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독일어 christsein)’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독일어 christwerde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본당 교적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된 우리는 모두 완성된 신자일까요? ‘신자인가? 비신자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론적인 물음에는 ‘예, 신자입니다!’라고 마땅히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신자,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참신자가 되어 ‘이제는 회개도 발전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신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하고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 더 배우고 더 회개하고 매일 조금씩 더 노력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보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 곧 나그네 살이 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christwerden) 힘껏 노력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나의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회개와 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뵙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 품 안에서 그분을 뵙고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지복직관이라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4) 이마에 이름을 적어 놓는다는 이야기는 “인장 반지를 새기듯, 그(아론, 훗날 대사제)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탈출 28,36)라는 전통에서 유래하죠. 베드로의 첫째 서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하여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의 첫째 서간 속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참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제(오늘)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가 집으로 모십니다.(루카 10,38-42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발치(발 앞)에 앉는다’는 말은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 곧 그분 제자로서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루카 8,35) 마르타가 한마디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루카 10,41-42)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곁에서 말씀 경청에 몰입하는 마리아의 몫만 좋다는 말일까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모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타의 몫은 별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선택이나 시중드는 일을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시중드는 일에만 몰두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몫이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잡아 주실 뿐이죠. 그날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고 떠나가셨을 겁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도, 그분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것도 다 그분 말씀을 듣고 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 말씀이 이미 강복이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당에서 구역이나 가정방문 때, 함께 나눌 대화나 필요한 성사와 미사 집전에보다는, 상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마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며 그분과 하나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참조) 바로 앞에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루카 10,25-28 참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가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강조됩니다. ‘행동주의(Activism)’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동 중심의 신앙생활도 결국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그분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경건주의(Pietism)’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개화(開花)의 절정은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영원하신 분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뤄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들(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하늘나라’가 공간적 개념만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는 진정 ‘우리 마음 안에’ 또는 ‘마음속에만’ 들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마음에’ 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니라 ‘너희에게(고대 그리스어로 너희 위에 또는 너희 둘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이나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주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움터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0-11) 마귀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해방되고 치유되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활동 경과를 보고하자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마귀(사탄)의 시대는 사그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마태 10,1) 신약성경에서 ‘더러운 영’은 악마, 마귀, 악령 등과 맞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령 퇴치 권한뿐 아니라, 갖가지 병자와 허약한 이들에 대한 치유 권한까지도 부여받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마태 12,28) 대신에, 루카는 병행 구(句)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루카 11,20)이라고 전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 하느님의 위력을 체험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탈출 8,15)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바로 그분 손가락이, 곧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그분의 작품이라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7-19)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경에서 찾는 불면·우울증의 치유

불면증과 우울증은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진료로 치유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은 성경에 뚜렷이 등장하는 경우를 통해 그 극복의 길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저지른 권력 남용 사례를 지난 주간에 들려드렸습니다.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부하 장수들이 잇따라 패배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찾아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1마카 6,12) 안티오코스는 다시는 유다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절망에 이릅니다. 그는 친지들을 불러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1마카 6,10)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는 불면증 호소이며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는 우울증 호소입니다. 다른 원인에서 오는 불면증과 우울증에는 치료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쟁광 안티오코스의 치료제는 ‘회개’뿐일 테죠. 그 회개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2001년 여름 전국 신학부 교수 모임 때, 통풍으로 양쪽 발이 퉁퉁 붓고 아파서, 거실에서 불과 70여m 떨어진 모임 장소조차 걸어가지를 못해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저는 2003년부터 십일조 정신으로 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또 우울감이 짙어 올 때도 자꾸만 은혜로운 일을 떠올립니다. 안경을 개발한 분들, 신발을 만들어 준 분들, 농어민, 자동차나 옷을 만들어 주는 분들, 의료진, 도로 건설, 건축가, 그리고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는 분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과 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족했던 사랑과 배려에 죄송한 마음, 이제라도 아껴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갚아드리고 싶은 마음도 차오릅니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빌어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더군요. 이같이 은혜로운 마음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 꿀잠도 자게 되고 행복한 마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입니다. 희년의 기본 정신이 다음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참된 회개는 자기 책망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설령 어둠 속을 걷고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힘에 귀 기울이며 점점 익숙해져 봅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 갈 터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누카의 유래

고대 유다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임금을 대라면, 흔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를 꼽을 터입니다. 도대체 재위 12년 동안 안티오코스의 업적이 어땠길래 그럴까요? 업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겠죠. 안티오코스는 세계화(그리스화) 정책을 펼쳤고, 모든 나라 곧 그가 지배한 주변 나라는 하나같이 그리스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 신앙을 버리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까지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당했죠. 그리스 잡신들을 공경해야 했던 겁니다. “임금(안티오코스)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안티오코스는 유다교 탄압에 열을 올리며, 특히 리시아스를 시켜 유다인 말살 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의 병력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1마카 3,35)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영토에 외국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1마카 3,36) 그즈음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의 용기를 북돋웁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고 몰살시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고는, 서로 ‘우리 백성을 폐허에서 일으키고 우리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싸우자’ 하고 말하였다.”(1마카 3,42-43) 그때 유다 군중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싸울 준비를 하며 주님께 기도 올립니다.(1마카 3,44 참조) 기도에 힘입어 전투는 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1마카 4,28-35 참조) 이와 같이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의 오른팔 격인 리시아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안티오코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물리쳤으니 올라가서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어 흠 없이 율법에 충실한 사제들로 하여금 성소를 정화하고 더럽혀진 돌들도 치워버리며 더럽혀진 제단까지도 헐어버립니다.(1마카 4,42-45 참조)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아침에 더럽혀진 성전을 새로 봉헌합니다.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1마카 4,53-54)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하던 그날은 에피파네스 임금이 성전 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2마카 6,2) 히브리어로 하누카(봉헌)라고 부르는 이 봉헌 축일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오늘날의 우리도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꺾어놓는 시련과 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누카를 기억하며 의지를 다지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말씀의 우물] 불면증과 우울증 이야기

불면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도 오랜 질병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뒤척이거나 잠 못 이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부모가 큰소리로 자주 다투면 입이 무거워지고 웃음이 차츰 엷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수까지 줄고 아예 미소까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자연히 우울감이 속마음을 짓누르게 되어, 생각도 판단도, 내·외적 성장이나 발육도 더디거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실은 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겪으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울증세가 스며듦을 느낍니다. 불면증을 뜻하는 라틴어 ‘인솜니아(insomnia)’는 본디 수면(睡眠)을 뜻하는 라틴어 ‘솜누스(somnus)’에서 유래합니다. 그 반대말로 접두사 ‘인(in-)’을 붙여서 불면증이 자연스레 ‘인솜니아(in-somnia)’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잠 못 이루다 보면 누구나 결국 우울한 마음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겪은 불면증과 우울증은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고 봅니다.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안티오코스는 신하들과 자기 측근을 불러 놓고 이릅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불면증)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우울증).”(1마카 6,10) 우울증을 뜻하는 영어 ‘디프레션(depression)’도 본디 ‘짓누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데프리메레(deprimere)’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164년까지 12년 동안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해 ‘에피파네스(신으로 나타난 자)’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도덕함과 오만함을 보고서 ‘에피파네스’ 대신에, 뒤에서는 ‘에피마네스(Epimanes, 미쳐버린 자)’라고 부르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유다 민족을 멸망시키려던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갔다. … 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 안티오코스는 이스라엘을 점령해 약탈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유다인들을 박해한(1마카 1,36 참조) 결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음과 영을 맑게 해주고 축복해 주는 음악과 그림 등이, 잠을 설치게 하는 침울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1사무 16,23) 말씀의 우물을 읽으시는 여러분 중에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실 터입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잠시 숨이라도 돌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나서의 가르침

흔히 예언서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신탁, 즉 예언자가 전해주는 하느님 말씀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에게 내렸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1-2) 그러나 요나는 말없이 주님 말씀을 등지고 야포로 가서 타르시스로 가는 이방인의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피하여 사람들과 함께 타르시스로 갈 셈이었다.”(요나 1,3) 한편, 뱃사람들과 니네베 주민들은 바삐 대비하고 행동합니다. 폭풍이 일어 생사가 위태로워지자, 선장이 배 밑창에 누워 깊은 잠에 빠진 요나에게 외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이렇게 그들은 요나에 비해 훨씬 적극적이고도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듯 움직입니다. 거친 풍랑 속에서 큰 물고기에게 통째로 먹힌 요나는 그 물고기 배 속에서 주 하느님께 있는 힘을 다해 기도드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요나 2,3) 기도 중에 요나는 깨닫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요나는 두 가지를 체험하며 배웁니다. 첫째 가르침은, 예언자로서 선포해야 할 사명이 너무 버거워서 겁에 질려 말(선포)을 못 한다 해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님 말씀이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반벙어리’가 된 요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바다도 큰 물고기도 바람도 뱃사공들도 다 덜덜 떨게 하십니다.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자, 성난 바다가 잔잔해졌다.”(요나 1,15) 이를 본 “(뱃)사람들은 주님을 더욱더 두려워하며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하였다.”(요나 1,16) 요나서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주 하느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니네베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보편 구원 의지’의 계시입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요나 3,3)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요나 4,11) 위에서 ‘사흘’은 충만의 숫자이며 ‘십이만’은 수학적 또는 통계수치를 뛰어넘는, 주님의 보편 구원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상징적 수요 구원의 숫자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읽을 적마다 더없이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인간애를 느낍니다. 요나를 살리고자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방인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니 얼마나 감동입니까? “(뱃)사람들은 뭍으로 되돌아가려고 힘껏 노를 저었으나, 바다가 점점 더 거칠어져 어쩔 수가 없었다.”(요나 1,13) 그때 사공들의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은 또 어땠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과연 그것은 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부디 저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요나 1,14)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2면

[말씀의 우물] 성결법이란?

레위기 17장부터 26장까지 나오는 ‘성결법’에 대해 잠시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성결법전으로도 일컫는 성결법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인들은 주 하느님의 거룩하심(聖性, 성성)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20,7) 성결법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성화(聖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성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먼저 짐승을 잡을 때도, 그것을 제물로 바칠 때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피든 피를 먹으면, 나는 그 피를 먹은 자에게 내 얼굴을 돌려, 그를 자기 백성에게서 잘라 내겠다. 생물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0-11) 당시에는 피를 모든 생물체의 생명(혼)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를 먹거나 함부로 다루면 생명체의 주인이신 하느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가 되므로, 이는 곧 그분께 불경죄를 짓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부부관계가 아닌 성관계나,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거나 짐승과 교접하는 일체 행위는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이런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하나라도 저지르는 자는 모두,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레위 18,29) 레위기는 이어서 주 하느님과 부모 공경은 물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나, 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경외해야 한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레위 19,2-3) 아주 큰 죄에 대한 형벌 규정을 봅니다. “제 자식을 몰록에게 바치면, 그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0,2) 사제직의 성스러움, 품위 유지에 관한 규정을 봅니다. “사제들은 머리를 밀거나, 수염 끝을 깎거나,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 된다.… 자기들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사제는 자기 하느님에게 거룩한 사람이다.”(레위 21,5-7) 제물을 성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일러,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에게 봉헌하는 거룩한 예물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어,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게 하여라.”(레위 22,2) 안식일과 축일 규정(레위기 23장 참조), 성소(聖所)와 그 유지 지침(24장)에 이어서 안식일과 희년 규정이 뒤따릅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레위 25,10-11) 옛날 이스라엘의 성결법은 주님께 성스럽게 다가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 절정을 우리는 레위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속죄일(욤 키푸르)’에 거행하는 속죄 예식에서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 해에 한 번씩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잘못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것을 너희의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라.”(레위 16,34)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화에도 그 기본 원칙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8면

[말씀의 우물] 구약의 중심 ‘신명기’

창세기에서 말라키 예언서에 이르기까지 성경 낱권은 물론 다 중요합니다. 나름의 고유한 성격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신약에서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직접 다루는 네 복음서가 제일 중요하듯이, 구약 안에서도 신명기를 ‘구약성경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이집트 탈출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전해주는 역사서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역사서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성경입니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신명기를 잇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권과 하권, 그리고 열왕기 상권과 하권 저술에도, 신학적·역사적 관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아울러 신명기계 신학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여러 예언자에게 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집니다. 신명기는 하느님 백성이 갖춰야 할 모습을 체계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신약에서도 자주 인용되며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형성에도 크게 공헌합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친 악마의 유혹에(마태 4,1-11; 루카 4,1-13 참조) 세 번 모두 신명기를 인용하시면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신명 8,3 참조)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신명 6,13 참조)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도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신명 6,5 참조) 독일 유학 시절, 예루살렘 단기 체류 유학생 선발 첫째 조건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신앙 고백문(신명 6,4-7 참조)을 히브리어로 암송해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고 행동할 출발점이며 중심입니다. 사도행전 저자도 신명기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모세의 예언직을 완성하는 참 예언자시라고 전합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사도 3,22; 신명 18,15 참조) 바오로도 주저함 없이 신명기를 인용합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로마 10,8; 신명 30,14 참조) 신명기는 부자 되고 부자나라가 되는 비법을 전합니다. “너희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이고, 너희가 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는 하여도 그들이 너희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신명 15,6) 주님 뜻대로, 그분 말씀(규정)대로 우리가 살기만 하면!(신명 15,5 참조) 선택은 이제 우리의 몫이겠지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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