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은 제31회 농민 주일이다. 교회는 농민 주일을 맞아 농촌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생명을 일구는 농업과 농민의 가치를 되새긴다. 오늘날 농촌은 기후위기로 농사 시기와 수확량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데다 고령화와 생산비 상승, 일손 부족까지 겹쳐 어느 때보다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생명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묵묵히 논과 밭을 일군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농민회 대광분회 회원 최성순(로사) 씨가 운영하는 경기도 연천 안뜨레농장을 찾아, 기후위기 시대 생명농업을 이어 가는 농민의 하루를 함께했다. 기후위기가 바꾼 농촌 “10년 전도 아니야. 고작 2~3년 전부터 자외선이 너무 강해졌어요. 햇볕이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따가워요. 피부가 익는다니까요.” 39년째 안뜨레농장을 운영하는 최성순 씨는 최근 몇 년 사이 햇볕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 밭일을 하고 한낮의 열기를 피해 쉬었다가, 오후 4시쯤 다시 밭으로 나간다. 해가 가장 높은 시간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새벽에도 체감온도가 25도를 훌쩍 넘는 것 같아요. 열대야가 이어지면 밤새 달궈진 열기가 아침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기후변화는 농민의 노동시간과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새벽과 늦은 오후로 일을 나눠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 같은 체감은 한 농민의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24년 농업·농촌 국민의식 조사」에서 농민들은 농업 경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재배 여건 변화’를 꼽았다. 달라진 기후는 작물의 생육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워졌고, 작물이 품종 고유의 크기와 모양대로 자라지 않는 일도 잦아졌다. 올해 안뜨레농장의 미니 단호박은 일반 단호박만큼 커졌다. 어른 주먹 정도여야 할 열매가 아이 얼굴만 한 크기로 자란 것이다. 최 씨는 “예전에는 봄에 심은 단호박을 가을까지 일정하게 수확했지만 이제는 언제까지 열릴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올해는 미니 단호박 크기도 유난히 크고 열린 양도 지난해보다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작물이 크고 많이 열린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농산물은 품종에 맞는 크기와 모양을 갖춰야 상품성이 높다. 기후가 바뀌며 오랜 농사 경험으로도 수확량과 품질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그래도 생명농업을 이어가는 이유 최 씨는 약 3000평의 밭에서 미니 단호박과 감자, 고추, 오이, 가지, 양배추, 상추, 무 등 20여 종의 채소를 기른다. 10년 전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농약을 사용하던 기존 농법에서 무농약 농사로 전환했다. 주력 작물은 미니 단호박이지만 판로에 맞춰 여러 작물을 함께 재배한다. 수확한 농산물은 인근 하나로마트 로컬푸드 매장과 계약 업체, 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생활공동체 나눔터, 직거래 장터인 명동보름장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농장 창고에는 갓 수확한 감자가 가득 널려 있었다. 농민 주일을 맞아 7월 19일 서울 명동에서 열리는 명동보름장에 내놓을 농산물이었다. 무농약 농사는 일반 농법보다 훨씬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제초제를 쓰지 않으니 밭의 풀을 일일이 뽑아야 하고, 해충도 사람의 손으로 잡아야 한다. 덥고 습해질수록 풀과 벌레는 더 빠르게 번진다. 무농약 농사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서 생명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다시 밭으로 이끌었다. “예전 농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무농약·친환경 농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명감으로 이어 가고 있어요.” 심각한 기후위기 직격탄 맞은 농촌…잇따른 기상이변에 농사 여건 악화 39년째 농장 운영하는 최성순 씨…수확량·품질 예측 힘든 상황에도 무농약·친환경 농업 사명감 지켜…“생명농업 우리 농산물 선택해 주길” 빈자리 채우는 이주노동자 농촌 고령화도 농민들이 마주한 또 다른 어려움이다. 농장이 자리한 지역의 농민 대부분은 70~80대다. 올해 63세인 최 씨는 마을에서 ‘젊은 농부’다. 때문에 외국인 계절근로자(E-8)는 부족한 일손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농사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 인력이 됐다. 이들은 파종기·수확기 등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업 분야 인력난 해소를 위해 입국한 노동자들이다. 최 씨도 3년 전부터 농번기마다 계절근로자를 직접 고용한다. 특히 무농약 농사를 지으려면 풀을 뽑고 벌레를 잡는 데 더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농장에서는 베트남에서 온 양 씨와 코아 씨,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E-9)으로 입국한 네팔 출신 라즈 씨가 함께 일하고 있다. 올해 처음 한국에 온 양 씨에게도 고온다습한 여름은 버겁다. 그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이른바 ‘선풍기 조끼’를 입고 밭일을 이어 갔다. 농촌과 생명농업, 농민 홀로 지킬 수는 없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최 씨가 농사를 지으며 지키는 기준은 분명하다.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은 팔지 말자.” 최 씨는 “예쁘고 깨끗한 농산물을 팔기 위해 수확 한 달 전까지 농약을 뿌리는 일은 농민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며 “내가 먹지 못할 것을 소비자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선택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몸에 걸치는 옷에 쓰는 비용을 조금 줄이더라도, 몸속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만큼은 친환경 농산물과 질 좋은 우리 농산물을 선택해 달라는 것이다. 의정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본부장 박인수(요셉) 신부는 “도시 소비자들이 농가를 찾아 일손을 돕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들으며 함께 식사하고 교류하는 자리에서 농민들은 큰 힘과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농민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해 주기를 바란다”며 “매일 마주하는 한 끼의 밥상이 농민들의 땀과 생명의 땅에서 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농업의 소중함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나는 교구 사진가회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다. 개신교를 믿던 평범한 주부였던 내가 가톨릭 사진가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을 이끌어 오신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조금은 현실적이지 않은 엉뚱함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나의 일생을 계획해 놓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50여 년 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다. 아이 유치원 엄마 중 동네 약국을 경영하던 약사님의 권유로 카메라가 있는 몇몇 엄마들이 모여 사진반을 만들었다. 그때 우리는 30대 초반이었으니, 이제는 옛날이야기다. 유치원 차 타는 곳에서 우리는 얼마 동안 얼굴을 익혔고, 그 후에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숙해졌다. 어느 날 약사님과 집으로 오던 중 백일장에 나가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참석한 백일장에서 나는 입선을 하게 되었고, 약사님은 무척 좋아하시며 전업주부인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 취미를 가져 보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다. 30대의 젊은 엄마였던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목마름에 약간은 몸이 근질거리지 않았나 싶다. 사진반, 문예반, 중창반, 탈춤반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각자 맡은 반에서 열심히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반은 그 지역에서 사진을 하시던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에 공부도 하고, 분기별로 출사도 다녔다. 사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열정을 높이 평가해 주시며 진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다. 우리는 가끔 모르는 곳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다는 사실에 마냥 설레곤 했다. 연말에는 시화전과 사진전도 했다. 자작시에 손수 그림을 그려 액자를 만들어 걸고, 출사 후 찍은 사진 중 몇 점을 골라 액자에 넣어 전시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가능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진전을 할 때, 사진반 선생님은 손수 좋은 사진을 골라 주시며 전시회가 처음인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당시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던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사진반 활동에 더욱 열심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단체나 모임이든 과도기가 지나면 조금 느슨해지면서 열정이 식곤 한다. 몇 년이 지나자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엄마들이 타성에 젖기도 하고, 이사와 아이들 교육 문제로 그만두기도 하면서 모임을 이어 가는 것이 위태로워졌다. 결정적으로 모임을 이끌었던 약사님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셔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됐고, 우리도 모든 활동을 접게 됐다. 사진을 통해 나를 찾아가던 중이었지만, 일상의 어려움으로 지친 상태였고 모임을 해체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열정을 다해 사진을 찍었던 그때를 나는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때는 몰랐으리라. 내가 일흔이 넘어 다시 사진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글 _ 조웅식 가타리나(수원교구 사진가회)
“늘 하느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며 청빈과 순명을 실천하신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님은 알면 알수록 배울 점이 많은 분입니다. 선종완신부 영성학교에 오시면 신부님의 삶과 신앙을 공부하며 자신의 신앙생활도 더욱 풍성하게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선종완 신부 영성학교’ 교장 조석(요한 사도·제2대리구 과천본당) 씨는 선종완 신부의 삶과 영성을 배움으로써 더욱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 창설자인 선종완 신부는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 사제다. 선 신부 선종 50주기를 앞두고 그의 삶과 신앙을 본받기 위해 2025년 선종완 신부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회 산하에는 기도회와 영성학교, 장학회가 각각 꾸려졌다. 조 씨가 선 신부의 영성을 접하게 된 것은 과천성당 인근에 자리한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 수녀들과 교류하면서부터다. “수녀님들을 자주 뵙고 선종완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재속회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부족하다고 느꼈던 영성적인 부분을 선종완 신부님을 통해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재속회 회원들과 성지순례와 피정을 함께하고 선 신부에 관해 공부하면서, 조 씨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간 선 신부의 삶에 점차 매료됐다. 선 신부는 로마와 예루살렘에서 성서학을 공부한 뒤 귀국해 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성서학을 가르쳤다. 조 씨는 선 신부가 1950년대부터 신자들이 성경을 가까이하고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선 신부님은 성당을 짓는 것보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그런 신부님의 삶을 알아 갈수록 존경심이 커졌습니다.” 재속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조 씨는 추진위원회가 영성학교를 꾸리는 과정에서 교장을 맡게 됐다. 그는 선 신부의 영성을 더 많은 신자에게 알리고, 신앙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배움의 장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올해 3월 수업을 시작한 영성학교에서는 선 신부의 청빈한 삶과 성경 번역에 대한 열정, 한국 교회사 안에서 지닌 의미 등을 살펴보는 다양한 강좌가 마련됐다. 강사진에는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뿐 아니라 선 신부를 연구한 개신교 목사도 참여했다. “첫 학기였는데도 50여 명의 신자가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 신부님이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보여 주신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실천하고자 애쓰신 모습을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수강생들이 더욱 기쁘고 풍요롭게 신앙생활을 이어 갔으면 합니다.” 조 씨는 끝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청빈한 삶을 실천했던 신부님을 더 많은 신자가 즐겁게 배울 수 있는 학교로 만들어 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국제개발협력 NGO인 사단법인 평화삼천이 교육과 취업 기반이 부족한 라오스 청년들을 위한 자립 터전을 마련했다. 평화삼천은 7월 6일 라오스 후아판주 현지에서 ‘왕마이 직업기술교육센터’ 개소식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개소식에는 평화삼천 운영위원장 박창일 신부(요한 사도·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와 후아판주 부주지사, 부교육청장 등 현지 주요 관계자 40여 명과 1기 교육생 20명이 참석했다. 후아판주는 산간 지역에 자리해 기반 시설과 일자리가 부족하다. 특히 기후와 지형 여건 탓에 농업만으로 충분한 소득을 얻기 어려워, 학교를 졸업한 청년들도 생계를 이어갈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다. 이에 청년들의 취업 역량을 높이고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한 직업기술교육이 절실한 상황이다. 평화삼천은 이러한 지역 현실을 고려해 청년들이 지속적으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직업기술교육센터를 건립했다. 교육생들이 센터에 머물며 교육받을 수 있도록 기숙형 시설로 꾸몄으며, 1층 건물에 재봉실과 기숙사, 조리실, 사무실 등을 갖췄다. 센터의 첫 교육과정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재봉 교육이다. 1기 교육생 20명은 개소식 당일부터 7월 31일까지 센터 기숙사에 머물며 전문 재봉 기술을 익히고 자립의 꿈을 키우게 된다. 박창일 신부는 축사에서 “‘왕마이’는 라오어로 ‘새로운 희망(ຫວັງໃໝ່)’을 뜻한다”며 “왕마이 직업기술교육센터가 후아판주 청년들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고 새로운 희망을 키워나가는 소중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평화삼천은 재봉 교육을 시작으로 컴퓨터와 정보기술(IT) 등 다양한 직업기술교육 과정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지역 학교와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후아판주 청년들의 취업 역량을 높이고 안정적인 자립 기반을 마련해 나갈 방침이다. 평화삼천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를 기치로 2003년 설립된 비영리민간단체다. 초기에는 남북 간 교류협력과 인도적 대북 지원사업을 통해 민족 화해와 통일에 기여하는 데 주력했으며, 2008년부터는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로 활동 반경을 넓혀 빈곤 퇴치와 기초생활 보장, 교육 및 보건의료 환경 개선을 위한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오고 있다.
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 민족화해위원회는 7월 11일 교구청 지하 강의실에서 제23기 청년도보성지순례 파견미사를 봉헌했다. 미사는 교구장 대리 곽진상(제르마노) 주교가 주례하고 교구 및 수도회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다. 곽 주교는 강론에서 “힘들고 아픈 것을 이겨내고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온 여러분이 정말 장하다”며 “육체적인 체험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공동체성을 키우는 영적인 체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목마른 친구에게 물 한 모금을 나누고, 발에 물집이 생긴 친구에게 소독약을 발라주는 것은 그 친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해드린 것”이라며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또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영적인 삶으로 육적인 삶을 이끌고 정화하며 완성해 가는 그리스도인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곽 주교는 미사 중 도보순례 수료자와 완주자에게 각각 수료증과 완주증을 수여하고 긴 여정을 마친 청년들을 격려했다. 7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린 도보순례에는 청년 8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7박 8일 동안 천진암·어농·단내성가정·은이·미리내·요당리성지 등 6개 성지를 순례하며 총 36만2208보를 걸었다. 또 정의·평화·사랑을 염원하며 묵주기도 3만3858단을 봉헌했다. 순례단은 초월·곤지암·이천·여주·가남·양지·양성·서정동성당 등을 거쳐 마지막 날 갓등이 피정의 집에서 교구청까지 걸었다. 각 성지와 경유 본당을 잇는 전체 순례 거리는 216.4㎞에 달했다. 이날 교구청 ‘평화의 예수님상’ 앞에서는 신자 100여 명이 뙤약볕과 폭우를 무릅쓰고 긴 여정을 완주한 순례단을 환영했다. 교구는 이번 장기 일정에 참여하지 못한 청년들을 위해 3박4일 간 단기 일정 도보순례를 9일 10일부터 13일까지 마련한다. 단기 도보순례 신청은 7월 31일까지이며 만 19세 이상 45세 이하 청년 40명을 선착순 모집한다. ※문의 031-417-5322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성기화 명예기자
의정부교구 갤러리 평화는 경기북부지역 한국화 전시그룹 화동행(花童行)의 아홉 번째 그룹전 ‘여리고 꽃같은 아이들을 위한 한걸음’을 연다. 화동행은 수묵화와 채색화 등 한국화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경기북부지역 작가들의 모임이다. 전시에는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한국화, 채색화, 민화, 펜화 등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는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사회 기여와 나눔 실천을 위해 마련됐다. 수익금은 아동복지 전문기관인 대한사회복지회 의정부영아원에 전달된다. 작가들은 직접 제작한 회화 엽서를 판매해 관람객들이 부담 없이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다. 화동행은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예술 활동과 연계한 후원 환경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갈 계획이다. 전시는 7월 24일까지.
[외신종합] 이탈리아 자동차 제조사 ‘피아트’가 바티칸시국의 ‘생태적 전환 2030’ 사업에 협력하기 위해 전기차 30대를 기증했다. ‘생태적 전환 2030’ 사업은 바티칸시국 공용 차량을 단계적으로 ‘탈탄소화’해 2030년 말까지 ‘배출가스 제로’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피아트가 기증한 전기차는 바티칸시국 직원들의 업무에 투입되며, 바티칸시국 내 교통 환경 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피아트는 첫 단계로 6월 30일 ‘토폴리노’ 차량 20대를 우선 전달했다. 전달식은 바티칸시국 행정원 청사 앞 광장에서 열렸으며, 행정원 차관 에밀리오 나파 대주교와 올리비에 프랑수아 피아트 최고경영자 등이 참석했다. 피아트는 ‘트리스’ 10대를 추가로 전달해 차량 기증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생태적 전환 2030’ 사업은 바티칸시국의 차량 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 사업에는 천연자원의 책임 있는 사용과 에너지 효율 향상, 시설 현대화 등 바티칸시국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포함돼 있다.
■ 옥승만 신부(가롤로·서울대교구 갈현동본당 부주임)의 부친(옥점석 안토니오, 73세) - 선종일: 7월 6일 - 장례미사: 7월 9일 오전 10시 서울 갈현동성당 - 장지: 절두산순교성지 부활의집
“남북한 천주교 신자들이 분단 반세기 만에 만났다. 남북한 및 해외 천주교인들은 10월 30일 뉴저지 포트리시 힐튼호텔에서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역할’과 ‘남북 해외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 차례의 세미나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남측의 장덕필(니콜라오) 명동본당 주임신부와 손병두(요한 보스코)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국제분과위원장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 김유철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각각 주제발표했다. 남북 참가자들은 일요일인 29일 뉴욕 소재 퀸즈한인성당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교민 신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최창무(안드레아)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미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전제, ‘평양의 장충성당 교우와 남한과 해외 신자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면서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고 양측의 만남에 기쁨을 표시했다. 이어 차성근 장충성당 회장은 ‘북측 신자들은 미흡하나마 주일을 거룩히 지켜왔다’며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나지만 여기에 그치지 말고 통일의 그날까지 함께 하기를 기원하자’고 인사했다.”(가톨릭신문 1995년 11월 5일자 1면) 1995년 뉴욕에서 역사적 만남 남북 천주교 신자 친교 이루며 체제·이념 초월한 형제애 나눠 분단 50년 만의 감격스러운 만남 1995년 10월 30일, 분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의 신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형제애를 나눴습니다. 그동안 남한 천주교 인사들의 간헐적인 북한 방문은 있었지만 남북한과 해외의 천주교 신자들이 직접 모임을 갖고 통일을 위한 논의를 한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당시의 감격적인 만남의 순간들을 가톨릭신문은 11월 5일자 1면 보도기사에 이어 3면에서 상세하게 전했습니다. 미국 뉴욕 퀸즈본당 주임 안상인(요셉) 신부는 “여기 특별히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다”며 “우리 모두 북한의 형제들을 뜨겁게 환영하자”고 인사했습니다. 이어 북한 장충성당 차성근 회장은 “해외 교우들에게 장충성당 교우들의 뜨거운 인사를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만남에서 특히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노인들은 북측 참가자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 새삼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황해도 출신 신자들은 앞다퉈 북한 신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북한 신자들은 미사에 앞서 안상인 신부에게 북에서 신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기도서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만남 이틀째인 28일 저녁에는 만찬을 함께 하며 일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친교를 나누던 남북한 신자들은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되자 서로의 어깨를 껴안고 정을 나눴고,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리랑, 도라지 등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우리 민요를 열창했습니다. 남북 교류와 인도적 지원 물꼬 터 1995년은 통일과 민족화해 분야에서 큰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해였습니다. 서울대교구가 3월 1일 민족화해위원회를 공식 출범시키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교회의 사목적 인식에도 중요한 전환이 이뤄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을 침묵의 교회나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대화와 화해를 통해 일치를 이뤄야 할 상대로 여기게 됐습니다. 주교회의도 1999년 기존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민족화해위원회’로 바꾸고 북한 선교를 형제적 나눔으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남측의 민화위와 북측의 조선천주교인협회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마침내 뜻깊은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당시 세미나는 학술 토론 자체보다 단절됐던 남북 교회 구성원들이 공식적으로 만나 끊어졌던 관계를 잇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남북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함으로써 향후 남북 간의 인도적 지원과 인적 교류를 상설화하는 공식적인 고리를 만들어내는데 그 참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남측에서는 최창무 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를 포함해 7명이, 북측에서는 장재철 위원장(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장)과 차성근 회장(평양 장충성당 회장) 등 5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습니다. 해외 대표단은 박창득 신부(아우구스티노·미주 교포 사목부 총대리) 등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신뢰 구축·교류 위한 대화로 남측 사제단 공식 방북 성사 민족화해 사목 지속 기반 마련 통일세미나의 성과와 영향 1995년의 뉴욕 세미나는 일회적인 교류에 그치지 않고, 남북 천주교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1년 반 뒤인 1997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는 제2차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베이징 세미나는 일회성 만남을 넘어 지속 가능한 교류와 민족화해 노력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실무적 성격의 대화로 진행됐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방북 추진과 이에 앞선 남측 관계자의 방북,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의 자매결연, 상호 방문 등이 논의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구축된 신뢰를 바탕으로, 1998년 5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최창무 주교 등 7명으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의 공식 방북이라는 역사적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북측 조선천주교인협회 중앙위원회의 공식 초청으로 성사된 이 방북에서 남한 사제단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북한 신자들과 함께 직접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분단 이후 한국 주교가 사목적 목적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첫 사례가 됐습니다. 이는 한국교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00년 6월까지 서울대교구 민화위를 통해 총 78억 3000여만 원에 달하는 식량과 긴급 구호 자금이 북한 수재민과 취약계층에 전달됐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여정 1995년 남북 가톨릭 신자 간의 첫 공동 세미나는 단지 50년 만의 악수나 일회성 만남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남한교회가 북한 가톨릭 공동체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공식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으며, 남한교회 내부에 지속적인 민족화해 사목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026년 7월 현재 한반도는 분단 81년, 6·25전쟁 정전 73년을 맞이했지만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대화 채널이 전면 단절된 극단적인 경색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북한은 2024년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한 데 이어 2026년 개헌에서는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는 등 ‘두 국가’ 노선을 명확히 제도화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여전히 실천적이고도 다각적인 화해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주영(시몬) 주교는 2025년 8월 15일 발표한 ‘한반도 분단 80년 특별 사목 서한’에서 “불신과 미움 속에서 무기와 군사력을 방패 삼아 상대를 굴복시켜 얻은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북한 동포를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호혜적 협력에 기반한 교류를 지지하며 함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살레시오회는 전 세계 133개국, 90개 관구에서 돈 보스코 성인의 예방교육 영성을 바탕으로 청소년·청년 사목을 펼치고 있다. 살레시오회의 모든 중·고등 교육 학교부터 오라토리오, 동아리, 본당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는 청소년과 청년을 SYM(Salesian Youth Movement, 살레시오 청년운동)이라 부른다. 살레시오회는 1986년 제1회 WYD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회에 참여하였으며, 단순히 참가자로 머무는 것을 넘어, 세계 각국에서 WYD의 준비와 진행의 한 축을 담당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아왔다. 지난 1997년 파리 WYD부터 살레시오회는 대회 기간 중 전 세계에서 모인 SYM 청년들을 위해 수도회 차원에서 ‘매스 그룹(Mass Group)’을 운영해 왔다. 크라쿠프 대회와 리스본 대회 때 매스 그룹을 통해 참가한 SYM 청년은 1만 명이 넘었다. WYD를 개최하는 나라의 살레시오회 관구에서는 청년들의 참가 신청, 숙소 배정, 식사, 등록 등 행정 전반을 총괄하며 청년들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모인 전 세계 SYM 청년들은 본대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대회 중 하루를 ‘SYD(Salesian Youth Day, 살레시오 청년의 날)’라는 특별한 축제로 기념한다. SYD 첫날 오전 열리는 Salesian Youth Forum은 각국 청년 대표들과 동반 수도자들이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 총장 신부·수녀와 함께 WYD 주제 및 청년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양성의 시간을 갖는다. 오후에 마련되는 Salesian Youth Festival은 전 세계 모든 SYM 청년이 한자리에 모여 밤늦게까지 기쁨을 나누는 축제와 연대의 장이다. 축제는 성체 강복과 살레시오 전통인 ‘저녁말씀’으로 막을 내린다. 2027년 서울 WYD를 앞두고, 살레시오회 한국관구는 서울의 인프라와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 로마 총본부와 긴밀한 조율을 거쳤다. 그 결과, 이번 대회에서는 매스 그룹 대신 2027년 8월 4일 하루 ‘Salesian Youth Day(SYD SEOUL)’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이미 2025년 말부터 ‘SYD SEOUL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다각도의 논의와 준비를 이어가고 있다. SYD SEOUL은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돈보스코 협력자회 등 한국의 모든 살레시오 가족이 SYM 청년들을 환대하는 기쁨과 친교의 자리, SYM의 기본 영성인 예방교육 안에서의 말씀, 성사, 친교, 사회참여의 장으로 거듭날 것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비록 녹록지 않고 수많은 땀방울을 요구하겠지만, 그 과정에 SYD SEOUL을 준비하는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섭리를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체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2027년 서울에서 펼쳐질 전 세계 살레시오 청년들의 친교와 화합의 장을 준비하며, 한국을 방문하게 될 모든 SYM청년이 대한민국의 특별한 문화·역사·종교의 장에서 이전에는 해 보지 못한 신앙 체험, 화합의 체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_ 성하윤 도미니코 사비오 신부(살레시오회 한국관구)
중세 초기인 6세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제작된 수사본(手寫本) 「비엔나 창세기(Wiener Genesis)」의 한 페이지입니다. 역사적 가치는 물론 뛰어난 예술성으로 높이 평가되는 이 걸작은 원래 총 192페이지로 구성되었는데, 현재 48페이지만 남아 있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 본래의 화려한 ‘보라색’ 배경이 갈색으로 바래버린 상태지만, 여전히 본래의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보라색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바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귀한 색이었지요. 이는 창세기의 대홍수 후, ‘무지개의 표징’ 장면으로, 페이지 상단에 희랍어 그리고 하단에 하느님이 노아와 계약을 맺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노여움으로 발생한 대홍수는 ‘노아의 방주’를 제외하고,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 함, 야펫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입니다. 네 인물 중 세 번째로 흰옷 차림에 백발인 노아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선은 둥글고 푸른 하늘을 뚫고 이들을 향해 팔을 뻗은 하느님을 향합니다. 특히 노아의 목이 완전히 뒤로 꺾인 듯한 과장된 표현과 얼빠진 듯 순진무구한 모습은 하느님을 향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역시 위를 보는 세 아들의 표정과 제스처가 개성 넘치게 표현되어 더욱 친근하고 생기 있게 다가옵니다. 어리석고 타락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큰 재앙을 일으키신 하느님, 하지만 이는 깊고 영원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푸른 하늘에 무지개를 띄워 ‘거룩한 표징’을 보여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창세 9,12-17 참조) 노아와 세 아들 위에 드리워진 아치형의 오색찬란한 무지개…. 무지개는 이들을 위협하는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거대한 보호막이자 하느님과 이어주는 다리, 부족함 투성이의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신 영원한 희망, 바로 사랑의 약속입니다. 글 _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달리기가 나눔이 되고, 나눔은 환대로 이어지고 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이하 WYD)를 앞두고 본당 청년들이 2027km 달리기에 나섰다. 달린 거리만큼 기부금을 모아 내년 본당을 찾을 해외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겠다는 뜻에서다. 전주교구 덕진본당(주임 김지광 요한 보스코 신부) 20대 청년회 '하상회'와 30대 청년회 '돈보스코회'는 2025년 11월 달리기 모임 '주주클럽'을 결성했다. ‘주주’는 주님을 뜻하는 ‘주(主)’와 달린다는 뜻의 ‘주(走)’를 합친 말로, ‘주님과 함께 달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주클럽은 WYD가 열리는 2027년의 의미를 담아 2027km를 달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1㎞를 달릴 때마다 1000원의 기부금도 적립했다. 회원들은 올해 6월 6일 목표를 달성했지만, 현재도 꾸준히 뛰며 나눔을 이어가고 있다. 돈보스코회 성중현(라파엘) 회장은 “예상보다 이른 시기에 목표를 달성했지만 회원들과 계속 달리며 추가로 모인 기부금을 어디에 사용할지 논의하고 있다”며 “더 다양한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주클럽은 지난해 불었던 ‘달리기 열풍’을 계기로 건강한 일상을 함께 만들어가고자 달리기와 걷기를 시작했다. 이후 WYD를 앞두고 청년회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활동을 고민한 끝에, 기부를 접목한 달리기 모임으로 발전시켰다. 성 회장은 “달리기는 다른 모임에서도 할 수 있지만, 본당 청년회만의 목표를 갖고 뛰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본당을 찾을 순례객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고 싶어 힘을 보탤 방법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주주클럽에는 20여 명의 청년과 주임신부가 함께하고 있다. 김 신부는 청년들이 좋은 뜻으로 자발적으로 시작한 활동인 만큼 곁에서 응원하고자 달리기에 동참했다. 그는 “청년들과 보조를 맞춰 달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며 “처음에는 근육통도 겪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제는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돈보스코회 김유진(정혜 엘리사벳) 씨는 “2018년 서울에서 열린 한국청년대회(KYD) 때 처음 만난 다른 본당 청년들에게 받은 환대가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며 “내년 우리 본당을 찾을 해외 순례객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머물며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내년 본당을 찾을 해외 청년 순례자들에게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자매인 만큼 고향에 온 것처럼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머물다 가길 바란다”며 “서로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서로를 북돋우며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는 제31회 농민 주일을 맞아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9) 제목의 담화를 발표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며 땅과 물, 공기를 안전하게 지켜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아빠스는 “값싼 수입 농산물 유입이 국산 농산물 가격 하락과 농가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고, 농촌 지역 소멸 위기와 자연재해로 농촌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며 “이러한 위기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깨진 시대 전체의 아픔”이라고 우려했다. 박 아빠스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생명과 식량 주권, 공동체 문화, 생태계 보전의 관점과 공공 가치 측면에서 농업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가격만을 앞세운 선택이 쌓일수록 우리의 식탁은 위협받고, 우리가 지켜야 할 지구 환경은 위태로워진다”며 “친환경 농산물을 고르고 제철 먹거리를 이웃과 나누는 작은 선택이 생명을 살리는 연대”라고 전했다. 박 아빠스는 “생명의 터전을 보존해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는 농민들의 땀방울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지탱하고 있다”며 “밥상 위 수많은 생명과 농민의 땀, 하느님의 은총이 있음을 기억하며 식탁 앞에 앉을 때, 한 끼의 밥은 감사의 기도가 된다”고 덧붙였다.
한평생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헌신했던 고(故)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5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영성을 새롭게 일깨우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선 신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 성경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을 뿐 아니라, 당시 성서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번역본에 충실히 담았다. 그는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학자’, 나아가 ‘동아시아의 예로니모’라 평가할 만한 선구자였다. 선 신부의 위대함은 학문적 성취에만 있지 않다.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더 쉽게 읽고 깨닫도록 성경 번역에 온 힘을 쏟았고, 그 비용을 마련하려 메추라기를 기르고 밭을 일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참여해 교파의 벽을 넘어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까닭도 성경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학문과 노동, 사목과 영성은 모두 말씀이라는 한 뿌리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그의 업적을 과거의 기념비로 기리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라는 그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삶이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한 섬김으로 드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 신부가 평생 보여준 길은 분명하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의 선종 50주기를 맞아 한국교회와 모든 신자는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피와 살이 되도록 새겨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아기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 근원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찬미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가 미국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아이를 낳고 귀국할 수 있겠다며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일 경우,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덤으로 주어지니 당연한 선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없는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가,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편법은 싫고, 군대도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귀한 생명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콤한 낙지볶음도 먹고, 모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서둘러 세상에 왔다. 아직 폐가 완성되지 않았을 시기라 급히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열이 40도까지 오른 상태로 꼬박 하루를 진통한 끝에 첫 아이를 만났다. 의사들의 염려와 달리, 아기는 다행히 숨도 잘 쉬었고 크고 건강했다. 위험할 만큼 출혈이 심했다지만 그런 상황은 이미 흘러갔고, 그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품 안에 놓여 있다는 것만 보였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부족해 마냥 울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던 아기는 어느새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쌩쌩 가르며 두발자전거를 탔다. 품 안의 아기는 아이가 되었다. 마구 달리는 아이를 따라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아이의 말 속에서 “아하!”를 외치며 순간의 진리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슈퍼 천재’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아기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그런 아기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때론 깨어지고 또 빛난다. 동시에 엄마를 깨우치고 깨지게도 한다.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독립심을 키우며 엄마의 틀을 깨고 나간다. 사춘기 아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엄마처럼밖에 더 되겠어?”라고 하시던 내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부조리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온 아이는, 어리숙하고 무딘 엄마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적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세대의 원리를 알려주고,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또 바꾸어간다. 그런 나의 첫 아이가 훌쩍 커서 군대에 갔다. 입대하고 딱 1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대했던 만큼 평화롭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전쟁이 난무하고, 난 내 아이와 세상의 모든 아이를 걱정한다. 노인이 된 나의 엄마가 그렇듯이, 엄마에게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이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요람 속의 아기는 결국 우리의 스승이 된다. 주님은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돌보고 배울 존재로, 우리에게 새로이 고유한 아기를 보내신다. 그 순리의 과정에서 결국 구원으로 닿으리라 믿으며, 세상의 모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최근 많은 본당에서 어린이 수가 크게 줄어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며 신앙생활을 할 때 성당을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느낍니다. 반대로 함께할 친구가 적으면 성당은 점차 재미없는 곳이 되고 발걸음도 멀어질 수 있기에,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배우는가’만큼이나 ‘누구와 함께하는가’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모가 되어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교적이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출산이라는 현실 앞에서 미래 세대의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유연한 사목적 접근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적은 각 본당에 유지하되 어린이 미사와 주일학교만 구(區) 단위 또는 권역별로 함께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본당의 아이들이 함께 모여 미사와 교리, 다양한 활동을 함께한다면, 더 많은 친구와 함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을 더욱 기다려지는 공간으로 느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참석 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경험하고 신앙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근 이사하며 다니게 된 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에서, 어린이 사목이 아이들의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요한(요한 사도) 신부님께서는 미사가 끝난 후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자연스레 한데 어우러지십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익히며, 신앙을 기쁘고 즐거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아이들이 제대 앞으로 나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모습은 부모님들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어렵게 느끼는 대신 기쁨 속에서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인 저 또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은총을 느끼곤 합니다. 아이도 이제는 토요일이 되면 “내일 성당 가는 날이지?” 하고 먼저 묻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신부님과 함께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한 주를 기다리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먼저 식사 전후 기도를 주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는 오히려 아이를 통해 하느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어린이 사목은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기쁨을 경험하고 공동체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좋은 사례들이 교구와 본당 사이에서 더 많이 적용되고, 서로 배우며 발전할 수 있다면 한국 천주교의 어린이 사목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사목자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성당을 좋아하고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한 명의 평신도 아버지로서 이 글을 씁니다. 저출산이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도 아이들이 더 많은 친구를 만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에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제안이 한국 천주교의 미래 세대를 위한 논의에 작은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글 _ 박규식 유스티노(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 (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근대의 학문 이론은 앎과 믿음이 서로 보완하고 의존한다는 통찰에 이른다. 앎과 믿음은 고유한 영역을 지니면서도, 서로 필요로 한다. 믿음 없는 앎은 오만이요, 앎을 포기한 믿음은 맹신이다. 앎이 믿음을 요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 이성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이성의 인식 능력과 용어 파악 능력을 신뢰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 근본적인 믿음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성립할 수 없다. 둘째, 학문은 주로 경험이나 실험을 통해 얻은 통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이며, 단지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가 그랬다고 해서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며 ‘중력 법칙’을 배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공간에서 물체가 반드시 동일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100%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력의 보편성을 믿는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적 지식조차 실제로는 세계의 질서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어떤 학자도 자기의 분야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고, 동료 학자들의 정보에 기댄다. 이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의학과 과학의 발전은 이성의 실험 정신만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협력과 신뢰, 앞선 세대와 현세대의 협력과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다. 넷째, 지식은 실재의 이해에 방향을 맞추고, 원인 중의 원인이자, 개별 실재를 초월하는 존재의 마지막 원천을 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은 경험적으로 체험될 수 없고, 오직 신뢰에 기초한 인격적 관심을 요구한다. 이 마지막 원천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종교관이 달라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실재를 ‘무(無)’, ‘제일원인(第一原因)’, ‘궁극적 실재’라고 객관적으로 부르고 여기서 멈추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서성이는 철학자나 지식인이 된다. 그러나 이 실재에 대하여 ‘신(神)’,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인간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신앙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학자나 신앙인이 되며, 지식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얻게 된다. 결국 인간의 지식과 존재 추구가 그 마지막 정점에 다다르면, 이제는 증명을 넘어선 인격적 응답과 신뢰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동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 인격적 투신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가르멜의 성녀 대데레사(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큰 믿음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이라는 처절한 자기 비움을 지나, 큰 믿음을 가지고 존재의 궁극적 원천인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이들의 삶과 체험은 앎의 끝에서 시작되는 믿음이 결코 허황된 집착이 아니라, 실재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증명해 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미사 중 제대 위에는 초를 밝혀 둡니다. 전례 봉사를 하는 분이라면 평일미사에는 양쪽에 하나씩, 주일미사나 대축일에는 양쪽에 2개나 3개씩 초가 올라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스카 초(부활초)나 대림초 말고, 제대초만 7개가 올라가는 미사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미사 전례 안에서 초는 단순한 장식이나 조명이 아닙니다. “전례의 거행에는 창조(빛, 물, 불)와 인간 생활(씻음, 기름 바름, 빵을 나눔)과 구원의 역사(파스카 예식) 등에 관계되는 표징과 상징들이 포함”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9항) 빛을 밝히는 초는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초대교회부터 초가 전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엔 주로 저녁 기도 때 주위를 밝게 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다 3세기부터 장례 때, 특히 순교자의 무덤에 초를 사용했습니다. 이어 4~5세기경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예수님을 상징하는 형상들 앞에 초가 놓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초는 세상의 빛이며 부활인 그리스도, 하느님의 현존, 기도, 선행, 봉헌, 희생, 사랑, 희망, 하느님의 은총 등의 상징으로 부각됐고 교회의 전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미사에 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부터입니다. 「그레고리오 성무 집전서」에는 교황의 행렬에 앞서 각각 촛대를 든 7명이 들어왔고, 그 일곱 촛대가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제대 주변에 놓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제대 위에 초가 놓였습니다. 17세기 초반부터 미사에서 제대초 사용이 의무화되고 초의 수도 정해졌습니다. 일반 미사에는 2개, 장엄한 축일 미사에는 6개, 교구장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는 7개의 초가 사용됐다고 합니다. 7개의 초에는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묵시 1, 12-13)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대변한다는 상징이 담겼고, 또 교구장 주교가 교회의 일곱 성사를 집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미사’의 준비사항으로 “모든 거행에서 제대 위나 곁에 적어도 두 개, 또는 주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에서는 네 개나 여섯 개, 또는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일곱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 놓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17항)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는 제대의 초는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신자들이 세상 안에서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는 제대 위의 초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빛을 내 안에 잘 담아 보시면 어떨까요. 그 빛이 한 주간 생활 안에서도 은은히 빛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