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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존재의 이유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입력일 2017-02-14 수정일 2017-02-14 발행일 2017-02-19 제 303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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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들으니, 집에서 키우는 반려 고양이 ‘레옹’이가 떠올라 빙그레 웃었습니다. 레옹이가 우리 집에 온 지도 만 10년이 돼갑니다. 귀여운 레옹이를 키우게 된 것은 아들딸들에게 반려동물이 좋은 역할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레옹이는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아들딸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었고, 귀엽고 앙증맞은 행동으로 가족에게 늘 웃음을 선사했으며 아내와 딸 간에 심한 의견 충돌이 있을 때에도 대화의 끈을 이어주었습니다. 레옹이는 우리 가족이 사랑하고 화목하게 지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에게 존재의 이유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교수 출신 농부인 윤구병은 “잡초로 알고 마구 뽑은 무명초들이 알고 보니 제 이름을 가진 약초이고 반찬거리였다.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잡초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건만 현실은 안타까운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입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의 아들이 군에 입대했습니다. 신병교육을 잘 마치고 소총수로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한 달여가 지났을까, 지인은 “아들이 자살을 시도했다”면서 울먹이며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사연을 확인을 해보니 내성적인 성격에 어릴 적 받은 정신적 상처가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음과 부부싸움, 폭언, 폭행 등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성격도 소심하고 내향적으로 변했으며 교우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정신적 충격이 군이라는 경직된 분위기가 기폭제가 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지인의 아들은 조기에 발견돼 자살은 면했지만 현역 복무부적합 판정을 받고 군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무리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이유가 있다면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을 만나야 하고, 연구한 것을 책으로 내야만 한다’는 명확한 삶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이 있습니다. 석가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외쳤다는 탄생게(誕生偈)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십계명 중 다섯 번째가 ‘사람을 죽이지 마라’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남을 죽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나를 스스로 해(害)하지 말라는 의미도 분명 내포돼 있습니다.

현역 복무부적합 판정을 받고 군을 떠나야만 했던 그 병사가 사회에서는 부디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해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봅니다.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