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말고 인간!] AI가 나를 안다? 그래도 인간만이 자기 자신을 안다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며칠 동안 비슷한 광고가 화면에 따라다닌다. 포털과 유튜브를 열면 내 취향에 맞춘 뉴스와 영상이 먼저 올라온다. 요즘은 한 해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정리해 ‘이것이 당신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서비스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정리표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이게 딱 나다. 그러나 정리표를 그린 것은 알고리즘이지 내가 아니다. 이 현상에 이름을 붙인 학자가 있다. 인도 마리안 칼리지의 지나 조셉(Jeena Joseph)은 2025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요즘 사람의 자아는 혼자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서비스를 거쳐 조립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알고리즘적 자아(Algorithmic Self)’라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이런 자아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정해진 틀에 맞춰 찍어내는 것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정리표를 기록이 아니라 자기 모습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이 정리표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은 그것을 나의 전부로 믿어버리는 순간 시작된다. 조셉은 이런 예를 든다. 매일 아침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보여 주는 수면 점수 하나로 컨디션을 판단하다 보면, 몸이 실제로 느끼는 감각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나를 아는 방법이 몸의 느낌 대신 화면 속 숫자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한번 그려지면 스스로 굳어진다. 내성적이거나 기운이 없다고 분류되면 같은 성격의 내용만 계속 돌아오고, 점점 그 틀 안에 갇힌다. 조셉은 이런 과정을 ‘정체성의 피드백 루프’라고 부르며, 사실상 악순환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원래 이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기록을 확인하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고, 틀렸을 수도 있음을 견디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무엇을 눌렀는지는 알아도, 왜 그 순간 마음이 흔들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혈액형이 성격을 말해 준다고 믿었다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름보다 먼저 MBTI 네 글자를 묻는다. 방법은 달라졌어도 원하는 것은 같다. 나를 어떤 틀에 넣어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다 보면, 정작 자신의 모습이 그 틀과 어긋날 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규정당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알고 싶은 마음은 닮아 보이지만 다른 곳을 향한다. 앞의 것은 나를 틀에 가두고 안심시키지만, 뒤의 것은 그 틀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수고를 요구한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기록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기록에 담기지 않는 부분을 끝까지 붙드는 일이다. 실패했던 순간, 이유 모를 눈물, 까닭 없이 마음이 끌렸던 얼굴. 이런 것들은 어떤 정리표에도 나오지 않지만, 바로 이것들이 나를 나로 이해하게 만든다. 내일도 AI는 당신에 대한 정리표를 건넬 것이다. 그대로 받아 들 것인가, 자기 손으로 다시 그릴 것인가. 그 답을 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뿐이다.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선택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결단한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생사가 걸린 결정이라면, 그 버튼 앞에서 사람은 멈춘다. 손이 떨리고, 마음은 수백 번 오간다. 그것이 결단이다. 인공지능(AI)은 그 버튼을 찰나에 누를 수 있다. 그 속도는 탁월함이 아니라 ‘무게’를 모른다는 증거다. 오늘날 생성형 AI는 선택의 형식을 띤다. 추천 알고리즘은 무엇을 볼지 고르고, 의료 AI는 어떤 치료를 내놓을지를 판단한다. 이 과정을 우리는 습관처럼 선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최적화다. 데이터 안에서 오류가 가장 적은 답을 골라내는 작업일 뿐이다. AI의 선택에는 떨림이 없고, 망설임도 없으며, 이후의 무게도 없다. 선택은 틀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내리는 행위다. 최적화는 답을 고르지만, 결단은 삶을 건다. 벨기에와 프랑스 출신으로 구성된 연구진은 2025년 4월, 사관생도들을 전장의 드론 조종사로 만들었다.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민간인 피해 위험이 도사린 상황에서 생도들은 AI의 권고와 함께, 때로는 홀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공격을 부추기는 AI, 공격을 만류하는 AI, 그리고 아무 말도 않는 조건. 결과는 선명했다. 생도들의 판단은 AI의 성향에 뚜렷하게 끌려갔다. 더 놀라운 것은, AI와 함께할수록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결정은 자신이 내렸는데도 AI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 결정이 아닌 것 같다’는 감각이 생겨났다. 내가 결정했지만 내가 결정한 것 같지 않다. AI가 책임을 가져간 것도 아닌데, 내 책임감은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이것은 전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느 길로 갈지, 무엇을 살지. 그 작은 결정들이 하나씩 알고리즘에 넘어갈수록, 결단하는 힘은 오랜 시간 벼리지 않은 칼처럼 무뎌진다. 전쟁터의 사관생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 조금씩 결단을 반납하고 있다. AI는 선택하지 않는다. 계산한다.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 결과를 감당하지 않는다. 틀려도 괴롭지 않고, 옳아도 안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결단은 다르다. 선택했다는 것은 그 결과를 내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이 내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무게를 기꺼이 지는 것. 그것이 결단이다. AI에게 선택을 넘길수록 책임도 함께 흩어진다. 결과가 좋으면 내 덕, 나쁘면 AI 탓. 그렇게 책임의 언어가 우리 삶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결단의 본질은 정확성이 아니라 감당이다. 누구를 사랑할지, 무엇을 위해 살지, 어느 길을 걷겠는지. 이 물음들은 데이터가 대신 답해 줄 수 없다. 그 자리에 AI를 앉혀 두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포기다. AI는 효율을 줄 수 있지만, 의미는 줄 수 없다. 결단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서명하는 방식이다. 그 서명을 알고리즘에 넘기는 순간, 삶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의 마지막 결단, 그것은 온전히 당신이 진 무게였는가.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6면

[AI 말고 인간!] AI가 생각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사유한다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진단을 내리는 시대, 우리는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 인간은 도구의 부산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목적이다. 새 연재 ‘AI 말고 인간!’을 통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묻고 답한다. ‘AI가 ~한다? 그래도 인간만이 ~한다.’ 앞 절은 AI가 던지는 도전이고, 뒷 절은 그에 맞서는 인간의 반격이다.​​​​​​​​​​​​​​​​ 요즘 우리가 즐겨 쓰는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질문을 던지면 즉각 답이 온다. 문장은 유려하고, 논리는 그럴듯하며, 분량도 충분하다. 그 답을 받아 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느낀다. ‘이것이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그러나 기계가 말을 배운 이 시대에, 우리가 정작 잃어버린 것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다. 스웨덴 룬드대학교와 영국 런던 위생·열대의학대학원 공동 연구팀은 2026년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이 개념을 정밀하게 해부한다. 대형언어모델은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해 다음에 올 단어를 확률적으로 골라내는 장치다. 언어의 형식을 정교하게 모방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하며,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문장을 이어 붙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지식의 환상’이라 부른다. AI의 출력이 유창하기 때문에 사용자는 그것을 진짜 이해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AI는 다시 사용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답을 맞춰가고, 검증 대신 동조, 질문 대신 확인.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우리의 사유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나아가 연구팀은 AI가 우리의 지식만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적 오류까지 증폭시켜 되돌려준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AI에게서 정확한 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자신의 편견을 더 그럴듯한 형태로 돌려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사유는 질문에 즉각 답하는 능력이 아니다. 질문을 오래 품는 능력이다. 어떤 문제 앞에서 멈추고, 스스로와 논쟁하며,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통과하며 비로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인간의 사유다. AI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틀릴 수 있다는 불안을 안고도 계속 생각하는 것, 자신의 답을 의심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유의 본령이며, 인간이 AI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인간의 사유는 바로 그 불안과 버팀의 자리에서 깊어진다. AI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AI의 언어 생성과 인간의 사유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혼동이 위험한 까닭은 AI를 과대평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과소평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묻고, 받고, 소비하고, 넘어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스스로 흔들리는 법을 서서히 잊어간다. 편리함이라는 마취제 아래 사유의 근육이 조용히 약해진다. AI에게 편리함을 빌리되 사유만큼은 내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유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버티는 것,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 두는 것.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의 자리이며, 그것을 잃는 것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문제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언제, 답을 찾지 않고 질문 안에 오래 머물렀는가. 글 _ 최홍규 안토니오(EBS 디지털교육기획부 연구위원, 미디어학 박사)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우리 사회가 미래 기술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주요 저서로 「AI 기반으로 재편되는 인터넷 사회의 특징과 필요 역량」, 「방송의 진화」, 「소셜 빅데이터를 활용한 미디어 분석 방법」, 「콘텐츠 큐레이션」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