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승훈
입력일 2024-03-15 수정일 2024-03-21 발행일 2024-03-24 제 338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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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사 50,4-7 / 제2독서 필리 2,6-11 / 복음 마르 14,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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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반 다이크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캔버스에 유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유학 시절,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근처 조그만 마을 성당에서 성주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특별히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행렬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행렬은 성당 마당이 아닌, 마을 광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성지 주일 아침, 사람들은 전통 복장을 입고 손에 성지가지를 들고서 마을 광장에 모였습니다.

곧이어 주례 사제의 인도로 행렬 예식은 시작됐고, 부제의 행렬 권고에 따라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은 시작됐습니다. 성지가지로 장식된 십자가를 앞세우고, 그 뒤를 이어 사제와 부제, 복사들, 관악기 밴드와 기수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성대한 행렬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다소 낯선 이국적 풍경이었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했듯이, 20여 년 전 오스트리아 마을 주민들도 환호했고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맞이하며 환호합니다.

오늘 축복하는 성지가지는 2000여 년 전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며 흔들었던 그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며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섭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의 행렬은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 예루살렘을 향해 전진하는 하느님 백성의 행렬이자, 순례자의 발걸음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을 마치면, 이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중 하나(제1독서: 이사 50,4-7)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마르 14,1-15,47)가 선포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위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습니다.(요한 19,19-20과 비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히브리말, 라틴말, 그리스말로 기록) 예수님께서 사셨던 시절,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은 죄명이 적힌 나무패를 들고 사형장으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죄 명패를 죄인의 십자가 위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이것을 본 주민들이 죄인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는 통치자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맨 위에 붙어 있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나무패는 로마 제국에 맞서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국사범의 죄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고 있으며, 동시에 로마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갈망하는 유다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오시기 전,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마르 15,2.9.12) 이 칭호로 빌라도는 예수님과 유다인을 조롱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자기 앞에 무력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님을 향해 ‘유다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유다인들이 로마 제국을 대항하여 품은 자유의 소망이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오늘 거룩하고 장엄하게 거행된 예루살렘 입성 기념 행렬에서 만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임금’이셨습니다. 군중들은 손에 가지를 들고 흔들며 암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이시다.”(따름 노래 1)

그러나 주님의 수난기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했던 임금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분의 왕좌는 십자가 나무였고, 그분의 왕관은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분의 통치 방식은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일치와 평화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종’이었습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빰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제1독서: 이사 50,5-6) ‘고난 받는 종’을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성됐습니다.

전례시기에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도록 초대받는 거룩한 주간에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강론지침」은 성주간을 위한 길잡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주간에 교회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주간의 전례 거행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바로 그 파스카 신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77항)

‘파스카 신비’는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실체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더욱더 요원한 목적지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곳으로 뛰어보라는 요구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수영장 다이빙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영장 물속은 깊고 그곳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물속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공포는 우리의 발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기에,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사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을 맡긴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희생과 고통이 없다면, 영광 또한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이 드러나는 ‘파스카 신비’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거룩한 주간, 성주간을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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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