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한덕운 토마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5-30 수정일 2017-05-30 발행일 2017-06-04 제 304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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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해 전국 다니며 순교자 시신 거둬
복자 윤지충에게 교리 배워 입교
박해에도 굳건히 신앙 지키다 치명

복자 한덕운 토마스 초상화.

복자 한덕운(토마스)은 박해 속에서도 올곧은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며 신자들의 신앙을 바로잡아 주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했던 순교자다.

복자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790년 10월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듬해 닥쳐온 신유박해로 윤지충이 순교했지만, 복자는 흔들리지 않고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1800년 10월 복자는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했다. 그는 기도와 독서를 성실히 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론 신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권면하는 활동을 열심히 펼쳤다.

복자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좇는데 열중했고, 덕분에 그의 마음과 말은 늘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블뤼 주교는 훗날 “강직하면서도 내성적이었으며 가해지는 폭력 앞에서조차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복자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복자는 자신의 목숨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염하는 활동 또한 이어나갔다.

신유박해가 거세지자 복자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해 교회와 신자들의 소식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서울 청파동 인근에서 신유박해로 순교한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보게 됐다. 복자는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찾았다. 복자는 홍재영에게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함을 엄하게 질책했다. 홍재영은 복자의 꾸지람에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다 1839년 순교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박해 중에도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행동한 복자는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돼 포도청에 끌려갔다. 하지만 복자는 어떤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평소의 굳은 신앙만을 증언할 뿐이었다. 복자는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 진술을 하면서도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다”고 했다. 이어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됐지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면서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복자는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두려움 없이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한 자세로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달라”고 말하는 복자의 모습에, 오히려 망나니가 두려워 벌벌 떨었다고 전해진다. 때는 1802년 1월 30일,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남한산성성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남한산성성지

남한산성성지(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는 복자가 순교한 곳이다. 복자를 비롯해 신유·기해·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성지기도 하다.

※문의 031-749-8522 남한산성성지, www.남한산성순교성지.org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