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가톨릭문우회(이하 문우회)가 문집 제19집 「희망의 순례자들」을 발간했다. 문우회는 매년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꾸준히 문집을 발간하고 있으며 제19집은 2025년 희년 주제인 ‘희망의 순례자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문우회 문집 제19집에는 회원 28명이 참여해 시 58편, 수필 15편, 엽편소설(葉篇小說) 2편, 그리고 춘천교구 가정생명환경부장 김선류(타대오) 신부 등이 출품한 촉탁 수필 4편도 게재했다. 특히 2025년 희년의 전교적 역할에 동참했던 회원들이 개인의 순례 여정을 글로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더했다. 문우회 김승배(미카엘) 회장은 “문집 제19집이 출판되기까지 함께해 준 회원들에게 감사하다”며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나눔의 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걸어가자”고 말했다. 문우회는 1월 15일에는 영동가톨릭사목센터에서 지도사제 조철희(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주례로 문집 제19집 출판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조철희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세상 속에서, 가정 안에서, 믿음 안에서 주님의 길을 함께 걸으며 열심히 살아온 길이 곧 순례자의 길”이라면서 “2026년 새해에도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순례자들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로마 OSV] 교황청 외교 수장인 국무원 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전 세계가 ‘가치의 위기’에 빠져 더 큰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며, 베네수엘라부터 이란에 이르는 여러 지역의 혼란을 언급했다. 파롤린 추기경은 1월 17일 로마에서 기자들과 만나 “각국이 다자 협력에서 등을 돌리고 강경 조치로 기울면서 외교적 노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와 관련해 “교황청이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베네수엘라에서 평화적 해결을 중재하려 했고, 정권 인사들을 포함해 접촉을 시도했다”면서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실패를 끝났고, 미국의 군사 행동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체포됐다”고 인정했다. 또한 파롤린 추기경은 이란 사태를 ‘끝없는 비극’이라 표현하고 큰 우려를 표명한 뒤 “이란 정부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이 안타깝다”고 말하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아울러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그린란드를 둘러싼 긴장과 그 밖의 여러 지정학적 분쟁 지점을 거론하면서 “대화가 아니라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는 것은 국제 공동체를 공개적인 충돌에 더 가까이 끌어당길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파롤린 추기경은 기자회견에서, 여러 국가들이 세력 구도를 형성하는 다극 체제의 위기에 대해 “국가 공동체가 점진적으로 세워 온 가치들이 무시되고 있다”며 “양심과 이성은 더 이상 주권 침해를 그 어떠한 형태로도 용납할 수 없고, 민족의 강제 이주와 영토 구성의 변경, 경제 활동에 필요한 수단의 박탈, 자유의 제한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의 전례 안에서 전 세계 젊은이들과 하나 되는 장을 연출할 서울 WYD 합창·합주단(2027 Seoul WYD Choir & Orchestra)이 공식 출범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1월 1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파밀리아 채플에서 서울 WYD 합창·합주단 창단미사를 주례하고, 공식 창단을 선언했다. 서울 WYD 합창·합주단은 서울 WYD 행사의 주요 전례를 위해 음악으로 봉사하는 합창단과 서양악·국악 관현악단이다. 전 세계에서 모이는 순례자들이 음악을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며 전례에 참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서울 WYD 조직위원회는 2025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전국 공모와 오디션을 통해 4부 혼성 합창단 126명과 합주단 78명(서양악기 68명, 국악기 10명)을 선발했다. 단원들은 서울·수도권뿐 아니라 경상남도, 전라남도,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이들로 구성됐다. 창단미사에는 합창·합주단원들과 미성년자 단원의 보호자 등 250여 명이 참례했다. 미사 중 진행된 창단식에서 단원들은 “음악을 통해 세계의 청년들과 하나 되며, 세상에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자, 인류의 연대와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서했다. 미성년 단원들의 보호자들도 단원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정 대주교는 강론에서 “우리 모두가 국적이나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고 체험하는 중요한 과정이 바로 전례 음악일 것”이라며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나임을 드러내고, 체험하게 하고, 전달하는 소임을 맡은 여러분은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들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합주단 국악 파트에서 태평소 연주를 맡은 김태형(대건 안드레아·서울대교구 양재2동본당) 씨는 “(창단미사에서) 청년들이 다 같이 오늘 함께 노래 부르고 음악을 만드는 것에서 큰 에너지를 얻었다”며 “세계 젊은이들이 한자리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주님께 바치는 노래와 음악을 만들어갈 순간이 기대된다”고 전했다. 서울 WYD 합창·합주단은 총감독 겸 지휘자인 최호영(요한 사도) 신부와 8명의 파트 지도자와 함께 전례 음악과 그레고리오 성가 등을 배우고 연습하며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특히 오는 4월 11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서울대교구 종로성당에서 봉헌되는 라틴어 미사 전례에 동반하면서 라틴어로 봉헌되는 미사와 노래를 익혀 나갈 계획이다. 아울러 추가 오디션을 통해 최종적으로 합창단 200명, 합주단 100명으로 단원을 구성할 예정이다.
의정부교구 노인사목부가 교구 어르신들의 삶과 신앙 여정을 기록한 특별한 자서전 「나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제작했다. 이번 자서전 제작은 노년에 접어들며 교회 내에서도 점점 소외돼 가는 어르신들에게 활기를 줌과 동시에 그들의 신앙과 지혜를 전수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노인사목부는 2025년 7월부터 8월까지 교구 각 본당 65세 이상 어르신과 노인대학 학생 등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자서전의 주인공이 될 11명을 선정하고 심층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는 어르신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특별한 신앙 체험,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들, 가장 행복했던 순간 등을 주제로 진행했고, 필요한 경우 영상 촬영도 함께했다. 어르신들의 가족 혹은 노인대학 교사들은 봉사자로 나서 인터뷰를 녹취하고 내용을 정리했다. 가족들의 피드백을 받아 내용을 보충한 자서전은 편집과 디자인 작업을 거쳐 6개월 만에 완성됐다. 자서전은 1월 5일부터 대상 어르신들에게 순차적으로 전달됐다. 노인사목부 담당 박규식(암브로시오) 신부는 “자서전에 담긴 어르신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은 듣는 이들에게 삶 속 신앙 체험과 지혜를 전달해줄 수 있다”며 “또 자녀들이 봉사자로 참여해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만남 안에서 새로운 관계의 회복도 이뤄졌다는 데에 자서전 제작의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교구장 손희송(베네딕토) 주교도 자서전에 수록된 추천사를 통해 “자서전에 담긴 각자의 삶과 신앙 이야기는 교회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줌과 동시에 앞으로 긴 여정을 걸어갈 젊은 세대에게 귀한 나침반이자 등대가 돼줄 것”이라며 “어르신들이 앞으로 맞이할 날들 안에서도 성령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노인사목부는 올해는 교구 각 본당의 모든 어르신으로 대상을 확대해 신청을 받아 자서전을 제작할 예정이다.
수원교구 제2대리구는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의왕성당에서 제2대리구장 문희종(요한 세례자) 주교가 주례하는 유아세례식을 열었다. 이날 유아세례식 에서는 총 11가정 유아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문 주교는 강론에서 “세례는 교회 공동체의 축제인 동시에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책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한다”면서 “유아세례를 청하는 가정들이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신앙생활로 요셉, 마리아, 예수를 닮은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교회공동체에서 함께 보살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아세례식을 주관한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허규진(메르쿠리오) 신부는 “매년 주님 세례 축일에 교황님께서 유아세례를 베푸실 만큼, 유아세례는 우리 신앙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며 “대리구 차원에서도 상징적으로 대리구장 주교님이 직접 유아세례를 주시며 그 의미와 기쁨을 드러내고, 아이와 부모, 그리고 공동체에 기쁨이 되도록 이 예식을 매년 거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제2대리구 복음화3국은 2025년 주님 세례 축일에도 성남 위례성데레사성당에서 유아세례식을 마련했다.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지식은 특정 대상의 진리 추구하지만…지혜는 모든 인류의 원리 통찰하는 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 받으려면…파편화된 지식 넘어서는 지혜 필수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 통찰하고…마음 속 지혜로 하느님과 친교 이뤄야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신자로 살아오며,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자녀를 위한 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도, 조금 자랐을 때도, 제 마음이 불안할 때도 이 기도를 바쳤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길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어느 순간부터 이 기도문의 전반부에 있는 이 문장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녀를 길러’라는 구절에서, ‘과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느님께 맡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나서 제가 ‘아이를 기른다’고 말해 왔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아이를 낳았지만 아버지인 제가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동참했으니까요. 두 딸의 아버지로서 꽤 오랫동안 아주 자연스럽게 ‘제가 기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정말로 내가 이 아이들을 키운 것일까, 아이들과 함께 그 시간을 지나온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제가 분명히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일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였던 순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 힘든 일을 겪을 때, 불안해하며 잠들지 못하던 밤들 앞에서 저는 준비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럴듯한 조언을 건네지도 못했고, 상황을 단번에 해결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저 아이들 곁에서 함께 머무르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자라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가고 있는 이 길은, 애초에 내가 대신 걸어줄 순 없는 길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아내는 어릴 적 자주 넘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대신 걸어 주지 않았고, 넘어지지 않게 미리 막아 주지도 않았답니다. 다만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고요. 그 짧은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아이가 가야 할 길을 앞장서서 열어준다거나 대신 그 길을 걸어 준다기보다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길이 드러나도록 아이 곁에 머무는 일일 것입니다. 기도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이 문장은 자칫 아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기를 바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학자였던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특별한 성취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가족이란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구성원 각자가 자기답게 살아도 괜찮다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조용히 말해 주는 관계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전반부는, 부모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내려놓게 하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아이의 삶을 대신 완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하느님께서 이미 그 삶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을 서두르지 않은 채, 우리 삶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어렸을 때부터 참 좋은 친구였다, 성격도 좋고….”(조용필)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배이자 한 사람으로서도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분….”(박중훈) “배우의 품위와 인간의 품격을 지켜준 분… 저에게 선배님은 ‘살아있는 성인’이셨습니다.”(정우성) 고인이 된 배우 안성기(요한 사도)를 추모하는 수많은 사람의 말을 곱씹어 보며 한 사람의 훌륭한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가에 새삼 놀랐다. 감탄과 감동, 탄식과 슬픔, 아픔, 아쉬움, 안타까움이 끝없이 이어졌고,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이의 죽음도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지나치지를 못하는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죽음이 곧 삶의 거울’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죽고 나서야 고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로 그 사람의 삶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라 그런 말이 나왔나 보다. 친구들이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면서 나의 부모님 세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죽음을 보아왔기에, 언젠가는 나도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지만 친지나 이웃의 부고(訃告)를 접할 때마다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특별히 가깝게 지내던 분의 부고를 전해 받으면 그 쓸쓸함과 허전함이 유달리 더 오래간다.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이 내 곁을 스쳐 갔다. 어떤 사람은 ‘좋은’ 기억으로 또 어떤 사람은 ‘나쁜’ 기억으로 남았다. 그 모든 사람이 나를 철들게 했고 어른으로 성장하게 했다. 돌아보니 다 고마운 인연이었고, 축복이며 은총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살아계시는 동안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쓰셨을 고인의 노력과 의지, 유족과 함께 나누었을 삶의 기쁨과 고통을 두루 연상하고 기억해 본다. 고인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유족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안성기 배우가 아들의 어린 시절에 써준 편지가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는데, 구구절절 마음에 새기고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것이기에, 다시 한번 읽으면서 옮겨 적어본다. “아빠는 아들이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는 최선을 다하고 시간을 꼭 지킬 줄 알며, 실패나 슬픔을 마음의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야망과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고, 끝없이 도전해 보아라. 그러면 네가 나아갈 길이 보인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란 바로 착한 사람이란 것을 잊지 말아라.” 글 _ 배정수 프란치스코(서울대교구 답십리본당)
수원교구 제1대리구 청소년2국은 1월 10일부터 11일까지 경기 화성 갓등이 피정의 집에서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고3 피정’을 개최했다. 이번 피정은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졸업 예정 청소년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기획됐다. 1박2일 간 진행된 피정에는 43명의 청소년이 참여해 공동체 체험, 기도, 성찰 프로그램에 함께했다. 첫째 날, 청소년들은 레크리에이션을 통해 서로 친교를 나눈 뒤 ‘인간의 창조’ 주제 강의를 들으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성찰했다. 또한 익명으로 고민을 나누고 서로 위로하는 ‘고민의 방’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이어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프로그램을 통해 저녁기도와 침묵 묵상, 나눔의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둘째 날은 ‘부르심과 응답’ 강의로 피정을 시작했다. 교구 청소년2국장 한용민(그레고리오) 신부는 베드로 사도의 사명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강의했다. 한 신부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때로는 약함이나 어리석음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말씀으로 신앙인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주신다”고 말했다. 연극을 통해 강의 내용을 체득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청소년들은 예수님과 베드로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면서 신앙을 깊이있게 이해했다. 피정에 참가한 조효주(효주 아녜스·수원교구 평택 안중본당) 씨는 “피정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마음에 깊이 와닿는 시간이었다”며 “이번 피정을 통해 책임감이 한층 더 성장했고, 앞으로도 깊은 신앙심을 지닌 청년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이동규(요한 세례자·수원교구 화성 상신본당) 씨는 “피정을 통해 기도를 자주 드리며 잘못을 돌아보고 뉘우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특히 평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익명으로 나누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진솔한 나눔을 한 ‘고민의 방’ 프로그램이 기억이 남았다”고 말했다. 피정 파견미사를 주례한 교구 총대리 문희종(요한 세례자) 주교는 강론에서 “청년 시기는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고 키워갈 수 있는 시기인 만큼 여러분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 있는 삶의 자세를 당부한다”며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맛보듯’ 알아가는 것이기에 본당과 교구 차원의 청년 단체와 신앙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예수다.”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한복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어깨에 멘 채 저는 이 파격적인 문장을 온몸으로 내뱉습니다. 저는 지금 교구 성음악위원회 산하 뮤지컬 극단인 앗숨도미네의 작품 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은 예수님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부터 골고타 언덕에서의 처절한 죽음까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신비’를 연기하면서 저는 10년 전 첫 무대를 떠올립니다. 그것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무대 뒤편 어둠 속에서 시작된 여정이었습니다. 저와 앗숨도미네의 인연은 201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무대 위 주인공을 꿈꾸는 배우가 아닌, 무대 뒤편 어둠 속에서 땀 흘리며 공연을 돕는 스태프였습니다. 공연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소품의 위치를 맞추고, 세트를 정리하는 일을 했던 제게 신앙이란 그저 주일에 성당에 가고, 정해진 성경 구절을 읽고 쓰는 정적인 의무에 가까웠습니다. 하느님은 늘 멀리 계신 분 같았고, 성경은 오래된 종이 위의 활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 위 배우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에너지와 간절한 찬양의 노래를 목격하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우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빛날 때, 차가운 활자로만 존재하던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의 역동적인 목소리와 몸짓을 통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스태프에서 시작해 물을 전해주던 이름 없는 단역 ‘돌쇠’ 역할을 거쳐, 이제는 만백성의 죄를 짊어진 예수님 역할에 이르기까지 제 무대는 점차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넓어진 무대만큼이나 하느님과의 거리도 가까워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동경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먼지 자욱한 연습실과 백스테이지를 거치며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길(Via Domini)’은 이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대 예술을 통해서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난 10년은 하느님께서 저라는 투박한 흙을 무대라는 물레 위에 올려놓고 정교하게 빚어오신 단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상상만 하던 하느님이 아닌, 내 몸을 빌려 숨 쉬는 그분을 만났을 때 제 기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 경이로운 체험의 기록을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글 _ 김승현 대건안드레아(앗숨도미네 단원)
수원교구 청소년국은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양지 영성교육원에서 2026년 청소년 견진 캠프를 마련했다. 15개 본당 중학생 103명이 참가한 캠프는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주제로 열렸다. 캠프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견진성사를 위한 교리교육을 받았다. 또 생명, 생태·환경, 평화 등을 주제로 10개 조로 나뉘어 토의를 진행했다. 저녁 시간에는 떼제기도도 함께 봉헌했다. 캠프 마지막 날에는 교구 총대리 문희종(요한 세례자) 주교 주례로 파견 미사가 봉헌됐으며, 이 자리에서 견진성사가 거행됐다. 문희종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견진성사를 받는 여러분은 이제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별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신앙적으로 성숙해져야 한다”며 “따라서 이웃에게 배려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한편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용기와 지혜를 갖추도록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이어 “지나친 또래 문화에 휩쓸려 특정한 친구를 따로 떼어 따돌리는 행위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며 “특히 가난하거나 신체적으로 허약한 친구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신앙인이 되자”고 강조했다. 행사를 주관한 제2대리구 청소년2국 국장 이규성(요셉) 신부는 “2박3일 간의 견진 캠프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학생들의 마음속에 함께 하셨다”며 “이제 이 견진자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이전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견진 캠프에 참여한 황민서(안젤라·16·수원교구 광주 곤지암본당) 양은 “견진성사로서 하느님의 성숙한 자녀가 되었으니 부모님 말씀을 따르고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김원주(베네딕토·14·수원교구 용인 삼가동본당) 군은 “캠프 중 신부님의 일곱 가지 성사, 성령 칠은 등 강의가 유익했다”면서 “은총을 풍부히 받도록 올바른 마음으로 미사 전례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성기화 명예기자
프랑스 아미앵교구장 제라드 르스탕 주교가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와의 역사적 인연을 되새기기 위해 1월 13일부터 2박3일간 광주대교구를 방문했다. 다블뤼 주교는 아미앵(Amiens) 출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45년 조선에 입국해 21년간 복음을 전하다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광주대교구는 2008년 정윤수(프란치스코) 신부를 아미앵교구에 파견한 것을 계기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방문단은 광주대교구청 내 광주가톨릭박물관과 제로웨이스트숍 ‘바오로 가게’, 목포 산정동성당과 북항 일대를 방문했다.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5·18민주화운동 기록관과 전일빌딩 등도 찾았다. 제라드 주교는 “한 교회가 기적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감사한 일”이라며 “떨어진 씨앗은 분명 하느님께서 심으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러분의 경우,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그 고통 속에서 태어났기에 믿음 안에 종교적 자유에 대한 어떤 DNA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광주대교구장 옥현진(시몬) 대주교는 “한국교회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그리고 남미 등 세계를 향한 선교에 나서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친교의 역할이 있다면 더욱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방문에는 아미앵교구 프랑수와 샤흐보넬 신부와 현지에서 사목 중인 박윤재 신부(라우렌시오·대전교구), 전창범 신부(빈첸시오·광주대교구)가 동행했다.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서울평단협)는 1월 17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제56회 정기총회를 열고, 제27대 회장에 김진택(토마스 아퀴나스·서울대교구 연희동본당) 씨를 선임했다. 김 신임 회장은 서울대교구 연희동본당 총회장, 2지구 대표 총회장, 가톨릭 군종후원회 서울지부장 겸 중앙회장, 서울평단협 부회장·감사, 가톨릭경제인회 부회장, 서울대교구 사목평의회 평의원 등을 역임하며 교회 안에서 활발히 봉사해 왔다. 아울러 서울평단협은 2026년 실천 방향을 ▲선교하는 시노드 교회 ▲모두의 교회 ▲젊은이와 함께하는 교회로 설정하고, 각 위원회와 제 단체의 사업을 실천 방향에 맞춰 구현하기로 결의했다. 특히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최종문서 세미나, 회장·위원장단 시노드 리더십 워크숍, 각 위원회 차원의 ‘경청의 날’ 운영 등을 통해 시노드 정신 실천을 위한 내부 문화를 형성하고, ‘모두의 교회 축제’를 주관하며 각 단체에서 약자 동반 활동 사업을 강화하는 등 환대와 존중, 포용의 문화를 확산해 나가기로 했다. 서울대교구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는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근본적인 정신이자 삶의 구체적인 형태로, 교구는 올해 ‘선교하는 시노드 교회를 향하여, 젊은이와 함께’를 지침으로 살아가고 있다”면서 “서울평단협이 그 누구보다 시노드 정신을 실현에 나서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위한 준비에도 힘을 모아 주길” 당부했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함 브렌단(Brendan Murray) 신부가 1월 16일 아일랜드 달간파크 성 골롬반 요양원에서 선종했다. 향년 93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1월 20일 달간파크 성 골롬반성당에서 봉헌됐다. 장지는 성당 내 성 골롬반 묘원. 함 브렌단 신부는 1956년 사제품을 받고, 1957년 12월 한국으로 파견돼 30년 동안 선교했으며 이 중 23년을 춘천·원주교구 본당에서 사목했다. 원주교구 평창본당과 춘천교구 진부본당을 설립해 초대 주임을 맡았으며, 특히 진부본당 주임이던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양 목장 책임을 맡아 운영했다. 당시 강원 산간 지역에서의 양 목장 운영은 드문 시도로, 본당 재정 자립과 농촌 경제 개발, 지역 공동체와의 연대를 성공적으로 이룬 선교 사례로 평가받는다. 1992년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친 함 브렌단 신부는 이후 호주, 영국, 아일랜드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은퇴 후 아일랜드 달간파크에서 지내왔다.
포목점과 염색업을 하는 부유한 상인 집안에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했던 도시 페루자와 교황을 지지했던 아시시의 전쟁에 참전하면서부터입니다. 어린 시절 라틴어도 배우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프란치스코였지만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중인이었지 귀족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 신분 상승의 유일한 방법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02년 부푼 꿈을 안고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포로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하 감옥 안에서 1년 가까이 갇혀 있던 기간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참담하고 나약한 모습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순간 처음 밖으로 보이는 ‘나’가 아닌 내부의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진정한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지만 아직도 프란치스코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귀족이 되고 싶은 열망을 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꿈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십자군들이 모이는 아시시 근처 도시 스폴레토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을 자다 꿈꾸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더 많이 베풀어줄 주인을 섬기지 않고 왜 종에게 자신의 삶을 바치려고 하는지 질문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향인 아시시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꿈에서 들었던 음성대로 기사가 되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아시시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꿈은 하느님이 프란치스코를 부르시는 중요한 첫 번째 때,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으로 아이온(αἰών), 크로노스(χρόνος) 그리고 카이로스(καιρός). 세 가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이온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을 나타내는 신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개념으로 1년, 1시간, 1분 등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세상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는 순간이나 때를 가리키는 시간입니다. 아이온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만날 수 없는 영역이고, 크로노스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이며, 카이로스는 사람의 힘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절대자의 개입으로 아이온과 크로노스를 이어주어 새로운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강요와 명령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의 시작이고 그 완성의 때는 오로지 ‘사람의 응답’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택을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있는 이성과 믿음인 것입니다. 기사가 되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아시시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프란치스코의 온전한 선택과 믿음,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서 완성된 충만한 시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무작정 아시시로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세상과 싸울 무기를 주셨습니다. 꿈속 예수님의 손이 향한 궁전 안에 있는 무기들은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십자 표시가 들어간 방패들이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싸움의 무기는 세상의 칼이 아니라 믿음의 방패임을 프란치스코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에페 6,12-16) 고향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성 밖에 있는 허물어져 가던 다미아노 경당에서 하느님의 뜻을 청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제대 위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이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영혼의 안식을 느끼며 십자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로부터 울리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세워라.” 이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처음엔 문자적으로만 알아들어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다미아노 경당을 수리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집을 고쳐 세우라는 것은 작은 성전인 개인의 회개와 큰 성전인 교회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임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회개하라는 이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그림 <십자가의 기적>을 보고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으로 몸이 기울어져 다가가는 프란치스코의 모습과 놀란 얼굴, 그리고 벌어진 손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모두를 회개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에 규정되어 있던 자기 낙태죄와 의사 낙태죄가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고, 형법의 이 규정들은 국회가 개정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낙태를 규제할 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낙태에 대한 처벌을 포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난 2024년 6월에 발생한 36주 태아 낙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이 자신의 낙태 과정을 고스란히 촬영하여 유튜브에 게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낙태죄가 사실상 폐지가 된 상황에서 낙태의 윤리적 심각성 역시 인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황청에서 1974년에 발표한 문헌 「낙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이가 처벌의 포기를 승인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낙태의 경우, 이런 포기는 입법자가 낙태를 더 이상 인간 생명에 대한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살인은 언제나 엄중히 처벌되고 있기 때문이다.”(「낙태 문제」 20항)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회는 형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형법이 아닌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통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민주당의 남인숙 의원과 이수진 의원 그리고 최근에는 박주민 의원까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 법안들의 주요한 문제점은 임신의 전 기간에 걸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며, 낙태 약물의 도입을 승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자보건법은 1973년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본떠서 제정되었는데, 그 주된 목적은 산아제한 정책을 위하여 낙태 허용 사유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낙태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의된 개정안은 그와 같은 사유 자체를 삭제하고 오로지 여성이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개정안들은 만삭 낙태를 사실상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중대한 문제점은 낙태 약물의 도입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낙태를 수술이라는 방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개정안들은 낙태의 정의에 약물을 통한 낙태를 포함시키고 있다. 낙태 약물의 도입은 2025년 9월 16일 정부가 발표한 123대 국정 과제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 정부가 낙태약을 국내에 도입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낙태약의 판매를 주장하는 이들은 낙태약의 사용이 낙태 수술보다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낙태약 판매가 합법화된 미국에서도 낙태약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이 보고되었고, 실제로 부작용의 발생 빈도 역시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는다. 즉, 현재 보고된 낙태약 발생 빈도보다 실제는 더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낙태약의 도입은 수많은 태아의 생명은 물론이고 여성의 생명과 건강까지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인간 생명의 초기에 이루어지는 낙태를 법제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차별은 이미 정당화되었고, 모든 사람의 동등한 존엄성을 주장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자녀를 낳아도 낙태시키지 않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악법의 제정을 막고 가장 약한 생명이 환대받고 보호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때 세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요즘 우리는 신앙 안에서도 ‘맛집’을 찾아다닐 때가 있다. 말씀을 잘 풀어 주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강의를 찾아 멀리까지 가고, 영상과 녹음을 챙겨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는 경우다. 그 시간은 분명 은총의 시간이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신앙이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나 역시 그런 체험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는가, 아니면 살고 있는가! 감동은 받았지만, 그 말씀이 내 하루의 선택과 태도를 실제로 바꾸고 있는지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말씀도 음식과 비슷하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씹지 않고 삼키면 몸에 제대로 흡수되지 않는다. 귀로만 듣고 흘려보내는 말씀은 잠깐의 포만감은 줄지 몰라도 우리 안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소화되지 않은 말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말씀을 소화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시간, 곧 묵상의 시간이다. 미사나 강론에서 들은 한 문장을 마음속에 남겨 두고, 하루를 살다가 문득 떠올려 보는 일이다. “이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질문들이 반복될 때,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던 말씀이 삶의 장면과 부딪히며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바로 그때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기준이 된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들은 한 번에 이해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곱씹을수록 마음을 건드리고, 살아갈수록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말씀은 그렇게 소화된다. 말씀이 소화되어 흡수되면 변화가 일어난다. 말씀은 내 감정과 판단 위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화가 날 때 나를 멈추게 하고, 억울함이 치밀어 오를 때 다른 길을 가리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이 말씀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삶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안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즉각적인 반응 대신 한 박자 늦추고, 단호한 판단 대신 여지를 남긴다. 흡수된 말씀은 말의 톤을 바꾸고, 관계의 방향을 바꾸며, 하루의 리듬을 바꾼다.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아, 말씀이 나를 살리고 있구나.” 말씀은 더 이상 책의 문장이 아니라, 내 삶을 이끄는 내적 나침반이 된다. 몸에서 배설이 막히면 병이 되듯, 신앙에서도 흘려보내지 못하면 병이 된다.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깨닫고도 그 모든 것이 나에게서 끝난다면, 신앙은 쉽게 자기만족에 머문다. 나만의 영적 체험으로 굳어 버릴 수 있다. 신앙의 배설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다. 작은 관심과 작은 배려, 작은 나눔이면 충분하다. 말 한마디를 삼키고, 한 번 더 손을 내미는 일.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 누군가를 살리는 행동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듣는 말씀에서 머무르지 않고, 소화되어 삶이 되고, 다시 사랑으로 흘러갈 때 신앙은 막히지 않고 순환한다. 말씀을 잘 듣는 신앙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으로. 오늘 우리가 찾아야 할 ‘맛집’은 강연장이 아니라, 우리의 하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글 _ 노봉수 야고보(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선생님, 희망을 이야기하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요? 선생님 글은 가끔 너무 착해서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욕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이 질문을 학생이 했을 때, 저는 좀 뜨끔했습니다. 학생이 정말로 하고픈 말은 조금 달랐을 것 같아요. 절망보다 희망을, 슬픔보다 기쁨을, 비판보다 격려를,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견지하는 태도가 젊은이들에겐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감수성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학생들은 가끔 날 것의 절규를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소감을 말해주는 학생이 그래서 저는 고마웠습니다. 제가 말했어요. “글이나 말은 어느 정도 상대적이어서 듣는 이를 생각해야 하거든. 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간의 시험을 거치며 남는 글은 좀 다르게 쓰고 싶어. 그리고 착함은 얼핏 힘없어 보여도 결국에는 이기는 굳센 힘이 돼.” 그 이후 저는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에 대해 더 곰곰 오래 머물러 생각하곤 합니다. 눈물보다는 웃음, 절망보다는 희망, 죽음보다는 삶, 더 바람직하다고들 말하는 삶의 태도들이 정말로 늘 답인가 질문하면서요. 큰 슬픔을 지나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삶다워질 수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고, 눈물이 있기에 웃음이 있고,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다고. 그래서 가늠할 길 없는 슬픔에 더 보탤 말이 없으니 다만 기도한다는 말씀이나, 슬플 때는 빨리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충분히 슬퍼하라는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상실을 극복하려는 마음도 버리라고, 아버지를 여의는 일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해야 하는 슬픔이기에 그를 부정할 수 없다고, 본향으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에 앞서 그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저보다 먼저 겪은 경험을 통해 건네주시는 위로의 말들 속에서 저 또한 깊이도 너비도 모를 이 별리의 터널을 잘 지나고 있습니다. 폴 엘뤼아르의 시 <그리고 미소를>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슬픔을 나누는 일은 곡진한 감정의 골을 함께 지나는 일, 그래서 슬픔의 끝을 맞잡은 이들은 결국 열린 창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 슬픔의 끝은 그러므로 다른 세계,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또 다른 열림으로 이어진다는 것, 열린 그 창에 불이 하나씩 켜질 때 우리는 더 깊은 연대와 공감을 나누는 존재들이 된다는 이야기. “선생님, 저는 아직 그 슬픔을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지나야 하는 마지막 시험인 이상, 그 시험을 몸소 지나는 일도 그걸 지켜보는 일도 쉽지 않음을 희미하게 알 것 같아요. 그러니 더 힘들어하시고 슬퍼하셔도 됩니다.” 어린 학생이 건네는 조심스러운 위로를 통해서도 슬픔이 열어주는 불 켜진 창을 마주하네요. 그렇게 저는 또다시 말에 기대어 함께 나누는 삶 안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그런 힘으로 이 혹독한 시간을 지나오셨겠지요. 연약한 인간은 이로써 더 단단해지고, 관대하고 너른 인간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게 삶이겠지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 2026년 첫 전시로 운보 김기창(베드로, 1914~2001)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 판화를 감상할 수 있는 특별전 ‘한국의 색을 입은 그리스도’를 2월 9일까지 선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한국적 아름다움으로 재해석한 김 화백의 <예수의 생애> 연작은 한국 성미술 토착화의 대표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선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천사를 비롯해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 주변으로 보이는 초가집,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등은 한국의 풍속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6·25전쟁 당시 전북 군산으로 피란을 떠난 김 화백은 미국 선교사의 권유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참상을 겪는 민족적 아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떠올렸으며, 시대의 상처를 통해 ‘구원’을 바라보고자 했다. 운보문화재단은 2003년 <예수의 생애> 대중 보급을 위해 종이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판화를 한정 수량으로 제작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2년에 걸쳐 판화본 30점 중 28점을 매입했으며, 전시에서는 <이집트로의 피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세례>,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그리스도의 부활> 등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관장 원종현(야고보) 신부는 “한국의 색을 입은 성미술은 우리가 가진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롭게 섞이어 익숙하지만 동시에 참신한 조형을 보여 준다”며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기, 익숙한 일상에 활기를 부여하고 희망의 길을 찾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