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3) 가톨릭신문이 전한 순교성지 절두산 60년

2026년은 병인박해가 시작된 지 160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절두산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성지로 자리하고 있지만 60여 년 전 모습은 사뭇 달랐다. 가톨릭신문의 옛 지면을 펼치면 허허벌판 순교 터가 성당과 박물관을 갖추고 성지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1964년 9월 13일자 ‘순교성지를 찾아서-절두산’은 당시 절두산을 “잡초만 우거진 한강 변 절벽 위에 ‘가톨릭순교성지’의 기념탑이 홀로 서 있다”고 전했다. 순교자현양회가 대지를 마련하고 1962년 기념탑을 세웠지만 지금과 같은 성지의 모습은 아직 없었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앞두고 변화가 시작됐다. 1965년 10월 3일자에는 병인순교 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회비 모금을 위해 발행한 용지 2000매가 모두 배포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어 1966년 1월 16일자 ‘절두산에 순교기념성당 착공’은 1965년 12월 31일 열린 기공식과 복자성당·기념관 건립 계획을 보도했다. 병인순교 백주년 기념사업회는 총 공사비 3000만 원을 목표로 모금에 나섰고, 당시까지 모인 돈은 150여만 원이었다. 3000만 원은 소비자물가 상승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약 12억4000만 원에 해당한다. 성당 건립에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모였다. 1967년 1월 22일자 ‘사형수의 성금 복자성당 기금으로’에는 서울교도소 사형수 조일용 씨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는 고향 부모에게 보내려던 영치금 1000원 전액을 1월 11일 절두산 순교기념성당 건립비로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조 씨는 이틀 뒤 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문은 서울대교구 주교관 재경부장 경갑룡(요셉) 신부가 고인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그해 가을 마침내 성당과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1967년 10월 29일자 지면은 절두산 순교자기념성당과 복자기념박물관이 완공돼 10월 21일 윤공희(빅토리노) 주교 주례로 축복식이 거행됐다고 전했다. 불과 3년 전 기념탑만 홀로 서 있던 곳에 성당과 박물관이 들어선 것이다. 성지가 조성되자 순례자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1968년 10월 6일자에는 도림동본당 신자 600명이 9월 29일 성당에서 절두산까지 20리 길을 걸어 순례한 소식이 실렸다. 1968년 10월 3일에는 시복경축중앙위원회와 가톨릭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전국 1167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1968년 10월 6일자 ‘순교정신 현양사업 어제와 오늘’ 좌담회에서는 절두산 기념관에 보관할 교회 유물을 더 수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어 1970년 8월 23일자는 순교자 유품을 모으는 운동을 소개했다. 이 지면은 2017년 절두산순교성지 축성·봉헌 50주년 특별전에도 전시됐다. 1984년 5월 3일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김포공항 환영 행사를 마친 뒤 첫 방문지로 절두산을 찾았다. 가톨릭신문은 교황이 성해실에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둘러보고 기도와 분향을 한 뒤 참석자들과 한국어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고 전했다. 이후 절두산 순교성지의 정비와 변화도 지면에 꾸준히 기록됐다. 1997년에는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가톨릭신문은 2000년 9월 3일자에 순교자 기념광장과 교회사 유물공원 등을 조성하는 ‘절두산 순교 성지 종합발전 계획’을 담았다. 2009년 9월 13일자는 전시공간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문을 연 박물관의 모습을 전했다. 병인박해 150주년이던 2016년에는 특별전 ‘병인년 땅의 기억’을 통해 병인박해와 절두산의 역사를 다시 조명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올해에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특별전 ‘양화나루와 잠두봉 이야기’(2026년 8월 16일자)를 소개했다. 1964년 가톨릭시보가 ‘잡초만 우거진’ 곳으로 소개했던 절두산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신문 지면에 차곡차곡 남아 있다.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2) 가톨릭신문 속 그때 그 사람들

가톨릭신문은 창간 99년이라는 오랜 역사 안에서 여러 인물의 발자취도 기록해 왔다. 오늘날 교황과 주교, 사제를 양성하는 대신학교장 등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는 이들도 과거에는 한 명의 사제, 수도자, 신학생으로 가톨릭신문에 등장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이들의 ‘그때 그 시절’을 살펴본다. 레오 14세 교황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다섯 차례 한국을 찾았다. 가톨릭신문은 2002년과 2005년 수도회 한국지부 방문, 2010년 수도회 한국 진출 25주년 기념행사 참석 당시의 소식을 알렸다. 2002년 1월 27일자는 “수도회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가 내한했다”며 “한국지부의 청소년 사목·영성 상담·피정 지도 등의 사도적 활동 현장을 둘러보고 회원·재속회원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2010년 10월 10일자도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를 비롯한 각국 장상들과 회원 250여 명이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군종교구장 서상범(티토) 주교는 군종 사제로 동티모르에 파견돼 있던 1999년, 여러 차례 현지 상황을 전했다. 당시 서 신부는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투 병력이 해외에 파병된 상록수부대의 일원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서 신부는 가톨릭신문을 통해 동티모르 현지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독자들의 응답에 서 주교는 1999년 12월 26일자에 실린 편지로 “가톨릭신문사의 적극적인 홍보에 힘입어 동티모르 형제자매들이 성금과 구호품을 받았다”며 “옷·신발·영양제·분유·세탁비누·학용품 등 요긴한 물품들이 도착하고 있어, 우리의 기도와 사랑의 마음에 감격해하고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서 주교는 2000년 4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21년 6개월간 해왔던 군 사목을 마무리 지을 때도 인터뷰로 소회를 밝혔다. 2012년 12월 16일자는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 때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 주교의 말을 인용했다. 이후 서 주교는 2021년 4월 9일 제4대 군종교구장에 착좌해 군 사목으로 돌아왔다. 사제가 되기 전의 모습도 담았다. 가톨릭신문은 1994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민범식(안토니오) 신부의 소감을 실었다. 1994년 1월 16일자는 “권위 있고 엄숙한 신부님보다는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민 신부의 포부를 전했다. 꿈꿨던 모습의 사제가 된 민 신부는 2025년 2월 18일부로 제20대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장에 임명됐다. 취임을 앞둔 2025년 3월 16일자 인터뷰에서 민 신부는 “앞으로는 성소자와 양성자 간의 ‘밀접 동반’으로 변화를 꾀하며 사제 양성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1) 가톨릭신문 속 세계청년대회(WYD)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가 1년 앞으로 다가왔다. 가톨릭신문은 WYD의 탄생과 초기 대회부터 2027 서울 WYD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독자들에게 전해왔다. WYD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5년 제정한 ‘세계 젊은이의 날(World Youth Day)’에서 비롯됐다. 이와 관련해 1984년 9월 9일자는 교황이 1985년을 계기로 젊은이의 역할을 강조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1983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구원의 특별 희년 동안 젊은이들이 보였던 큰 반향과 국제연합(UN)이 1985년을 ‘국제 젊은이의 해’로 선포한 점을 근거로 꼽았다. 실제로 1985년 4월 21일자는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 청소년대회 행사 중 교황이 젊은이들에게 평화의 건설자가 돼 줄 것을 요청했음을 보도했다. 제1차 WYD에 관한 보도도 있었다. 1986년 3월 16일자는 같은 해 3월 23일 열릴 제1차 대회를 앞두고 교황이 각국 주교회의에 WYD 행사를 열 것을 당부한 소식을 조명했다. 기사는 교황청 평신도협의회(현 평신도가정생명부)의 공문을 인용해 “제1차 WYD 주제는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며 “이는 교회가 젊은이들에게 품고 있는 ‘으뜸가는 첫째 소원’”이라고 전했다. 초기 WYD는 참가자들의 수기로 전달했다. 1991년 폴란드 체스토코바 WYD는 9월 1일자에 오스트리아 빈대학 남현주(모니카) 씨와 최승석(마태오) 씨의 참가기로 “교회는 인류를 위한 기둥이고, 무력보다 기도·희생이 주님 뜻임을 체험했다”고 밝혔다. 1993년 미국 덴버 WYD는 9월 26일자·10월 3일자에서 한은실(프란치스카) 씨의 글로 ‘한 믿음’을 체험한 대회였다고 소개했다. 아시아 최초 WYD였던 1995년 필리핀 마닐라 대회부터는 본지 기자가 현장에 파견돼 소식을 전했다. 1995년 1월 15일·22일·29일자에 걸쳐 마닐라 WYD의 현장 모습, 이모저모, 인터뷰, 사설, 취재기 등을 담았다. 사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회에 직접 참가한 것은 한국교회의 앞날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대역사”라며 “앞으로도 다양한 신앙체험으로 성숙을 도모하면서 언젠가 한국교회가 주관할 WYD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평했다. 한국교회의 염원이 이뤄진 현장도 기록했다. 2023년 8월 6일 포르투갈 테주 공원에서 봉헌된 포르투갈 리스본 WYD 파견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 서울을 차기 대회 개최지로 발표했음을 알렸다. 2023년 8월 13일자는 “교황이 ‘꼬레아, 서울’을 호명하자 한국 순례단 전원이 태극기를 흔들며 기쁨의 함성을 쏟아냈다”며 “교황 앞 제대 위에는 대형 태극기를 펼쳐 든 한국 참가단 10여 명이 등장해 환호했다”고 전했다.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0) 10호, 1000호, 3000호…지면에 남은 이야기

가톨릭신문이 7월 19일 3500호를 발행했다. 지난 99년간 가톨릭신문은 100호, 500호, 1000호 등 기념비적인 호수(號數)마다 ▲소식보도 ▲보조일치 ▲조국성화의 창간 사시(社是)와 이념을 성찰하며, 미디어 사도직의 사명을 되새겨 왔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주간지인 가톨릭신문은 이미 제5000호를 넘어섰어야 한다. 그러나 제73호(1933년 4월 1일자)를 끝으로 휴간한 뒤 16년 만에 제74호(1949년 4월 1일자)로 복간하면서 발행이 오랫동안 중단됐다. 창간 초기에는 월간과 월 2회 발행을 거쳤으며, 제210호(1960년 1월 3일자)에 이르러서야 주간지로 전환된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휴간과 한국전쟁 등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제100호(1951년 12월 1일자)는 ‘본보가 100호에 이르기까지’ 제목의 기사로 그 의미를 전했다. 기사는 “전국 5개 교구장 회의의 결의에 따라 교회 출판물을 서울에서만 발행하기로 한 결정에 눈물을 머금고 휴간하던 당시의 심정을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며 “창간 때부터 함께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늘에서 제100호를 함께 기뻐하고, 앞으로 제1000호, 제1만 호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길 청한다”고 밝혔다. 제500호(1965년 12월 25일자)는 신문사의 연혁을 정리하고, 창간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6년 만에 발행 부수가 2600여 부를 기록했음을 알렸다. 기사는 “체제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천주교회보’가 우수했다”며 “저 멀리 하와이에 있는 교포들에게까지 읽힌다”고 실었다. 제1000호(1976년 3월 7일자)는 특집 좌담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한국교회의 쇄신 움직임과 가톨릭신문의 수난사를 함께 담았다. 공의회 이후 10년을 돌아본 기사는 “교회의 토착화는 복음화의 관건이고, 대화를 바탕으로 조화롭게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쇄신을 개혁으로 혼동하지 말고, 사랑으로 일치된 초기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고(故) 윤광선(비오) 전 편집국장의 기고로 회고한 기사는 제1000호에 다다르기까지 있었던 어려움을 사명감 하나만으로 극복했음을 조명했다. 창간 69주년에 이어 맞이한 제2000호(1996년 4월 28일자)는 창간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날 것을 요청했다. 기사는 “제2000호는 한국 가톨릭 언론의 맥을 오랜 기간 이어온 언론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며 “한국교회의 눈과 귀, 입과 손의 역할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정론을 선도하고 펼쳐가는 가톨릭신문의 절체절명의 사명”이라고 다짐했다. 기념비적인 제3000호(2016년 6월 26일자)도 그간 발행한 지면으로 한국교회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며, “이 땅에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를 알리는 미디어 사도직을 수행해 왔다”고 짚었다.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9) 가톨릭농민회와 함께한 60년

한국교회는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은 농산물 생산에 힘쓰는 농민의 노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살도록 이끈다. 가톨릭신문이 전해 온 농민 주일과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자. 농민 주일은 1995년 시작됐다. 1995년 10월 29일자는 주교회의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와 가농의 요청에 따라 농민 주일을 제정한 소식을 지면에 실었다. 당시 사설은 “7월 셋째 주일로 정한 것은 도시민과 소비자들이 여름휴가와 방학 등을 이용해 농민과 쉽게 만날 기회를 갖자는 취지”라며 “이날은 한국교회가 농민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 외에도 산업화와 물질문명의 극심한 폐해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농민 주일 제정을 이끈 가농은 1966년 ‘가톨릭농촌청년회(JAC)’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1966년 10월 23일자는 1925년 벨기에 루뱅에서 시작된 JAC가 한국에도 발족했음을 전하며, “농촌 생활개선·계몽·교육이 복음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또 1971년 12월 5일자는 JAC가 ‘한국 가톨릭 농민회’로 개칭하고, 연령과 종교 제한이 없는 범 농민운동으로 거듭났음을 조명했다. 가농은 1976년 주교회의 인준과 창립 10주년을 함께 맞았다. 1976년 11월 7일자는 “농민들은 팔도 지방 농업 특산물을 봉헌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하느님께로 바침으로써 신앙을 재확인했다”며,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의 말을 인용해 “산업 구조상 다른 직종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농민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계속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응답해 가톨릭신문은 농민의 생존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1986년 4월 27일자는 안동교구 가농이 농업 희생 정책으로 소외된 농민을 위한 농가부채 탕감대회를 열었음을 짚었다. 1991년 8월 18일자는 “가농이 중심이 되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우리의 식탁을 우리 것으로 차리자는 민족자주생활운동이기도 하다”고 했다. 가농은 사회 문제에도 나섰다. 1985년 8월 11일자는 “전주교구 가농이 주관한 구속 농민 석방을 위한 행렬 중 경찰이 십자가를 탈취했다”며 “십자가가 훼손되고, 문규현(바오로) 신부를 비롯한 가농 회원 등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또한 1987년 11월 15일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야권 후보단일화를 위한 단식 농성과 쟁취대회를 개최해, 군부독재 정권 종식을 요구했음을 알렸다. 창립 60주년인 올해도 기념미사 봉헌과 공동결의문 발표 소식을 담았다. 2026년 2월 8일자는 “공동결의문에서 기후위기의 고통에 응답하며 땅과 생명을 살리는 농민운동을 이어가고, 생명의 밥상을 지키는 신앙인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8) 가톨릭신문 속 ‘대건’

한국교회는 매년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며 신심미사를 봉헌한다. 이날은 한국교회의 첫 사제로서 복음화를 위해 힘쓰다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박해의 역사를 딛고 한국교회가 세워졌음에 감사드린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가톨릭신문 창간 이전에 열린 시복식인 만큼 당시 지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가톨릭신문은 1928년 9월 1일자에서 시복 3주년의 의미를 조명했다. 기사는 “79위 복자의 간절한 전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성심을 움직여 우리나라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행복이 내려오도록 하자”며 “틈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하루빨리 성인품에 오르시도록 청하자”고 당부했다. 이때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다. 김 신부는 한국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은 5월 6일자 호외를 통해 시성식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기사는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순교자를 성인 명부에 올리고, 이분들을 다른 성인과 함께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라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순교 선열들을 기리고, 신앙을 본받아 진리의 증거자가 될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신문은 김 신부의 신앙이 후손들의 삶 안에서 이어진 모습도 조명했다. 2003년 3월 30일자 「김대건 신부의 후손 ‘천주교 성인공파’」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배출한 가문이 ‘천주교 성인공파’로 독립 분파를 이룬 의미와, 후손들이 박해의 기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온 삶을 소개했다.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 희년의 의미와 주요 행사도 집중 조명했다. 희년 개막에 맞춰 보도한 2020년 11월 29일자 기사는 “희년 선포는 성 김대건 신부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된 사실과 더불어 그가 한국교회를 넘어 보편교회 속 신앙의 모범으로 뚜렷이 인식되고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김 신부의 이름과 관련한 특집도 마련했다. 2021년 8월 29일자에는 ‘제가 김대건 신부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대전교구 김대건(베드로) 신부와 광주대교구 김대건(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인터뷰를 실었다. 기사는 “김대건 신부님처럼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신부로 살고 싶다”는 두 사제의 포부를 전했다. 이 밖에도 김 신부의 영성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들을 소개했다. 2016년 7월 3일자는 김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성지와 성당들을 종합해 다뤘고, 2021년 3월 7일자는 김 신부의 이름을 담은 국내외 도로명을 안내했다.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7) 가톨릭신문 속 북한교회

한국교회는 매년 6월 25일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낸다. 한반도 분단의 현실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고, 6월 17일부터 미사 전후로 9일 기도를 바친다. 81년이라는 오랜 분단의 역사만큼, 가톨릭신문은 6·25전쟁 전부터 현재까지 북한교회의 소식을 전하며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가톨릭신문은 분단 이전 북한교회 모습도 담았다. 1931년 6월 1일자(제51호)는 평안북도 중강진본당 신설 소식을 알렸다. 기사는 “이곳에는 4~5년 전 처음으로 교우가 생겼으나,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지역이어서 그동안 사목자를 모실 수 없었다”며 “남녀 교우들이 중심이 돼 신부의 부임을 환영했다”고 밝혔다. 1932년 10월 1일자(제67호)는 평양본당에 스카우트의 전신인 가톨릭 소년군이 창립됐다고 보도했다. 한국전쟁 당시 참상도 상세히 실었다. 1950년 11월 10일자(제84호)는 전쟁 발발 이후 순직하거나 납치된 성직자의 현황을 소개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1951년 1월 14일자(제85호)는 1950년 11월 1일 국군이 압록강을 진격한 소식과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수복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아쉬움을 기록하고 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과 관련한 소식을 전했다. 휴전 이후에는 종교 탄압을 겪는 북한교회를 위한 기도를 요청했다. 1960년 4월 3일자(제223호) 사설은 “북한 신자들은 분명 판공성사를 떠올릴 것이고, 지난날의 본당 신부를 그리워할 것이며, 부활이 가까워졌음을 알려 주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례를 기억할 것”이라며 “북한에 남아 있는 교우들을 잊지 말자”고 당부했다. 북한 땅에서 봉헌된 분단 이후 첫 미사의 감격스러운 순간도 취재했다. 가톨릭신문은 1985년 9월 22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당시 원주교구장이던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주례한 한국순교성인 대축일(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 현장을 찾았다. 9월 29일자(제1474호)는 지 주교의 “해방 직후 모든 성직자가 순교해 40년간 미사가 없었던 평양에서 미사를 집전하게 돼 의미가 깊다”며 “103위 순교성인과 무수한 순교자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올 것이라 기대한다”는 강론을 인용했다. 또한 지 주교가 여동생 지용화 씨를 37년 만에 상봉한 일도 덧붙였다. 이후 북한 유일의 성당인 평양 장충성당이 1988년 준공된 소식(1989년 3월 12일자, 제1646호), 미국 가톨릭 관광단의 장충성당 방문기(1989년 4월 2일자, 제1649호)도 게재했다. 이 밖에도 남북 신자 첫 통일세미나(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창무(안드레아) 대주교의 한국 고위 성직자 첫 북한 사목방문(1988년)을 비롯해 한국교회 주교단의 방북, 평양 ‘평화봉사소’ 축복식, 남북 정상회담 등도 기사에 담았다. 올해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1500차 미사를 기념하는 소식을 보도하고, 북한이 남북을 두 국가로 규정한 헌법 개정과 통일부가 발간한 「2026 통일백서」를 교회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남북 관계의 길을 모색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6) 가톨릭신문 속 월드컵

2026 FIFA(국제축구연맹) 북중미 월드컵이 6월 11일 개막해 7월 19일까지 이어진다. 한국 대표팀도 6월 12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체코전을 시작으로 장정에 오른다. 월드컵이 명실상부한 지구촌 축제로 불릴 정도로 관심을 끄는 스포츠 이벤트인 만큼 그동안 가톨릭신문도 월드컵에 관한 기사를 꾸준히 보도해 왔다. 가톨릭신문에서 찾을 수 있는 첫 월드컵 보도는 1982년 6월 27일자(제1311호)에 실린 기사다. 당시 기사는 스페인교회 주교단이 1982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한 24개국을 환영하며 “일치된 형제애에 공헌하길 바란다”고 당부했음을 전했다. 같은 해 8월 1일자(제1316호)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의 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당시 기사에는 “수천 명의 로마 시민들이 이탈리아 국기를 몸에 두른 채 모든 분수대로 뛰어들었다”며 “7월 12일 산드로 페르티니 대통령이 퀴리날리궁에서 선수단에게 오찬을 베푸는 동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화를 걸어 이탈리아 선수단의 훌륭한 승리에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한국이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1986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자, 가톨릭신문은 1985년 11월 10일자(제1480호)에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인들의 숙원이자 민족의 숙원이었다”며 “이 순간 거짓과 시기와 증오는 사라졌다”고 기쁨을 표했다. 반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벨기에에 패하자, 1면에 연재되던 신앙·시사 비평 칼럼 ‘걸림돌’을 통해 “한국팀에 대한 기대와 예상이 빗나가면서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을 것”(1990년 6월 17일자(제1709호))이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온 국민이 열광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보도가 가장 활발했다. 개막을 앞둔 2002년 3월 31일자(제2292호)에서는 창간 75주년 특집 ‘월드컵과 교회’를 통해 축구와 교회의 다양한 관계와 축구를 매개로 한 선교 방안을 제시했다. 전국 교구의 손님맞이 준비 현장도 전했다. 5월 19일자(제2299호)는 “서울대교구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선수들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대회 기간 중 매 주일 세 곳에서 외국어 미사를 거행한다”며 “한국교회와 명동성당을 소개하는 책자를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전주교구에서는 셔틀버스와 문화 행사 등을 준비하고, 수원교구에서는 무료 민박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회 기간 중 재미난 일화와 응원 열기도 조명했다. 6월 30일자(제2305호)에서는 가톨릭신문사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가 준비한 ‘주 5일제’ 관련 학술 포럼이 한국과 스페인 간의 8강 경기 시간과 겹쳐 부득이하게 연기된다고 밝혔다. 전국 각 교구·본당·수도회 응원 현장의 열기를 취재하기도 했다. 기사에서는 “몇몇 수녀들은 경기를 관람하지 않고 성당에서 승리의 기도를 바쳤고, 대부분은 끝날 때까지 묵주기도로 한국의 선전을 기원했다”고 묘사했다. 7월 7일자(제2306호)는 수원교구가 ‘월드컵을 화해와 평화의 운동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북한 어린이들에게 축구공 2002개를 선물한 소식도 전했다.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5) 교회가 바라본 불교

5월 24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한국교회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자리 잡은 불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불교의 경축일을 맞아 매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가톨릭신문이 보도한 부처님 오신 날 축하 메시지와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첫 축하 메시지는 1987년 5월 10일자(제1554호)에 보도된 하느님의 종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축전으로 추정된다. 기사는 김 추기경이 “조계종 성철 종정에게 ‘석존탄신의 뜻깊은 날을 맞아 자비의 가르치심이 겨레와 온 누리를 화평의 길로 이끌어 주기를 마음으로 축원하며, 종교인 모두가 나눔과 섬김으로써 인류의 참 생명에 헌신할 다짐을 하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고 밝혔다. 또한 1997년 5월 18일자(제2053호)는 종교 간 일치를 위한 김 추기경의 노력이 매년 지속돼 왔음을 알리고 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 평의회(현 종교간대화부)는 1995년부터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은 1996년 5월 19일자(제2003호)에서 당시 평의회 의장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이 사랑의 문화를 만들기 위한 종교 간 상호협력을 제의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종교간대화부는 올해 5월 1일에도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위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부는 올해 5월 1일 ‘무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평화를 위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제목의 메시지를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제이콥 쿠바카드 추기경 명의로 발표했다. 한국교회는 2000년 첫 공식 메시지를 발표했다. 2000년 4월 30일자(제2198호)는 당시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장이던 고(故) 최기산(보니파시오) 주교가 불교계에 축하 메시지를 전했음을 보도했다. 아울러 기사는 “교황 또는 주교 개인 명의로 메시지를 발표한 일은 있으나 한국교회가 주교회의 차원에서 경축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새천년을 맞아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종교 간 대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가톨릭신문은 이처럼 타 종교와 친교를 형성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이 있다고 풀이한다. 고(故) 한스 큉 신부의 기고로 공의회의 성과를 논한 1966년 4월 10일자(제514호)는 “교회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고 해도 타 종교의 영성·윤리·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증진해야 한다”며 “교회는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교를 존중한다”고 평했다. 또한 공의회 문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를 바탕으로 1968년부터 1969년까지 8회에 걸쳐 ‘대화를 위한 시리즈 - 자비에 관하여’를 연재했다. 가톨릭신문은 2024년부터 ‘이웃종교 만남’ 지면을 통해 불교계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종교인들의 활동상과 종교 간 친교를 위한 노력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4) 가톨릭신문이 전한 성모 신심

5월은 성모 성월이다. 162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제정된 이후 교회는 이 시기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고 특별한 은총을 청하며 공경을 표한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삼고 있는 한국교회는 태동기부터 특별한 성모 신심을 간직해 왔다. 가톨릭신문이 전한 한국교회의 성모 신심을 돌아보자. 가톨릭신문의 첫 성모 신심 보도는 1928년 8월 1일자(제17호)로 추정된다. 당시 기사는 “세상에는 천주교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기보다 성모 마리아를 존경한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성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첫째는 하느님의 어머님, 둘째는 영원한 동정, 셋째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1920년대부터 올바른 성모 신심에 관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 온 가톨릭신문은 한국교회 성모 신심이 박해 시기인 19세기부터 형성돼 있었음을 밝힌다. 1996년 5월 5일자(제2001호)와 2004년 8월 15일자(제2411호) 등에서는 박해 당시 순교자들이 묵주 기도에 의지했으며, 압수된 물품 중에는 묵주, 성모 상본 등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성모 신심 단체의 활동도 여러 차례 소개했다. 1953년 발행된 지면들에서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운동을 안내하고, 도입 소식을 알렸다. 같은 해 5월 15일자(제125호)는 “성모님의 ‘죄인들의 회개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에 응답하는 운동이 곧 푸른 군대”라며 “회원은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고 희생하며, 죄를 멀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1974년 5월 19일 파주 자유의 다리에서 개최된 ‘제1회 통일 기원 기도회’ 소식도 지면에 실었다. 1962년 12월 16일자(제355호)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창설 10주년을 기념해 1953년 7월 28일 광주대교구 목포 산정동본당에서 첫 쁘레시디움이 조직된 사실과 이는 기도와 활동으로써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채로운 성모 성월 행사도 보도했다. 1949년 6월 1일자(제76호)에는 대구대교구 계산동 주교좌본당 학생들이 성모상 행렬에 참여한 소식이 담겨있다. 기사는 “성모 성월을 기념해 성모님께 꽃다발을 봉헌하고, 성가 제창과 공동 기도를 드린 후 행렬에 들어갔다”며 “이날은 북한의 종교 박해 속에서 고통받는 주교와 성직자들, 그리고 교우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뜻깊은 행사”였다고 전했다. 또한 2010년 5월 23일자(제2698호)에서는 부산교구 양산 물금본당이 5월 한 달간 ‘성모 성월 축제’를 지내며 ‘파티마의 성모님 가정 순례’, ‘성모님과 함께하는 어린이날·어버이날’ 등의 활동으로 성가정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명시했다. 올바른 성모 신심을 촉구하는 역할도 해 왔다. ‘파티마 제3의 비밀’ 공개 전 유언비어와 나주 윤 율리아 관련 문제 등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했다. 1996년 5월 5일 자(제2001호) 사설에서는 “성모 신심이 그 열성만큼 삶 속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마리아를 닮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성모 신심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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