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제 십자가를 지고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
입력일 2017-11-14 수정일 2017-11-14 발행일 2017-11-19 제 307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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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심’ 버리는 힘든 여정 참고 이뤄내야
욕구는 본성과 반대로 향하기 쉽지 않아
고통 인내하는 과정 자체가 ‘십자가’

찬미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 욕구와 관련해서 나 중심의 욕구를 버린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구를 버린다’고 표현하더라도 실제로 이 욕구를 내 안에서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도 드렸지요. 우리 안에서 욕구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 각자가 바라는 더 좋은 모습으로 훨씬 쉽게 바뀌어 나갈 수 있을 텐데요. 바라는 대로 기도생활도 더 잘 할 수 있을 테고, 신앙인으로서 성숙하게 또 인간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 안에 자기중심적인, 부정적인 욕구만 없다면요.

하지만 욕구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내 안의 욕구를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욕구가 이끄는 대로 나에게만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벗어나서(버리고!) 너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와라’는 말씀을 들으시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통일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게 될 때 ‘왜 주님께서 내게 이런 십자가를 주시나?’ 묻게 되죠. 제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셨으니까 지금 겪는 이 고통이 내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인가보다 생각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십자가 고통을 겪기를 바라실까요?

그렇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자녀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죠. 그리고 그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떠안으셨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구원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하느님께서는 기쁨과 행복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지, 우울한 생각 안으로 빠져들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일반 알현」, 2017. 9. 2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더러 ‘제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난여름 청년성서모임 연수지도를 맡으면서 알게 된 멋진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청년은 자전거 타는 것을 취미로 가지고 있었죠. 자전거 타는 것을 취미라고 소개할 만큼 이 청년의 자전거 타기는 쉽게 즐기는 여흥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굉장히 먼 거리를 다녀오기도 하고 때로는 높은 산에 오르기도 하는 전문적인 수준이었죠. 여름 끝자락에는 무주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었고, 그래서 여름 내내 연수 준비를 하면서도 틈틈이 훈련을 하고 또 대회 코스 답사도 미리 다녀오곤 했습니다.

어떠세요?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또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이 참 멋져 보이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사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저로서는 그다지 부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힘든 일을 일부러 찾아서 하는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해발 400~5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고개들을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대회 코스는 차를 운전해서 가더라도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짧게는 70㎞, 길게는 135㎞를 가야 한다니, 더구나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힘들게 훈련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니, 저로서는 도무지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자전거를 타면서 원하는 것이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이었을까요? 힘든 훈련의 여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다리에 쥐가 날 수도 있고, 내리막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해 넘어져서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 틈틈이 시간을 내어 훈련을 하느라 주말에 쉬지 못하기도 하고 또 반가운 친구들을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어쩔 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희생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원한 것이 그런 희생,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잘 아실 겁니다. 저로서는 그렇게 힘들게 자전거 타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하나의 여정을 완주해냈을 때의 성취감, 그리고 자전거 타면서 즐길 수 있는 속도감, 시원한 바람! 아마도 이러한 것들이 그 청년이 원한 바일 것입니다. 이를 느끼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힘겨움, 땀, 고통의 시간들을 이 청년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더러 일부러 십자가를 찾아서 지고 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십자가도 대신해서 지고 가실 분이니까요.

결국, 제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예수님 말씀은 일부러 또 다른 십자가를, 고통을 찾아서 지고 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 중심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힘겨운 과정을 잘 참고 이루어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요. 나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근본적인 욕구들을 따르지 않는 것, 나만을 생각하고 나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본성과는 반대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해주신 모습 그대로의 본성이 아니라 원죄로 인해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잃어버린 본성 말입니다. 자신의 근본적인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힘겹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미 하나의 십자가인 것이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리는 여정 자체가 곧 십자가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구원의 상징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민범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