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녀 정순매 바르바라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5-23 수정일 2017-05-23 발행일 2017-05-28 제 3046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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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로 하느님 섬기며 주변 의식해 과부 행세
오빠인 복자 정광수 통해 교리 습득
주문모 신부 돕고 서적·성물 보급 맡아

복녀 정순매 바르바라.

정순매(바르바라) 복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자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한 순교자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복녀는 18살이 되던 1795년에 오빠 정광수(바르나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정광수 역시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의 일을 돕다 순교한 복자다.

1800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복녀는 하느님만을 온전히 사랑할 것을 다짐하면서 동정을 결심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가와 혼인했다가 과부가 됐다’고 말하며 과부행세를 하기도 했다. 윤점혜(아가타)가 회장을 맡고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복녀는 오빠 부부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또 주문모 신부의 미사 준비를 돕고, 각종 신자들의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복녀가 신앙을 받아들인 초기 교회에도 박해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지만,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헌신하면서 삶을 통해 신앙을 증거해갔다.

매사에 착한 모습을 보인 복녀였지만, 박해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굳고 의연한 자세로 일관했다.

복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박해자들은 복녀가 거짓으로 과부행세를 해왔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더욱 강한 문초와 형벌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과부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복녀를 요녀(妖女)라 칭하면서 배교하도록 정신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녀는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증언하면서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켰다. 관장은 복녀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자들의 정황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복녀에게서 교회에 관한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복녀는 마지막까지 “포도청에서 모진 형벌을 받고 형조에서 엄한 문초를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천주교 신앙을 너무나 좋아하여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진술했다. 결국 더 이상 문초를 진행해도 진전이 없다는 것을 안 관장은 복녀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고향에서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명령에 따라 복녀는 한양 포도청에서 여주로 이송됐다. 복녀는 1801년 7월 4일 여주에서 참수됐다. 당시 복녀의 나이는 24세였다.

여주지역의 순교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서 있는 순교 치명 기념비.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여주성당·어농성지

여주 지역은 복녀가 태어난 고향이자, 순교한 자리다.

용인대리구 여주본당(경기도 여주시 우암로 5)은 복녀의 순교터로 추정되는 비각거리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복녀를 기리고 있다.

을묘·신유박해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는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도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복녀의 묘비를 만들어 복녀를 현양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