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욕구와 함께 살아가기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10-31 수정일 2017-10-31 발행일 2017-11-05 제 306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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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는 억누를 대상이 아닌 나의 일부분
없애려 하면 더욱 자신을 충동시킬 뿐 받아들이면서 점점 자유로워져야

찬미 예수님.

오늘도 욕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욕구에 대해서 나눌 말씀은 훨씬 더 많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생활면담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방학 생활에 대한 물음에 한 신학생이 이런 내용을 나누었지요. 이번 방학 때는 다른 때보다 본당 일, 특히 주일학교나 청년 행사에 함께할 기회가 더 많았고 그래서 열심히 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그에 대해 고마워하는 내색을 잘 안 하더라는 겁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열심히 일할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자신의 마음이 실은 뭔가 보답받기를 바라는 좋지 않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 마음을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다시 열심히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그 신학생의 말이었습니다.

어떠세요? 이런 신학생의 모습이 참 기특하고 예쁘죠? 맞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이죠. 그런데 한편으론 아쉬웠던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 아쉽다기보다는 그 학생이 더 배워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이죠.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좋지 않은 마음들, 욕구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누군가로부터 고맙다는 인사, 보답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알아차리는 모습이죠. 계속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찾아낸 욕구를 어떻게 할까 하는 부분입니다. 내 안에 이런 욕구가 있어서 그랬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다음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신학생의 경우는 그런 욕구,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어지길 원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가져야 할 좋은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없애달라고 기도한 것이죠. 그런데 그 마음이 쉽게 없어질까요? 아니, 쉽게는 아니더라도, 욕구라는 것이 정말 우리 안에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안의 욕구는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몸 차원에서의 욕구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음 차원에서의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너무나 여러 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해서 말씀드렸지요. 그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신학생의 경우에서처럼, 자신 안에 있는 욕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욕구가 없어지기를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욕구는, 마치 물이 차있는 커다란 욕조에 담겨 있는 풍선과 같습니다. 그 풍선을 물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애쓰지만 자꾸 물 위로 올라오려고 하죠. 더 힘을 줘서 세게 밀어 넣으면 그만큼 더 세게 물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합니다. 우리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욕구가 보기 싫어서 내 안에서 없애려고 하면, 아니, 적어도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 밀어 넣으려고 하면, 욕구는 오히려 더 큰 힘으로 나를 부추기고 충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욕구는 없애거나 억누를 대상이 아니라 다스려야 할 대상입니다. 다르게 말씀드리면, 그것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래서 평생을 ‘데리고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다스리거나 데리고 산다는 것이 결국에는 억누르는 것과 같은 것 아니냐고 물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모양새입니다.

다시 앞서의 신학생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렇게 신학생으로서 본당에서 봉사하고 사목 경험을 쌓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신학생이 그런 서운함을 느끼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인정이나 보답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없어지길 청하거나, 아니면 자꾸 그 마음을 억누르면서 일을 해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서운한 마음은 계속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점점 쌓여 가겠죠. 그러다 보면 한편으로는 일할 의욕이 안 생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에 대한 화도 쌓여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상할 수 있는 모습 중 하나는, 자신의 본분은 신학생이지 주일학교 교사나 청년단체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합리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모습이죠. 아니면,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뒤따르지 않아서 점점 소홀해지고, 그런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또 기도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자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있는 욕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욕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것을 따라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 나도 사람이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 있겠구나. 한편으로는 당연하기도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욕구를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열심히 봉사해봐야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듣고 내 안의 욕구도 채워지지 않으니까 더는 열심히 일하지 말자’라고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제의 삶을 준비하는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욕구가 안 채워진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서운한 마음이 계속 들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계속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 안의 욕구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 욕구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모습입니다.

서운한 마음을 꾹 억누르면서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죠.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속마음은 크게 다릅니다. 서운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기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 느끼게 되는 서운함에 대해서는 그를 달래줄 수 있는 건강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죠.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계속될 때, 서운한 마음 그리고 그 서운함을 느끼게 하는 욕구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게 됩니다. 욕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내 안의 욕구가 무엇인지 (의식)성찰하고 깨닫는 것, 그 찾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욕구를 지닌 내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정화’의 길이고 ‘영적 자유’의 길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