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마당에 들어서니 고 이남규 교수가 조각한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1964년 설치된 성모상은 3m 높이로 매우 큰데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얼굴선이 투박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예수상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 표정도 우울해 우리가 흔히 아는 ‘자애로운 성모상’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독특한 성모상에 대해 박진홍 주임신부가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니 성모상을 다시 한번 경건하게 바라보게 된다. “제가 생각하는 이 성모상의 의미는 바로 비참했던 한국전쟁 직후인 1960년대, 식구를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노력했던 한국의 어머니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자들도 성모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많은 은덕을 입고 있습니다.”
대흥동본당 역사는 1915년 대전 ‘생곡’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작은 공소가 생기면서 시작됐다. 이후 1919년 대전 첫 성당인 대전본당이 대전시 목동에 설립됐다. 당시 성당 주변에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신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교와 교세확장을 위해 지금의 대전역 부근 시가지로 성당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대전본당은 지금의 대흥동본당 자리로 옮겨져 ‘대흥동 시대’를 열었다. 한국전쟁은 대흥동본당 역사에 있어 아픔이자 큰 전환점이 됐다. 1950년 7월 전쟁 포화 속에 대흥동성당 건물이 파괴됐다. 그해 9월에는 대전 지역 성직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립포교지였던 충남지역은 1958년 대전대목구로 정식 승격됐고, 1962년 교계제도 설정과 함께 대전대목구가 대전교구로 바뀌었다. 대흥동성당도 1962년 12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대흥동성당은 2014년 등록문화재 제643호로 지정됐다.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대흥동본당 설립 100주년을 앞두는 의미로 지난 7월 1일 포럼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이상희 목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는 “대흥동성당은 종교적 소명뿐만 아니라 대전 원도심이라는 장소에 대한 기억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또 “근현대 건축 스타일을 반영하고 대전이라는 도시 특징을 가장 이상적으로 형상화해 표현해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대흥동본당은 이제 지역과 함께 하는 ‘젊은 성당’으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교좌성당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지역과의 소통을 중시하겠다는 것이 박진홍 주임신부의 포부다. 교구 청소년국장을 오랜 기간 역임했던 박 신부는 “우리 본당을 청년들이 넘치는 본당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새로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될 청년들에게 이제 교회가 먼저 나서 끌어들이고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문화가 부족하고 원도심이 정체돼 있는 현실에서 성당조차 고립되고 단절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박 신부는 물론 본당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박 신부는 성당 주변에 가칭 ‘신앙 정원’을 만들어 신자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이 편안하게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담벼락’이 없는 성당을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흥동본당은 성당 옆 대전가톨릭문화회관 1층에 ‘공간 1919’라는 휴식 공간을 만들어 공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또 지역을 대표하는 대흥동본당이 100주년을 앞두고 좀 더 그 독특함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박 신부의 생각이다. 성전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앙드레 부통 신부 작품을 복원하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박 신부는 “인도네시아 지역 성당을 가봤더니 성화가 모두 현지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등 개성을 띠고 있었다”며 “우리 성당도 한국적인, 또는 대전이라는 지역 특성을 최대한 살린 모습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