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민들레는 피는데 그대는 떠나고

한명수(미카엘·대구대교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기획위원·시인·문학평론가)
입력일 2017-07-04 수정일 2017-07-04 발행일 2017-07-09 제 305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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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최호철 안토니오 신부님을 기리며

그날, 둘레둘레 민들레는 피는데 그대는 떠나고

봄바람 걸어오는 남산언덕 관덕정

누각의 처마들 대문의 문고리도 침묵했다.

열두 계단 올라 십자성호 긋고 나면

넉넉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기던 그대

심어놓은 작은 나무들 꽃잎들 사이로

햇살과 빗살이 그리움처럼 나리 우고

그대 숨결 어린 꽃은 저리도 싱싱하게 피어오르는데

관덕정 검은 지붕에도 노랑나비는 날으는데

먹먹한 우리 가슴속 그대 얼굴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대는 가고 민들레 씨앗들은

우리 귓전의 그대 말씀처럼 번져 가는데

꽃송이 하나에 가슴 저려 고개 숙이기도 하고

꽃송이 하나에 하늘만 쳐다보고 눈감기도 하고…

아, 그대, 이 침묵 속을 흐르는

관덕정 사람들의 방언들이 그대에게 전해지는가.

함께 길을 가면 언제나 뒤돌아보고

처진 이가 없는지 살피던 그 눈길 그 손길

관덕정 앞 보도블록 곳곳에

성지순례의 길 곳곳에 당신의 숨길처럼 스미었는데,

어둔 밤, 달빛 고고한 시간 홀로

불 켜진 관덕정 한 켠 기도의 방에선

순교자의 향이 그대 손끝에서 피어났는데,

현란한 말보다 깊은 걸음 한 걸음으로

더 위안을 주던 그대 묵직한 신뢰,

시간은 계절을 타고 이곳으로 오는데,

언질이라도 주지, 어찌, 가노라는 말도 없이 갔는가.

저 꽃잎이 그대 얼굴인가

저 바람이 그대 걸음인가,

흐르는 눈물을 이기려 고개 들면

먼 데서부터 다가오는 꽃잎 바람 한 줄기

스치우는 향기가 무척도 낯익다.

꽃잎 이슬 같은 관덕정 사람들 가슴속으로 떠난

그대 빛나는 열정 아름다운 고통

다시 부활의 그날, 남산동 언덕배기 꽃바람이 불고

민들레 노란 꽃잎 안에 당신이 피어나면

그대, 부활의 꽃으로 만나리라.

민들레는 피는데 당신은 떠나고

우리는 여기서 그날을 기다린다.

한명수(미카엘·대구대교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기획위원·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