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세상

오민환(바오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
입력일 2017-06-05 수정일 2017-06-05 발행일 2017-06-11 제 304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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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선거든 언제나 새벽미사를 다녀오시는 길에 일찌감치 투표를 하시던 노모께서 이번 대통령 선거일엔 해 질 녘까지 머뭇거리시고 계셨다. 대선 결과가 나오자 당신이 표를 던진 후보가 당선됐다고 좋아하셨다. 취임 며칠 후엔 어딘가에서 들으신 대통령에 관한 미담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아들에게 전해주신다. 이제는 뭔가 틀이 잡혀가고 새로운 세상이 온 듯한 느낌이라면서, 교황을 위한 기도에 대통령을 위한 기도를 더하신다고 했다. 놀라운 변화다.

시민들은 최근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서 10년 가까운 불통의 시간이 뚫렸다고 느끼고 있다. 뉴스를 보면 열 받는다며 외면하던 사람들이, 뉴스도 힐링이 된다며 대통령의 하루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 ‘이게 나라냐’라며 광장에 나섰던 시민들이 ‘이게 나라구나’ 하며 새로운, 아니 이게 정상인 정치를 바라보고 있다. 이 와중에 고위직 공무원 임명에 관한 청문회가 눈길을 끈다. 한 달 사이에 여야가 뒤바뀐 국회의원들은 후보자 한 명을 놓고 쥐 잡듯 몰아붙인다. 마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언성을 높이는 그들의 모습은 볼썽사납다.

망월동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른다고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은 아니었다. 새 대통령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던 5월 중순 통계청의 1분기 ‘경제고통지수’ 발표가 눈에 들어왔다. 경제고통지수는 서민가계가 겪는 경제적 고통을 수치화한 지표다. 다시 말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지표로,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적 삶의 어려움을 계랑화한 것이다. 소비자 물가상승률 2.5%, 실업률 4.3%, 이 둘을 더해 경제고통지수가 6.4%라고 통계청은 발표했다. 2012년 1분기 6.8%를 기록한 이후 5년 만에 최고치라고 한다. 문제는 앞으로도 서민들 삶의 질이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적폐가 쌓일수록 서민들의 지갑은 더 얇아지고 재벌의 주머니는 더 두둑해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낙수효과는 없었고, 아랫목에 군불을 땐다고 윗목이 따뜻해지진 않았다.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은 애초부터 돈을 풀 생각이 없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미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자본주의 아래에선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해서 버는 속도를 늘 앞지른다며 소득불평등을 언급한다. 결국 일해서 버는 돈보다 물려받은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금수저의 ‘세습 자본주의’라는 슬프고도 절망적인 현실을 지적한다. 굳이 재벌들까지 갈 필요 없이 고위 공직자의 청문회를 보면서 피케티의 말에 수긍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1884년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책을 쓰면서 ‘그리스도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권력과 부를 찬양하고 그 악행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백히 왜곡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톨스토이의 말에 굳이 러시아 정교회만 언급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책 제목처럼,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고 하셨다. 예수의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나라를 만들어갈 책임과 의무를 느껴야 한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믿는 그리스도인마저 부패하면 안 된다. 최선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이 되기 때문이다(corruptio optima pessima).

한 옛 스승은 밤과 낮은 구분하는 방법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멀리서 오는 형제를 볼 수 있을 때 어둠은 물러가고 새날이 시작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빛이 어둠을 이기고 새날이 시작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주변부에 서성이는 형제가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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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환(바오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