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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종 수원 보좌주교 탄생] 문희종 주교 삶과 신앙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사진 문희종 주교
입력일 2015-07-28 수정일 2015-07-28 발행일 2015-08-02 제 2955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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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주위 사람들 챙겨 ‘성모회장’ 애칭도
신학교 동기들 사이에서 ‘성모회장’으로 통했다. 꼼꼼하게 모든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섬기듯 챙기는 성품 때문이었다. 만나는 이를 따뜻하게 만드는 문희종 주교의 모습은 그의 삶 전체에 걸쳐 늘 한결같았다.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던 가정

경기도 평택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문 주교는 중학생이 되던 1978년에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큰할아버지 댁이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문 주교의 가족도 함께 입교하게 된 것이다. 마을에서 성당을 다니는 사람들은 문 주교의 가족들뿐이었지만, 이 분들의 신앙은 돈독했다.

매일 문 주교 가정의 저녁기도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중학생인 문 주교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앙에 엄격했던 할머니 고 정언년(로사)씨는 문 주교가 가족과 함께 기도하도록 당근과 채찍을 함께 주었다. 문 주교는 매일 기도를 한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용돈 1000원을 받았고, 혹시라도 저녁기도를 빼먹은 날에는 다음날 저녁기도를 마치는 순간까지 “저녁기도도 안 하는 녀석”이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문 주교는 매 주일 오전이면 동생 문희승(시몬)씨의 손을 잡고 서정리성당(현 서정동본당)까지 1시간 길을 걸어갔다. 문 주교는 매주 토요일 방과 후 가톨릭학생회 활동 중 특전미사를 드렸지만, 어린 동생이 어린이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돌본 것이다.

가정의 기도소리는 문 주교가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끊이지 않았다. 문 주교의 부모는 매일 새벽 5시경마다 문 주교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다. 문 주교의 동생 문희승(시몬·48)씨는 “어릴 때 한 시간이 넘는 기도에 저는 정말 힘들었는데 주교님은 그런 내색 한 번 안했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78년 5월 13일, 서정리성당 세례식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문희종 주교(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

전례를 사랑한 ‘문 신부’

수원교구가 운영하는 효명중·고등학교에 다닌 문 주교는 자연스럽게 가톨릭적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문 주교가 맡은 역할은 전례부장이었다. 문 주교가 미사 해설을 맡으면 왁자지껄한 중·고등학생 2000여 명이 모여 미사를 해도 매끄럽게 진행됐다. 해마다 열리는 성모의 밤 행사도 전교생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지만, 여느 본당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훌륭하게 치렀다.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을 맡아 열린 김대건 신부 유해 전국순회 철야기도가 효명중·고등학교에서 열릴 때도 문 주교가 전례부장으로서 활약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학창시절부터 전례를 능숙하게 이끌었던 문 주교를 보고 친구들은 익살을 섞어 ‘문 신부’라고 부르곤 했다. 당시 함께 성소를 꿈꿔 사제가 된 신동호 신부(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는 “조용하고 착하고 성실한 모습은 누가 봐도 ‘문 신부’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모범생이었다”면서 “자상하고 섬세하게 돌보는 성품으로 어버이 같은 주교가 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소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가톨릭학생회를 지도했던 장명희 수녀(영원한 도움의 수도회)는 사제성소 권유에 두말없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문 주교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장 수녀는 “문 주교님은 전례에 관해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꽉 잡고’ 있었다”면서 “목소리가 안 나와 힘들어하는 신부님의 어려운 부분도 해설로 잘 이끌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사제가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학창시절의 경험은 서품 후에도 바로 전례 실무를 담당하고,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석사를 취득하는 밑거름이 됐다.

1983년 효명고등학교 성모동산에서 성모의 밤 행사 전례를 진행하고 있는 문 주교(맨 오른쪽).

늘 섬기는 마음으로

문 주교는 학창시절부터 타고난 리더였다. 문 주교의 카리스마는 다름 아닌 ‘겸손’이었다. 중·고등학교에 걸쳐 반장과 부반장을 맡아온 문 주교는 예의 바른 태도로 친구들을 통솔했고, 친구들도 그런 그를 잘 따랐다.

문 주교는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지만, 늘 조용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문 주교의 성격은 어머니 고 김유식(헬레나)씨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그의 모친은 어릴 적부터 문 주교가 외출할 때마다 누구를 만났는지, 인사는 했는지를 물으며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문 주교의 중3·고1 반 담임을 맡았던 이향환(율리안나)씨는 “문 주교님은 반장으로서 항상 든든했고 의지가 됐다”면서 “남을 위해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 첫 입학생인 문 주교는 묵묵히 주위 사람들을 챙겨주는 모습에서 ‘성모회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섬기는 삶은 문 주교의 사제 생활의 신조이기도 했다. 8년에 걸친 복음화국 국장 시절에도 섬기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수많은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던 중에는 직원들이 업무 중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밤을 새워가며 기획안을 짜고 업무를 세분화해 각 직원이 해야 할 역할을 분배하곤 했다. 피로에 찌든 순간에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려 애썼다.

문 주교의 동기로 문 주교의 뒤를 이어 복음화국장을 맡고 있는 이근덕 신부는 “신학생 때도, 사제가 돼서도 천성이 섬기는 사람”이라면서 “정말 꼼꼼하게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시는 분이기에 교구장님을 도와 좋은 몫을 하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1991년 수원가톨릭대에서 시종직을 받은 후.
1994년 사제서품식 때 입장하고 있다.

엄마 같은 신부님

문 주교는 신자들을 ‘가족’처럼 섬겼다. 특히 아이들과 어르신을 유별나게 챙겼다.

신부로서 마지막으로 사목한 본오동성요한세례자본당에서도 사목기간은 불과 1년 남짓이지만 초등부, 중고등부 아이들 대부분의 이름을 외웠다. 어린이들을 위해 강론을 구연동화처럼 했고, 자모회가 준비하는 간식 외에도 문 주교가 직접 장을 봐온 간식을 나눠주곤 했다.

1997년부터 3년간 사목한 팽성본당에서는 문 주교가 사제성소의 꿈을 심어준 청소년들이 성장해 2013년 3명이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기도 했다.

어르신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선종하신 부모님을 기억하며 친부모처럼 모셨다. 어르신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어르신을 만나면 달라진 점 등을 발견해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병,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는 어르신을 모두 외우고 본당에서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목록을 만들기도 했다.

본오동성요한세례자본당 유희남(마리아·55)씨는 “주교님은 마치 엄마처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봐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7월 26일 11시 미사 후 어린이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사진 문희종 주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