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 섬기는 마음으로 한센인과 함께했습니다”

박주헌
입력일 2024-03-18 수정일 2024-03-19 발행일 2024-03-24 제 3385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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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중국 한센인 섬긴 신동민 신부
1월 15일부터 인천교구 대이작도공소에서 공소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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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민 신부는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중국의 한센인들을 섬기고 선교사로서의 삶의 연속인 공소사목에도 투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신동민 신부 제공

“중국 선교사제로서 한센인들과 함께했던 여정은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신동민 신부(스테파노·인천 용현동본당 대이작도공소 공소사목전담)는 한센인들 안에 계신 버림받은 예수를 섬기고자 20여 년 중국 산골에서 한센인 선교사제로 투신했다. 1997년~2007년 산시(陕西)성 상뤄(商洛)시에서, 2012년~지난해 구이저우(貴州)성 리핑(黎平)현에서 한센인 전문 요양원 인애원(仁爱院)을 세우고 사목했다.

신 신부는 당시 한센인들이 죽어서도 나올 수 없었던 수용소 같았던 곳에 인애원을 세웠다. “한센인을 한 인간으로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전했다. 대학생 시절, 국내 한센인 시설을 돌아다니며 봉사하면서 “신앙도 생명의 가치도 모르는 그들을 위한 선교를 하고 싶다”는 성소를 받았다. 1996년 작은형제회 사제로 서품 후 부산교구 구라마리아회의 연결로 중국으로 선뜻 떠난 건 ”절망 속에 부르짖는 인간 안에서 위로를 갈망하는 그리스도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 신부가 마주한 한센인들의 삶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육체에 영양을 공급하는 신호체계인 신경세포를 죽이며 말초신경계에 손상을 초래해 손발이 마비, 기형을 일으키고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나균이 몸에 침투하면 눈까지 머는 등 복합 장애가 찾아왔다. “손가락과 발목이 피부 껍질에 간신히 붙어 있는, 장애 그 이상의 아픔”이라고 신 신부는 밝혔다.

신 신부는 “병에 걸린 순간 부모, 자식,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인들이기에 심리도 철저히 망가졌다”고 회상했다. “영육 양쪽으로 사무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애가 탔지만, 감사의 눈조차 잃어버린 그들의 절망만을 번번이 마주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의 분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를 채워주면 그 기저귀를 일부러 벗어 던지거나 이불에 문질러 버리고, 그를 반복하는 일도 있었다.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반항이었어요.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건 신앙뿐이었기에 한결같이 그들을 신앙으로 회심시키는 수밖에 없었어요.”

수도회 총원에서 “헌신해봤자 공산당에게 빼앗긴다”는 반대로 상뤄시 인애원에서 철수해야 했던 건 신 신부의 가장 큰 아픔이다. 결국 인천교구로 이적해 교구 병원 대외협력부장 직함으로 리핑현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신 신부를 유일한 가족으로 의지하던 한센인들을 버리고 왔다는 책임감에 지금도 신 신부는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로 리핑현 인애원은 중국나사협회로 이관됐고 신 신부도 중국에서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협회 봉사자 자격으로 중국을 드나들며 시설을 관리한다. 1~3개월 방문해 농사를 돕거나 전기·수도 시설을 고쳐주고 필요한 물품을 채워주고 있다. 신앙이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기쁨 때문이다.

1월 15일부터 인천교구 대이작도공소에서 공소사목을 펼치는 신 신부. 그는 “공소사목도 선교사로서의 삶의 연속”이라며 인천 본토에서 44km 떨어지고 상주 사제가 없는 섬 주민들을 위해 사목에 자원했다. 끝으로 신 신부는 "이렇듯 국내에서도 선교사제로서 사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전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