩 풀어가는 그 과정이 바로 평화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염원하는 한반도의 평화가 멀게 느껴지는 것도 처음부터 정의롭지 않게 분단의 첫 단추가 끼워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인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돼 통치된다. 그 과정에서 반성을 통해 정의를 세우고 통일해 이제 유럽 내의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반면, 전범국인 일본 대신 희생양이 돼 분단된 한반도는 강대국의 횡포에 휘말려 아직까지 식민지적 잔재 요소를 청산하지 못한 채 평화를 위협받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불합리함을 외치기보다 친일세력이 유지하는 위상에 침묵하고, 많이 배우고 가진 기득권층이 위로부터 제시하는 조작된 프레임에 갇혀 작은 목소리를 묵살하는 종용에 굴복하고 있다.

무엇이든 참고 인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강요해 온 사회에서 무엇이 정의인지 고민해 나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평화는 점점 멀어져만 갈 것이다. 더구나 나의 작은 목소리가 그들의 큰 목소리처럼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식을 따른다면 그 또한 다를 것이 없다. 모두를 사랑으로 품으신 그리스도 정신이 그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올해에는 정의로운 평화를 내 삶에서 실천하기 위한 목록을 만들어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겠다. 그러는 가운데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11) 믿는다.

손서정 (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