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76) 형성적 기투에 대하여 ②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입력일 2009-09-02 수정일 2009-09-02 발행일 2009-09-06 제 266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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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부터 하느님과 합치해야
융화·연민이 있어야 참된 인간 역량 발휘
하느님의 뜻을 ‘인정하는 기투’(Appreciative Abandonment)의 삶은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공명, Consonance) 삶이다.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삶의 주요 요소에는 4가지가 있다.

우선 내 안에 있는 하느님 존재를 찾아서 그 안에서 일치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합치(congeniality)다. 우리는 하느님과 닮은꼴로 지어졌다(창세 1,27 참조). 그래서 합치란 하느님 안에 있는 원천, 기원(genesis)에 대해서 신실하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합치란 ‘계속해서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과 계속해서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소명이 무엇인지, 나의 삶의 궁극적 소임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묻지 않고, 추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 행동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지닌 목적과 소임을 알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아무렇게나 살게 된다. 행동하지 않으면 일치할 수 없다.

하느님과의 합치를 위해선 먼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비로소 ▲융화(compatibility)가 일어난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합치의 성향이 없으면 인간은 금방 욕심 부리게 되어 있다. 소유하고 싶고, 내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융화가 이뤄질 수 없다. 융화란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도 이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맘대로 하면 부조화와 불공명, 모든 것이 불편한 상황만 전개될 뿐이다.

하느님 중심의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하다 보니, 자꾸만 나 자신의 것만 강화된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편안할리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권력이 높다고 해도 편안하지 않다.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하나같이 흠 들과 연약함들을 가지고 있다는 철저한 자기 인정은 ▲연민(compassion)에 가 닿는다. 우리가 합치와 융화와 연민을 통해서만 진정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다. 우리는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육신과 정신에만 갇혀 생활한다면 우리는 영적 성장에로 나아갈 수 없다.

지금까지 말한 하느님과의 합치, 융화, 연민은 모두 ▲역량(competence)으로 이어진다. 마음으로부터 합치, 융화, 연민이 있어야 세상을 향한 참된 인간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마음으로부터 하느님과 합치되지 못하고, 주변 상황과 융화되지 못하고, 이웃과 나 자신에 대한 연민도 없다면 그것은 오직 인간 중심적인 것이다. 하느님께 정향된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지닌 참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네 가지는 우리가 삶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우리의 능력을 지원해 준다. 또한 이 네 가지는 우리의 전 존재가 통합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간다.

하지만 오만한 마음이 이 네 가지의 성향들에 귀 기울이는 우리의 능력을 차단한다. 늘 오만을 경계하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합치, 융화, 연민, 역량은 영적인 것이다. 정신적인,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적 차원에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하느님께 청을 많이 드린다고 해도 그것은 하느님과 합치되는 상태가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영감도 못받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정신적인, 육신적인 차원에서 청을 많이 드리고 있다. 신앙이 기복적으로 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모색해야 한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는 진정한 갈망을 깨닫고 드릴 수 있고 그에 따른 영감도 받을 수 있다.

초월위기가 발생할 때 우리는 기로에 서게 된다. 기투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기투의 삶을 외면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삶을 살게 될 경우에는 의미가 결여된 삶을 살게 된다. 의미가 없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돈이 아무리 많고, 지위가 높아도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곳이 바로 지옥이다.

하느님의 뜻에 기투하는 삶을 살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의미 충만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