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성체를 향한 인사는 ‘무릎 절’을 해야 한다?

외국에서 미사를 드릴 때 주례 사제가 제대에서 무릎을 꿇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외국인 신자가 감실을 향해 잠시 무릎을 꿇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낯선 풍경인데요. 바로 ‘무릎 절’이라는 전례 동작입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무릎 절은 오른쪽 무릎이 땅에 닿도록 꿇는 것이며 흠숭을 뜻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향한 흠숭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감실이나 성체 앞에서 무릎 절을 합니다. 또 파스카 성삼일 중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부터 파스카 성야 시작 전까지는 십자가에도 무릎 절을 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274항) 서양에서 무릎 절은 특별한 존경을 나타내는 자세였습니다. 황제와 같이 높은 사람 앞에서 사용하는 예절이었지요. 이 자세는 교회 안에서 주교나 교황에게 인사할 때도 쓰이게 됐는데요. 후에 신자들은 제대, 십자가, 성인 유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성상 앞에서도 무릎 절로 공경을 표현했습니다. 11세기에 들어서는 성체 앞에서도 이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고자 무릎 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570년 출판된 「로마 미사 경본」에 무릎 절이 포함되면서 무릎 절이 전례 안에 정착됐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평소 무릎 절을 볼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무릎 절 대신 깊은 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전례를 민족의 특성과 전통에 따라 적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헌장」은 “로마 예법의 실질적 통일성이 보존된다면, 여러 집단, 지역, 민족들을 위해, 특히 선교 지역에서는 정당한 다양성과 적응의 여지가 남겨져야 한다”면서 관할 지역 교회가 결정하고 사도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38항) 한국교회는 유럽식 인사 자세인 무릎 절이 한국의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사도좌의 인준을 받아 깊은 절로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무릎 절을 대신해 다른 전례 동작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만이 아닙니다. 일본교회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깊은 절을 합니다. 인도교회는 인도의 전통 합장 자세인 ‘안잘리 하스타’를 동반한 깊은 절로 무릎 절을 대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무릎을 굽히는 행위는 자신을 낮춰 온몸으로 순종을 표현하는 겸손과 공경의 행위입니다. 무릎 절에는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는 마음이 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실이나 성체 앞에서 우리는 주로 깊은 절로 인사하는데요. 표현은 다르더라도 무릎 절 안에 담긴 마음을 기억한다면 그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제대에 7개의 초가 올라가는 미사가 있다?

미사 중 제대 위에는 초를 밝혀 둡니다. 전례 봉사를 하는 분이라면 평일미사에는 양쪽에 하나씩, 주일미사나 대축일에는 양쪽에 2개나 3개씩 초가 올라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파스카 초(부활초)나 대림초 말고, 제대초만 7개가 올라가는 미사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미사 전례 안에서 초는 단순한 장식이나 조명이 아닙니다. “전례의 거행에는 창조(빛, 물, 불)와 인간 생활(씻음, 기름 바름, 빵을 나눔)과 구원의 역사(파스카 예식) 등에 관계되는 표징과 상징들이 포함”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9항) 빛을 밝히는 초는 무엇보다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사실 초대교회부터 초가 전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엔 주로 저녁 기도 때 주위를 밝게 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다 3세기부터 장례 때, 특히 순교자의 무덤에 초를 사용했습니다. 이어 4~5세기경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예수님을 상징하는 형상들 앞에 초가 놓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초는 세상의 빛이며 부활인 그리스도, 하느님의 현존, 기도, 선행, 봉헌, 희생, 사랑, 희망, 하느님의 은총 등의 상징으로 부각됐고 교회의 전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미사에 초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부터입니다. 「그레고리오 성무 집전서」에는 교황의 행렬에 앞서 각각 촛대를 든 7명이 들어왔고, 그 일곱 촛대가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제대 주변에 놓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세기에는 제대 위에 초가 놓였습니다. 17세기 초반부터 미사에서 제대초 사용이 의무화되고 초의 수도 정해졌습니다. 일반 미사에는 2개, 장엄한 축일 미사에는 6개, 교구장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는 7개의 초가 사용됐다고 합니다. 7개의 초에는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묵시 1,12-13)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대변한다는 상징이 담겼고, 또 교구장 주교가 교회의 일곱 성사를 집전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백성과 함께 거행하는 미사’의 준비사항으로 “모든 거행에서 제대 위나 곁에 적어도 두 개, 또는 주일이나 의무 축일 미사에서는 네 개나 여섯 개, 또는 교구장 주교가 집전한다면 일곱 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 놓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117항)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는 제대의 초는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신자들이 세상 안에서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는 제대 위의 초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빛을 내 안에 잘 담아 보시면 어떨까요. 그 빛이 한 주간 생활 안에서도 은은히 빛나길 바랍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실존하지 않는 성인이 있다?

성인전을 읽다 보면 종종 사실인지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성인이 실제 인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성 소피아(Sophia)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하고, 함께 순교했다는 세 딸, 성 피데스(Fides), 성 스페스(Spes), 성 카리타스(Caritas)는 각각 신덕(믿음), 망덕(희망), 애덕(사랑)을 뜻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 그리고 그 원천인 지혜를 공경하던 마음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추측합니다. 성 소피아만이 아닙니다.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을 어깨에 업고 강을 건넜다는 성 크리스토포로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 베로니카(Veronica)의 이름도 라틴어로 ‘참된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성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은 수건에 ‘참된 형상’,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밖에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용을 물리쳤다’는 성 제오르지오나 성 마르가리타가 그렇고, 석가모니를 연상하게 하는 성 요사팟의 이야기처럼 다른 설화를 차용한 듯한 성인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확실한 전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헌장」은 독서에 관해 “성인들의 수난 기록이나 전기는 역사적 진실성에 부합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92항) 이에 따라 1969년 개정된 전례력 축일표에는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들의 기념일이 제외됐습니다. 또한 시복시성 절차에서도 “하느님의 종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정보 탐구”(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 제2조 1항)를 중시하면서 생애·덕행·순교·명성 등을 증거와 문서로 입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인물과 행적이 아니면 성인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이런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분들이 ‘허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전승 과정에서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각색되거나 덧붙여지거나 과장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인 공경, 성인에게 청하는 전구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향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준다”면서 “성인들의 통공도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고 우리가 성인들에게 보인 사랑의 증거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지향한다”고 설명합니다.(50항 참조) 만일 성인의 전구를 단정하기 어렵더라도, 그 공경과 기도의 지향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성이 불확실한 성인의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고집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지만,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기만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성인들의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그 전승을 통해 교회가 바라본 복음적 덕과 예수님께 이르는 길이 아닐까요?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감각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감각은 단순히 신체의 기능을 넘어 이웃과 세상과 관계를 맺게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도 감각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교회헌장」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며 모든 신자에게 ‘초자연적 신앙 감각’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신앙 감각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12항, 35항 참조) 신앙 감각은 ‘무엇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해주는 감각입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성령의 도유를 받은 모든 신자가 이 신앙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 신앙 감각의 도움으로 우리 신앙을 온전히 지키고, 깨닫고, 우리 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교회헌장」 12항) 물론 공의회 이전에 신앙 감각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이끄시며, 사도들에게서 받은 신앙을 교회 안에서 보존하고 고백하게 하신다고 믿어 왔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도적 신앙을 식별하고 지켜 가기 위한 시노드의 전통도 이런 믿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최근 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도 이 신앙 감각과 깊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인 동의’라고 하니 마치 ‘더 많은 신자의 의견이 정답’이라는 다수결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신앙 감각을 단순히 신자 다수의 의견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신앙을 올바로 실천한 이들이 다수보다는 소수인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앙 감각은 ‘신앙’에 관한 일입니다. 신앙 없이 나온 의견을 신앙 감각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신앙 감각은 교도권과도 상충하지 않는데요. 교회는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교회헌장」 12항) 우리 각자에게 있는 신앙 감각은 ‘믿음의 본능’이라고도 합니다. 머리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어려울 때 본능처럼 하느님의 뜻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본능’, ‘육감’과도 같은 감각이다 보니 평소엔 신앙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잠들어 있는 나의 신앙 감각,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개별 신자의 신앙 감각’은 삶의 성화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라며 “무엇보다도 애덕의 증진”을 강조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의 습관이 신앙 감각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전례 참여, 고해성사, 교회의 사명과 봉사에 참여하는 등의 교회생활도 신앙 감각을 끌어올리는 좋은 방법입니다.(「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57항, 89항 참조)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황님은 왜 가르침을 편지로 보낼까?

레오 14세 교황님이 첫 회칙 「고귀한 인류」를 발표하시면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 교리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들이라면 ‘회칙(回勅)’이라는 용어를 자주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그만큼 교회의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이 담긴 중요한 문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회칙, 사실은 우리에게 보낸 ‘편지’라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회칙은 라틴어로 ‘리테래 엔치클리채(Litterae encyclicae)’라고 합니다. 여기서 리테래는 ‘편지들’이란 뜻입니다. ‘돌려보는 편지들’라는 뜻이지요. 문헌마다 수신자는 다릅니다만, 전 세계 주교들과 신자들 때로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입니다. 교황님의 편지는 회칙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 교서(Litterae Apostolicae), 교서(Litterae), 교령서(Litterae Decretales)라는 명칭에도 ‘편지들(Litterae)’이란 표현이 담겨있습니다. 또 ‘봉인’된 편지인 칙서(bulla)나 ‘짧은’ 편지인 소칙서(breve)를 비롯해, ‘답장’하는 편지인 답서(rescriptum), ‘직접 쓴’ 편지인 친서(chirographum) 등도 편지의 성격을 지닌 문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황령, 교령처럼 편지가 아닌 교황 문헌들도 있습니다. 또 편지라는 이름을 지닌 문헌들도 읽다 보면 아무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편지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편지임을 고수하는 것은 사도 시대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사도들은 세계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도록 도왔는데요. 모든 공동체를 직접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통해 각 공동체가 지닌 고민과 갈등에 응답하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 주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 편지들 중 중요한 편지들을 성경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 공동체에 보낸 사도들의 편지들은 오늘날 회칙이 그렇듯이 공동체 모두가 돌려보는 글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편지를 모든 형제에게 읽어 주십시오”(1테살 5,27)라고 당부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저 일방적인 규정이나 지시만을 담은 글을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편지를 받는 공동체를 “사랑하는 여러분”이라 부르며 사랑을 담아 축복하고 위로하고 굳건히 살아가도록 격려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권고는 친교와 애정 속에서 편지로 전해졌고,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듯 교황님은 편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애정을 담아 교회가 마주한 시대의 문제를 설명하고, 복음의 빛으로 성찰하며, 신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응답하도록 초대합니다. 편지를 받았다면 답장을 하는 것이 도리겠습니다. 교황님이 보낸 편지에 가장 좋은 답장은 뭘까요? 아마 그 편지에 담긴 가르침에 따른 삶의 실천이 아닐까 합니다.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계이름은 사실 기도문이다?

“이 동요 외국어로 부를 수 있어?” 어릴 적 친구들 사이에서 종종 하던 장난입니다. 이를테면 “<작은 별>을 외국어로 부를 수 있다”며 “도도솔솔 라라솔~”이라며 계이름으로 노래하곤 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장난입니다만, 이 계이름은 실제로 외국어, 그것도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심지어 이 “도, 레, 미~” 안에 교회가 오랫동안 이어 온 기도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계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11세기 이탈리아의 귀도 다레초 수사입니다. 귀도 수사는 4선 보표 체계를 만들어 음높이를 명확하게 표시하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계이름을 활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귀도 수사가 계이름을 지을 때 눈여겨 본 것이 바로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에 바치는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찬미가의 첫 부분입니다. 라틴어로 “Ut Q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ra gestorum Famuli tuorum Solve polluti Labii reatum Sancte Iohannes”라는 문구로 이뤄져있는데요. 우리말 「성무일도」에는 “세례자 요한이여 들어주소서. 위대한 당신 업적 기묘하오니 목소리 가다듬어 찬양하도록 때 묻은 우리 입술 씻어주소서”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 귀도 수사가 창안 누구나 쉽게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 찬미가 첫 음절 따서 계이름 만들어 이 찬미가는 단계적으로 음이 올라가는 형식의 노래였습니다. 여기서 다장조의 여섯 음과 순서대로 맞아떨어지는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를 각 음의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우트’는 후에 발음하기 쉽게 ‘도’로 이름이 바뀌었고, 17세기경에 일곱째 음인 ‘시’가 더해져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계이름이 완성됐습니다. 참고로 시(Si)는 성 요한(Sancte Iohannes)의 머리글자입니다. 도(Do)는 주님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찬미가를 통해 기리는 성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앞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예언자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면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이끌었지요. 계이름도 역시 계이름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귀도 수사가 계이름을 만든 것은 누구나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통해 성가대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10년에서 1년으로 줄어든다고 자신했습니다. 실제로 이제 계이름과 악보를 통해 어린아이도 쉽게 하느님을 찬미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계이름 안에는 “목소리 가다듬어 찬양하도록 때 묻은 우리 입술 씻어주소서”라는 교회의 오랜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주 미사 때는 어린 시절 배운 “도, 레, 미~”를 생각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보시면 어떨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씀하셨듯 “성가는 두 배의 기도”니까요.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성체를 모시면 죄가 사라진다?

우리는 미사를 드리기 전에 죄가 있다면 먼저 고해성사를 청하곤 합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1코린 11,27)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꼭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에서만 성체를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영성체는 우리 죄를 정화하고, 또 죄에서 보호해 준다는 것 알고 계신가요? 트리엔트공의회 교부들은 성체성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굳건하게 하는 영혼의 영적 양식이며 또한 우리를 일상의 잘못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죽을죄로부터 지켜 주는 해독제로 받아 모셔지기를 원하셨다”고 가르칩니다.(「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제2장) 이처럼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죄에 물든 인간을 치유하는 치료약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성사론」에서 “내가 계속 죄를 지으니 치료약이 늘 필요하다”면서 “언제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언제나 성체를 모셔야 한다”고 영성체의 효과를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성찬례는 성사 생활의 충만함이지만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이라고 강조하셨지요.(「복음의 기쁨」 47항)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8)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성체는 우리를 죄에서 떼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가 죄를 용서해 주는 효과가 있지만, ‘죽을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어디까지나 교회와 일치된 사람들을 위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을죄’를 용서하는 성사는 고해성사입니다. 대죄를 부르는 말인 ‘죽을죄’는 “인간이 하느님보다 못한 것을 하느님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그의 최종 목적이며 행복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5항) ‘죽을죄’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먼저 그 죄가 십계명 등에 해당하는 ‘중대한 문제’고,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으며, 이를 고의로 저지른 경우에 해당합니다. 반면 중대한 문제가 아닌 가벼운 문제에 대해 죄를 지었거나, 중대한 문제를 어겼지만 이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면 ‘용서받을 죄’, 즉 소죄입니다. 간혹 죄를 반복적으로 짓게 되니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 회의감이나 부담감을 느껴서, 미사를 드리더라도 성체를 모시지 않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체는 우리의 소죄를 씻어주고 미래의 ‘죽을죄’로부터 보호해 주는, 죄 앞에 나약한 우리를 위한 해독제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왜 성혈은 모시지 않을까?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우리가 성찬의 전례 때마다 듣는 말씀입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두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정작 미사 때 우리는 성체만 모시는지 궁금해집니다. 성혈은 왜 모시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성체와 성혈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74항) 비록 우리의 눈에는 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살이고, 또 모든 지식과 감각을 동원해도 포도주로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피라는 것을 믿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주 작은 성체의 한 조각이나 성혈 한 방울일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하고 온전하게 계신 예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체나 성혈 중 어느 한 가지 형상만을 모시더라도 “그리스도를 참된 성사로, 온전하게, 그리고 모두 다 모시는 것”이고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얻는 데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2항) 트리엔트공의회 교부들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들어 이 내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주시려고 내어주시는 당신의 몸과 피에 관해 설명하시는데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의 빵”(6,48)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교부들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고 말씀하신 분께서 또한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6,51)이라고 하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단형 영성체로도 구원에 충분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트리엔트공의회 제21회기 「영성체에 관한 교리와 법규들」 제1장) 물론 단형 영성체로도 충분하지만, 역시 양형 영성체가 성찬 잔치의 표지를 한층 더 완전하게 드러냅니다. 양형 영성체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주님의 피로 맺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이 표현되며, 성찬 잔치와 아버지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 잔치의 관계가 더욱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281항) 그래서 세례 후 첫영성체 등 전례서에 규정된 경우나 피정·영성 모임·사목 모임 등의 경우 양형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모독할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당부합니다.(교황청 경신성사부 「구원의 성사」 101항) 아무래도 성체와 달리 성혈은 분배할 때 엎지르거나 흘릴 염려가 크니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미사 때 성체의 수가 부족할 때 신부님께서 성체를 작게 쪼개서 나눠주시기도 하지요. 우리 눈에는 너무도 작은 조각이지만, 온전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를 기억하면 어떨까 합니다.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중)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방향이 다른 십자성호도 있다?

아마 신자 중에 성호경을 모르는 분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주요기도문 중 가장 먼저 배우는 기도이자, 가장 짧은 기도로, 신자들이 모든 기도와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바치는 중요한 기도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호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 말하며 오른손 손가락을 모아 이마, 가슴,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 순으로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혹시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의 순서가 바뀐 십자성호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표적으로 정교회의 십자성호가 그렇습니다. ‘성호경은 가톨릭교회만 바치는 기도 아닌가?’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호경이라 하면 가톨릭교회의 기도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등도 성호경을 바칩니다. 정교회의 십자성호는 이마, 가슴, 오른쪽 어깨, 왼쪽 어깨 순서입니다. 순서만 다른 것이 아닌데요. 정교회는 오른손의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모으고 약지와 소지는 접은 상태로 성호를 긋습니다. 모은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를, 접은 두 손가락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 방식은 정교회만의 방식은 아닙니다. 비잔틴 전례를 사용하는 일부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도 이 십자성호로 성호경을 바칩니다. 왜 다른 것일까요? 십자성호가 전해 내려오면서 다르게 변화한 까닭입니다. 십자성호는 초대교회부터 내려오는 기도입니다. 초기에는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형태의 작은 십자성호를 사용했고, 오늘날 성호경을 바칠 때 사용하는 큰 십자성호는 5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십자성호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십자성호도 함께 사용됐는데요. 변하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사제의 십자성호를 거울처럼 따라했다거나, ‘오른쪽’을 향한다는 상징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3세기 무렵 가톨릭교회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 십자성호가 보급됐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 십자성호를 두고 “우리가 비참함에서 영광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승에서 낙원으로 건너가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 안에서 ‘오른쪽’은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 선택받은 이들의 자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 거룩한 기도를 바칩니다. 십자성호는 “그리스도께 속하게 될 사람이 받는 그리스도의 날인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당신 십자가로 우리에게 얻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의미”하고 우리를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굳세게” 해줍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35·2157항 참조) 여러분은 성호경을 얼마나 자주 바치시나요? 우리의 하루를, 매 순간을 성호경으로 시작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을 가득 받으시길 바랍니다.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교회도 ‘생일’이 있다?

사람들은 태어난 날, 생일을 특별하게 여기고 기념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학교의 생일은 개교 기념일, 기관이나 단체의 생일은 설립 기념일로 부르며 해마다 챙기곤 하지요. 교회도 생일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인 ‘성령 강림 감사송: 성령 강림의 신비’를 통해 “오늘 성령을 가득히 내려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새로 세워진 교회와 모든 민족들에게… 신앙을 고백하게 하셨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세워진 교회’는 라틴어 ‘nascentis Ecclesiae’를 옮긴 말로, 직역하면 ‘태어난 교회’입니다. 오늘, 즉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회가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순 시기가 ‘40’을 의미하듯 오순절도 ‘50’을 뜻합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50일 후에 열리는 이 오순절은 보리와 밀을 수확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수확 감사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파스카 축제 뒤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전례력에서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50일째가 되는 주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던 그때는 교회가 아니었다는 건가요? 물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은 교회를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3항)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들을 뽑아 사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등 모든 활동을 통해 교회를 준비하고 세우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구원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써 교회가 태어났다고 설명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63~766항 참조) 하지만 교회의 탄생은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성령 강림이 이뤄진 오순절에 “교회는 많은 사람 앞에 공공연히 나타나,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면서 “실제로 성령 강림 날부터 사도행전이 시작됐다”고 강조합니다.(「선교교령」 4항) 교회가 성령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가까이 나아”갑니다.(「교회헌장」 4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성상 선교적”이라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교회를 파견하시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삼도록 하셨다”고 강조합니다.(767항) 교회의 생일인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가 과연 ‘선교적’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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