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이해하듯, 군대도 새롭게 바라보는 지혜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은 싸움 잘하는 전투 신인 하느님을 섬겼는데,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게 되니 농사 신인 ‘바알’을 숭배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의아한 듯 묻는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전투의 신’이셨다고요? 참 놀랍네요.”
“예, 유목민이었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하느님을 싸움 잘하는 신으로 여겼던 것이죠. ‘만군의 주님’이라는 표현이나 ‘주님께서는 나의 방패’라는 표현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모습 중 한 가지에 불과한 싸움 잘하는 신에 대한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착하면서 농사 잘 짓는 신인 가나안 지역의 토착 신 바알을 숭배하게 됩니다. 급기야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대결을 벌입니다(열왕기 상권). 엘리야가 승리하고 하느님께서도 농사를 잘 지으시는 신으로 인식이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서서히 넓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순리대로, 인간들의 실수마저도 참아내시며 인간이 지혜로워지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좁은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씨는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백 신부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한 베드로가 말을 더듬으며.
“어… 신부님, 그런… 어, 어려운 질문을 갑자기 하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어느 영화 대사인데요. ‘하느님은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인간이 만든 하느님이고, 한 분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하느님의 이미지를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이라고 착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신부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도 제 뜻대로 안되면 제 기도가 부족함을 깨닫거나, 하느님 뜻을 찾으려 하기 보다 제 욕심을 채우려 한 때가 많았습니다.”
갑작스럽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백 신부는 머쓱해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그래서 지금 우리 현실이 군대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의 슬기가 깊어지고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신앙이 더 깊어진다면 군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미래지향적인 군대에 대한 생각을 함께 해보자는 의미입니다.”
언제 왔는지 스텔라가 백 신부와 베드로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끼어든다.
“남자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군대 이야기하면 지루하지 않은가 봐요. 특히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요.”
스텔라의 이야기에 백 신부와 베드로가 마주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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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해 신부(요한 보스코·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rn마산교구 소속으로 1992년 사제품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