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하고 부르면 “어? 날 부르는 건가”하면서 설핏 망설이다 돌아본다. 아직은 ‘신부’라는 호칭이 어색하고, 여전히 ‘수사’가 좋다고 말하는 조남준 스테파노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다. 서품식 뒤 며칠간 이어진 미사 봉헌을 마치고서야 마주할 수 있었다. 실제 10년간 기다린 이야기였다. 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 ‘왜 하필 나?’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예학과를 졸업하고 지미집(크레인과 같은 구조 끝에 카메라를 설치한 장비) 카메라감독으로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교통사고는 스물아홉 살 청년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겨우 눈을 뜨자 처음 들은 말은 ‘목이 부러졌다’, ‘전신마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으스러진 목뼈를 제거하고 골반 뼈 일부를 갈고 철심으로 박아 목을 지지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눈도 뜨고 말도 하고 정신도 또렷한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뜨고 있는 ‘통나무 인간’이라고나 할까. 매일같이 신자들이 와서 기도를 해줬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왜 죽지 못하고 살았을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왜 하필 나지?”
어머니가 병실에 십자고상을 들고 오셨을 때는 하느님은 없다면서 욕부터 했다. 말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죽을 수조차 없었다.
■ ‘할 수 있는 건 기도뿐’
고통의 연속이었다. 전신마비라고는 하지만 실체를 제대로 느낄 수도 없는 고통은 계속됐다. 무엇보다 배변이 고통스러웠다. 마비로 인해 신경이 죽고 근육이 마를 뿐 아니라 장기들도 거의 제 기능을 못해 강제 관장을 하고 어머니가 변을 받아내야 했다. “20대 청년이 누워서 똥을 싼다는 것은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도리어 “아기 땐 네 똥을 받아내면서 얼마나 기뻤는데. 냄새도 안 난단다. 하느님께선 아기 때처럼 너를 다시 키우라고 하시는 거 같아”라고 말했다.
조 신부는 당시 어머니의 모습에서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끝까지 함께 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봤다. 어느 순간, 그 또한 그토록 부인했던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 그는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 ‘감사는 변화의 시작’
어느 날 어머니는 “지금 이 상태를 받아들이자,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고 권했다. 거짓말처럼 그의 마음도 움직였다. 욕창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며 몸이 깨끗한 현실에 감사했고, 교통사고로 지능을 잃은 환자를 보며 머리도 멀쩡하고 부모님을 알아보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사고를 겪게 해주신 건 아닐까…. 감사하는 마음은 나만 바라보고 있던 내 시선을 이웃들에게로 옮겨줬습니다. 그동안 모든 것을 내 힘으로 노력해서 얻은 건 줄 알았는데, 모두 하느님께서 허락해주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였다. 당시엔 한 손만이라도 움직여 혼자서 배변 처리를 하는 것을 가장 큰 바람으로 품고 있었다. 힘겨운 재활치료를 거듭하면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고 침대에서 내려오고 일어서고 드디어 걷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