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34】Ⅲ 검색과 잠복시대 / 1. 기리시탄 검색제도 / 1) 5인조와 연좌처벌, 2) 포상제(褒賞制)

입력일 2005-09-18 수정일 2005-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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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한다는 표시로 성상을 밟게 하는 후미에(踏繪)에 사용된 청동 답회.
신고하면 포상하고 발견되면 연좌처벌

에도 막부(幕府=장군정치)는 1614년 전국에 금교령을 내리고 국외추방과 엄한 박해에도 기리시탄 신앙을 근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리시탄 말살을 위하여 쇄국정책과 여러 가지 검색방법을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5인조 제도로 이웃을 감시하게 되었고 포상제로 기리시탄 적발을 종용하였으며 강제적으로 불교 신자가 되게 하는 데라우케(寺請) 제도, 성상을 밟는 후미에(踏繪) 제도, 신앙조사 장부를 작성하여 주민의 종교, 사상, 이동사항을 감시하였고 그래도 마음 놓이지 않아 기리시탄 5대손까지의 모든 사항을 낱낱이 감시하는 루이조쿠(類族)제도까지 등장 시켰다.

1) 5인조와 연좌처벌

5인조(五人組)라는 것은 5호를 단위로 지연적으로 이웃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범죄인 적발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후에 기리시탄 적발이 주 대상이 되었다. 가장 5인을 중심으로 조직 안에 기리시탄이 있을 때 그 조직 내에서 색출하면 고발된 기리시탄과 그 가족에게만 죄를 묻지만 외부로부터 고발이 있을 때는 5인조 모두에게 그 죄를 묻는 연좌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

5인조에 의한 기리시탄 고발로 순교자가 많이 나왔고 신부를 도와주는 숙주는 특히 그 노출이 심하여 위험하였다. 그러나 모든 위험을 무릅 쓰고 신부들을 서로 맞이하였던 그 당시의 조선인과 일본인 숙주들의 신앙에 감탄하는 바이다.

2) 포상제(褒賞制)

에도 막부는 기리시탄과 그 관계자의 적발을 위하여 정보 제공자에게 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기원은 1618년에 나가사키에서 「강도, 방화범 및 선교사를 고발하는 자에게는 은 30본을 지급한다」라는 제찰(制札=금교팻말)에서부터 각 처로 번져나가 해를 거듭 할수록 상금도 증액되어 기리시탄 적발에 한 몫을 하였다.

이 제도로 상금을 노리는 외교인과 배교자, 특히 부랑 무리가 각 처를 배회하며 탐색하는 광경이 벌어져 맹위를 떨쳤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집은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며 그 집은 신부의 숙주임을 알고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인과 용모가 다른 선교사들은 무역상인처럼 변장을 하고 주로 야간에 숙주의 도움을 얻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제도로 인하여 1680년대에는 잠복 기리시탄이 거의 전멸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기리시탄이 나타난 것을 본 막부는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1714년 기리시탄 수용소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고, 그 후도 기리시탄 마을 붕괴 사건이 여러 건 일어났었다.

기리시탄 포상금 제찰은 1618년에 시작하여 1873년까지 계속된 기리시탄 금제이며 쇄국정책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