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함제도 신부(하)

박효주
입력일 2024-04-05 수정일 2024-04-11 발행일 2024-04-14 제 338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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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함께 사랑 나누는 ‘로맨스’…북한 선교는 짝사랑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함제도(Gerard E. Hammond·90) 신부는 북한에 62회 다녀오는 등 북한 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특히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열심이었다. “선교는 로맨스이지만 북한과의 선교는 짝사랑 같다”는 함 신부. 지금도 북한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함 신부의 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파디 주교와의 약속, “꼭 북한에서 봉사”

메리놀 외방 전교회는 1923년부터 북한 지역에 선교사 파견을 시작했다. 함제도 신부는 한국 부임 초기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 주교(야고보·1898~1983)의 비서를 지냈다. 파디 주교는 1932년 평양교구 비현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의주본당 주임을 지내다 일제에 추방됐다가 6·25전쟁 때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파디 주교는 함 신부에게 매일 북한 선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의 상황도 그렇고 우리는 이제 북한을 갈 수가 없어요. 나중에 꼭 북한에 가서 한민족을 위해서 봉사해 줬으면 좋겠어요.” 함 신부는 그때마다 주교님께 꼭 북한에 다시 가 선교하겠다고 답했다.

함 신부는 청주교구 시절부터 북한과 인연이 꽤 닿았다. 6·25전쟁 이후 충청북도에 성당이 감곡과 청주, 제천, 충주 교현, 옥천 등 5개가 있었는데, 5개 성당 모두에 북한에서 온 신부들이 사목하고 있었다.

“피난민 중에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피난 온 신자도 많았어요. 본당의 일을 돕는 분, 식사를 준비하거나 빨래를 도맡아 하시는 자매님들도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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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유흥식 추기경(첫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과 평양 육아원을 방문한 함제도 신부(첫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북한 선교의 시작

1989년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발령받은 함 신부는 본격적으로 북한 선교에 나섰다. 함 신부는 현재까지 북한에 총 62번 다녀왔다. 1년에 세 번꼴. 1990년대에는 북한에 가는 법이나, 가는 길을 아는 사람, 북한과 접촉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님께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추기경님이 참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하셨죠.”

첫 방문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선 미국 여권이 필요했고 중국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은 후 비행기 표를 구입하고 하룻밤 묵은 후에야 북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행여 반역자로 몰릴까 걱정도 됐다. 한국에서 사목하는, 그들이 원수라고 부르는 미국인 신부를 달갑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첫 방문 때는 무척 긴장했었죠. 하지만 그곳의 여러 사람과 만나며 이들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고 점점 더 마음이 편해졌어요.”

1996년 방북 때는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미화 5000달러가 든 봉투도 준비해 줬다. 김 추기경뿐 아니라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유흥식(라자로) 추기경과 주교들, 전국 각 교구와 카리타스, 가톨릭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도 북한 돕기에 관심이 많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방한했을 때 함 신부에게 “(북한에) 꼭 가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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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있는 유일한 성당인 평양 장충성당.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함제도 신부는 곧 북한 신자들과 대화할 수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낙하산이라도 타고…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북한에서의 가장 안타까운 기억은 회복이 어려운 환자들의 콜록거리던 기침 소리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꿈에서까지 생각났다. 콜럼버스 기사단(Knight of Columbus)에서 받은 기금으로 북한에 호스피스 건물도 지었다. 함 신부는 “환자들이 나아 퇴원할 때가 가장 기쁜 날”이라며 “환자들의 집까지 동행해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다 분단 전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녔다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내년에 평양에서 우리 같이 하자.” 함 신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바로 유다인들이 흩어져 살 때 “내년에 우리 예루살렘 간다”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앞서 “선교는 로맨스”라고 했지만 북한 선교는 짝사랑 같다고 함 신부는 말했다. 짝사랑이 해주는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는 냉면을 꼽기도 했다.

함 신부는 “지금은 북한에 못 가니까 낙하산으로라도 가면 좋겠다. 북한에도 속으로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비쳤다.

북한에서 하고 싶은 것

함 신부는 북한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메리놀회가 선교를 시작한 평양교구의 신의주부터 평양시,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 두봉 주교와 함께 북한에 갔을 때다. 다 함께 묵은 변두리 호텔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가 함께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지내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함 신부는 그 염원을 담아 그곳에 조그마한 요셉 성인상을 하나 묻었다.

또 함 신부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 체포돼 중강진에서 순교한 패트릭 번(P. J. Byrne·1888~1950) 주교의 시신을 모셔오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북한 선교를 위해 현재 준비 중인 교구 사제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도 “북한에 갈 때 나도 불러달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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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방한 때 메리놀회 한국지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맨 왼쪽)과 악수 중인 함제도 신부. 

한반도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위해… “서로 사랑하세요”

한국에 온 지 64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함 신부는 “북한은 물질적으로 어렵지만 한국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한국이 전쟁 후에는 함께 뭉쳐서 살았는데 살기 좋아지면서 서로 무관심해졌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시대의 한국은 심리적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많은 이가 불평과 원망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우려했다. 본인은 먹을 것이 없어도 손님에겐 식사를 권하던 시절의 인사나 배려가 사라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함 신부는 민족의 화해와 대화, 평화를 바라며 ‘한국’, ‘북한’보다 ‘한반도’(코리아)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함 신부는 “통일까지는 어렵더라도 전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같은 역사를 가진 같은 민족으로서 내가 한국에서 기쁘게 사는 것처럼 북한에서도 평화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한민족은 순교자의 후손”이라며 희생정신을 강조한 함 신부는 북한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대감이나 무관심을 타파하고 계속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함 신부는 한국에서의 64년 선교사 인생을 한마디로 함축하며 가톨릭신문 독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 관심을 가지세요.”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