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 (2) 현양하다: 김진용 마티아

100여 년간 지속된 박해를 견디며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순교 신심을 기리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순교사 연구와 순교자 현양에 일생을 바친 김진용(마티아, 1927~2012) 전 인천교구 부평2동본당 총회장의 삶을 소개한다. 신앙의 섭리에 이끌린 길 한국교회 순교자 현양 사업에 몸담은 성직자나 신자들은 김진용 회장을 “본업을 제쳐 두고 순교성지 발굴과 개발에 평생 헌신한 인물”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더 직설적으로 “순교자 현양에 미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김 회장은 인천교구 소속이었지만 순교자 현양 사업을 위해서는 교구를 초월해 활동했다. 인천교구는 물론 서울, 수원, 의정부, 제주교구 심지어 중국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숱한 직책을 맡아 ‘김 회장님’으로 불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순교자 현양에 빠져든 내력을 알게 되면 신앙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1927년 경기도 용인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20대 시절이던 6·25 한국전쟁 기간 영국군 파병부대에서 근무했다. 1953년 12월 전역한 뒤, 당시까지 남한에 계속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부대 한국인 책임자로 취업해 성실히 근무했다. 전쟁 직후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한국인에게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러던 중 부대 상급자로부터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를 받은 그는 갈등을 겪다 ‘작은 이익을 탐하여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고 결심하고 사표를 냈다. 1954년 3월경이었다. 김 회장의 미완성 자서전 「은총의 세월 김진용 마티아 유고집」에 기록된 이 사연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김 회장이 만일 세상과 타협하고 안락한 직장 생활을 누렸다면 지금의 ‘김진용 회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직장을 나와 인천 부평2동에서 ‘성심한약방’을 운영하는 한약사가 됐고, 한국교회사 연구의 태두인 고(故) 최석우(안드레아, 1922~2009) 몬시뇰을 만나게 되면서 순교사 연구에 빠져들었다. 한약방 서재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교회사 서적들을 시간 나는 대로 탐독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교구 초월해 순교자 흔적 찾아 성지 발굴과 묘소 성역화에 헌신 한국 순교사 연구에 큰 역할 김 회장은 전문 연구가 못지않은 학문적 깊이를 지니고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용인 한덕동을 중심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천주교 신자 순교성지 위치 소고’ 등 다수의 논문을 교회사 관련 학술지에 발표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회장이 순교사 발굴과 현양에 남다른 열정을 불태웠던 배경에는 깊은 신앙과 더불어 교회사에 대한 전문가적 이해가 자리하고 있었다. 잊혀 가는 순교사 찾기에 열정 불태워 김 회장은 순교자들의 발자취가 시간이 흘러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문헌 연구가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아 순교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한약방을 운영해 모은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순교사 발굴과 현양에 아낌없이 쏟아부은 이유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아버지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김제준(이냐시오)의 묘를 찾기 위해 관련 문헌과 고지도 등을 샅샅이 확인해 가며 1996년 11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탐색했던 활동은 비록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김 회장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1901년부터 1976년까지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에 있던 성 이윤일(요한)의 묘소가 수원교구 미리내를 거쳐 대구대교구로 이전된 후 본래 묘소 자리가 방치되자 성역화에 나섰다. 순교자의 묘소를 무관심하게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는 묘소 주변 부지 3000평을 대구대교구 명의로 매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본래 묘소 자리를 성역화하는 사업도 주도했다. 성 김대건 신부 유적지인 은이공소와 미리내 사이 ‘신·망·애 삼덕 고개’에 1998년 사업비를 부담하며 비석과 기념물을 세운 것도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뿐 아니라 한국교회 첫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의 인천 장수동 묘역이 폐허처럼 변해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1990년대 후반 새롭게 단장하는 사업에 앞장섰고, 그 결과 이승훈 묘는 2011년 12월 28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 성 남종삼(요한)의 묘를 찾아가는 신자들을 위해 안내 비석이나 간판 등이 전혀 설치돼 있지 않은 사실을 알고 비용을 부담해 묘 주변에 안내 시설을 마련한 것도 김 회장이었다. 또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역사적 장소인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이 중국 당국의 도시개발에 의해 2001년 3월 30일 철거되자 수원교구 은이성지에 원형대로 복원되도록 건의하고 재정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김 회장과 수십 년 동안 순교자 현양 활동을 같이 했던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부회장은 “회장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이어서 그분이 하신 엄청난 일 중 일부만이 알려져 있다”며 “늘 시선을 미래에 두고 후세에 순교 역사를 전하려 노력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그의 미완성 자서전에 기록된 활동 중 교계 언론 등에 소개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는 김 회장의 이러한 공로에 감사를 표하며 2002년 가톨릭대상(문화 부문)을 수여했다. ■ 김진용 회장과 수원교구 한덕골 사적지 수원교구 용인 한덕골 사적지는 순교사를 발굴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김 회장의 신앙과 집념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한덕골 사적지가 성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로서 명확히 한국교회에 인식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김 회장은 교회사 문헌들을 연구하던 중 김대건 신부 가족이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이주한 장소가 ‘골배마실(寒德洞, 한덕동)’로 서로 다른 지명이 함께 표기된 것에 의문을 품었다. 골배마실과 한덕동은 완전히 별개 마을임에도 두 지명이 병기된 것은 오기이거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김대건 신부 가문 족보를 면밀히 분석해 조부인 김택현(金澤鉉, 1766~1830)의 묘와 숙부인 김제철(金濟哲, 1803~1835)의 묘가 용인 한덕동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냄으로써,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 장소는 한덕골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연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용인 지역 지명을 보다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 1990년대 초 용인군청과 이동면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마을 위치와 명칭을 검증했다. 이와 같은 치밀한 연구 결과는 1993년 7월 ‘김대건 신부 가족 피난지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발표됐고, 「한국가톨릭대사전」 1995년 판에 논문 내용이 반영되는 결실을 얻었다. 김 회장은 한덕골 사적지 부지를 1999년 3월 사비로 매입해 수원교구에 기증했고, 제대와 대형 십자가, 성 김대건 신부상 등도 봉헌했다.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0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특집] 각양각색 성인들의 십자가

교회는 매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십자가 안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교회는 다양한 십자가의 형상으로 예수님을 기억하지만, 그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고자 했던 성인들의 이름을 담은 것들도 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십자가에는 성인들의 순교와 겸손, 회심과 신앙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성인들의 십자가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는지 살펴본다. ■ 거꾸로 뒤집힌 ‘성 베드로 십자가’ 열두 사도 가운데 으뜸으로 공경받는 베드로 사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십자가는 일반적인 십자가를 거꾸로 뒤집은 형태다. 「베드로 행전」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던 중 아피아 가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성인의 물음에 예수님은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리고 떠나기에 내가 다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고 답했다. 성인은 곧바로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순교를 받아들였다. 십자가형을 받은 성인은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거꾸로 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거꾸로 된 십자가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성인의 겸손을 드러내고, 동시에 예수님을 따른 성인의 순교를 상징하게 됐다. ■ X자 형태의 ‘성 안드레아 십자가’ 성 안드레아 십자가는 두 대각선이 교차하는 ‘X’자 형태다. 성 베드로 십자가처럼, 성 안드레아 십자가도 사도의 순교 전승과 연결된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그리스 파트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성인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오, 아름다운 십자가여, 나는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 왔다”고 말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십자가는 안드레아 사도를 상징하는 표지가 됐다. 물론 베드로 사도의 전승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안드레아 성인이 어떤 형태의 십자가에서 처형됐는지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십자가들을 통해 성인들의 순교와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기억해 왔다. ■ 흰 바탕 위 붉은 선 ‘성 제오르지오 십자가’ 성 제오르지오 십자가는 흰 바탕 위에 붉은 십자가가 놓인 형태다. 성인은 3~4세기경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전설에 따르면 성인은 용을 물리쳐 공주를 구하고 많은 이를 신앙으로 이끌었다. 때문에 특별히 용기 있는 순교자이자 기사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공경 받았다. 사실 붉은 십자가는 성 제오르지오가 실제 사용했던 십자가는 아니다. 십자군 시대 이후 성인에 대한 공경이 확산되면서 붉은 십자가가 성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에도 성 제오르지오 십자가가 담겨 있다. 유니언 잭은 잉글랜드의 성 제오르지오 십자가,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레아 십자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 십자가를 결합한 형태로, 각 지역의 수호성인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하나의 깃발 안에 함께 표현돼 있다. 성 파트리치오 십자가는 18세기 말 아일랜드를 위해 창설된 성 파트리치오 기사단이 사용한 ‘X’ 형태의 붉은 십자가다. ■ 성 프란치스코의 회심 상징 ‘성 다미아노 십자가’ 성 다미아노 십자가는 12세기경 제작된 이콘 양식의 십자가로,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자리하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을 뿐 다미아노 성인의 생애와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 십자가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회심과 깊은 연관성을 품고 있다. 젊은 시절 기사로서 명예와 성공을 꿈꾸던 성인은 군사 원정 중 환시를 체험한 뒤 고향 아시시로 돌아와 나눔과 기도를 실천했다. 성인은 폐허가 된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을 성당 건물을 수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한 성인은 성당을 보수하려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고, 결국 자신의 모든 재산과 세속적 삶을 내려놓았다. 이후 가난과 겸손의 길을 선택하며 복음적 삶을 시작했다. 성 다미아노 십자가는 성인의 회심과 복음적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프란치스코회 안에서 성인의 영성을 기억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1면

[순교자 성월 특집 - 순교 역사 지킨 평신도들] (1) 증언하다: 박순집 베드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순교 역사를 증언하고, 찾아내며, 연구해 온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는 교회 전체의 노력이 있었지만, 순교의 현장을 기억하고 전한 평신도들의 역할 또한 매우 컸다. 올해 순교자 성월을 맞아 순교 역사를 지켜 온 평신도들을 조명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며 한국교회 순교사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순집(베드로, 1830~1911)이다. 그는 어떻게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가 됐나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의 묘’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박해 시기인 1830년 10월 9일 지금의 서울 후암동에 해당하는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에서 아버지 박 바오로와 어머니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난 박순집의 삶은 순교자들의 시신 수습과 안장, 그리고 행적 증언으로 요약된다. 박해가 끝난 뒤 조선교회가 순교자 시복을 추진할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증언자였다. 시복 수속 과정에서 그의 증언을 기록한 「박순집 증언록(朴順集 證言錄)」(이하 증언록)이 세 권으로 편찬된 것은 그가 한국교회 순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준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1888년 순교자 시복을 위해 프와넬(Poisnel) 신부에게 순교자 행적 조사를 지시했다. 프와넬 신부는 박순집의 증언을 들었고, 서기를 맡은 권 타대오는 그 내용을 한 마디도 바꾸지 않고 기록했다. 그 결과 증언록에는 150여 명의 순교자가 수록됐다. 그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심 깊은 가문이 있었다. 할머니가 ‘갸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신자였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그의 집안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로 일하며 여러 신자의 순교 현장을 목격했고, 비밀리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았다. 박 바오로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목숨을 걸고 시신을 찾아내 왜고개(瓦署)에 안장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이 사실을 들었을 뿐 아니라, 김대건 신부가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목격했다.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됐고, 병인박해 당시 순교 현장에 있었다. 그는 1866년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4대 조선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 성 볼리외 신부, 성 우세영(알렉시오) 등 순교자 7위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인근에 임시 매장한 뒤 왜고개에 안장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요한)과 성 최형(베드로)의 시신도 왜고개에 묻었다. 순교하지 못한 이가 선택한 보속의 길 그가 평생 순교자들의 증거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의 아픔도 있었다. 병인박해 한가운데 있었지만 검거망을 피해 살아남은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순교의 길을 걸었다. 1866년 10월 고모 박 막달레나와 조카 박 바오로, 1868년 3월 아버지 박 바오로가 순교했다. 문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박순집 집안에서 순교한 이는 20여 명에 이른다. 증언록에는 그의 친인척을 비롯해 여러 순교자의 체포 과정과 신앙 고백, 순교에 이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겪은 고통과 끝까지 신앙을 지킨 영광이 함께 기록됐다. 인천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김규성(요셉) 신부는 논문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자 관련 기록 연구」에서 그가 증언자로 살아간 배경에 대해 “집안에 순교의 영광을 얻은 이들이 많았지만 자신은 순교하지 못하고 살아남았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고, 이를 보속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박순집과 인천교구 갑곶 순교 성지 인천교구사에서 박순집은 ‘교구 발전의 초석’으로 표현된다. 그는 서울 홍제동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고 살다가 1889년경 인천 제물포 신자들의 요청으로 1890년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당시 제물포에는 사제가 없었고 조선인 신자 두 가정, 일본인과 중국인 신자가 있을 뿐이었다. 박순집은 답동본당 주임 빌렘 신부의 부탁으로 1892년부터 1902년까지 회장직을 수행했고, 이후에도 회장과 같은 역할을 이어 갔다. 1911년 6월 27일 81세로 선종한 그는 인천 용현동에 묻혔다가 1961년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다. 이후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2001년 5월 24일 도화동성당 성체조배실 안에 그의 유해를 봉안한 뒤 같은 해 9월 갑곶 순교 성지로 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해 이장 당시 인천교구장 고(故) 나길모 주교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신앙을 증거한 박순집 베드로의 정신을 본받기 위한 교우들의 노력과 실천이 요청된다”고 당부했다. 갑곶 순교 성지 전담 민동규(다니엘) 신부는 그의 신앙에 대해 “그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신앙은 단지 믿고 간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전하고, 이어 가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며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희생을 너무 쉽게 과거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만, 박순집으로부터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되살려야 하는 책임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0면

‘꽃동네’ 설립 50주년…갈 곳 없는 이들 보금자리서 ‘사랑의 꽃’ 피우다

1976년 9월 12일 오웅진 신부(요한 사도·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와 고(故) 최귀동(본명 경락·베드로) 할아버지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재단법인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이하 꽃동네)이 설립 50주년을 맞는다. 꽃동네는 지난 50년 동안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왔다. 가난한 마음들이 만들어 낸 사랑의 기적, 꽃동네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와 설립자 오웅진 신부의 메시지를 전한다. 1300원으로 시작된 기적 1976년 5월 사제품을 받고 청주교구 음성 무극본당(현 금왕본당 무극공소)에 부임한 오 신부는 같은 해 9월 12일 성당 앞을 지나가는 한 노인을 만났다.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던 이는 최귀동 할아버지였다. 오 신부는 호기심에 그의 뒤를 따라갔고, 용담산 아래 움막에서 걸인들에게 얻어온 밥을 나누는 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됐다. 장애가 있음에도 최 할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걸인 18명을 40여 년 동안 돌보고 있었다. 그날 밤 오 신부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전 재산 1300원으로 시멘트를 구입해 벽돌을 찍기 시작했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본당 신자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집에는 ‘사랑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76년 11월 15일 축복식을 거행한 뒤 최 할아버지를 비롯한 걸인들이 새 보금자리에 들어갔다. 한 사람의 소박한 자선에서 시작된 사랑의 실천은 훗날 꽃동네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성장하는 씨앗이 됐다.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에서 사랑의 공동체로 노숙인 보호에서 출발한 꽃동네는 점차 가난과 소외의 문제를 품는 사회복지 공동체로 성장했다. 1980년 청주교구 사제총회에서 꽃동네 설립이 가결되면서 교구 차원의 사업으로 추진될 기반을 마련했고, 1981년부터는 전국 회원 모집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사랑의 나눔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1982년 현재 음성 꽃동네가 자리한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산1-45 부지를 마련했으며, 1983년 부랑인요양원을 준공했다. 이후 꽃동네는 1984년 3월 21일 사회복지시설 인가를 받으며 본격적인 복지 사도직의 길을 걸었다. 정신요양원, 결핵요양원, 노인요양원, 알코올중독자요양원, 인곡자애병원 등을 차례로 설립하면서 단순히 거처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질병과 장애, 노년의 어려움까지 함께 돌보는 종합복지공동체로 자리매김했다. 꽃동네가 단순한 사회복지시설을 넘어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는 영성 공동체로 발전한 데는 수도회 창설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6년 9월 8일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와 자매회가 설립됐고, 같은 해 12월 27일 제2대 청주교구장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후 꽃동네 형제회와 자매회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사랑의 나눔을 세계로 각지에서 이어진 후원과 관심 속에서 꽃동네의 사명은 국내를 넘어 세계로 확장됐다. 1992년 가평 꽃동네를 설립했고, 1999년에는 가톨릭꽃동네대학교를 개교해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할 전문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해외 선교와 국제 나눔을 통해 사랑의 영역을 넓혀갔다. 중국 꽃동네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인도적 지원 ▲지역사회 개발 ▲생활시설 운영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현재 아이티, 필리핀, 미얀마, 우간다, 이탈리아 등 14개 국가에서 꽃동네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은 공동체 역사에서 특별한 순간으로 기록됐다. 교황은 꽃동네 ‘희망의 집’에서 장애인들과 만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며, 이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엄한 존재임을 전 세계에 일깨웠다. 당시 교황은 “신앙의 풍요로움은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를 가리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이루는 구체적인 연대로 드러난다”며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참여하는 단체의 활동을 높이 치하한다”고 말했다. 사랑으로 걸어온 50년, 다시 새로운 50년으로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온 꽃동네가 설립 50주년을 맞아 감사의 시간을 마련한다. 꽃동네는 9월 8일 오후 1시30분 음성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에서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기념식과 음악회를 개최한다. 이날 기념행사에서는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가 레오 14세 교황의 강복장을 꽃동네에 전달할 예정이다. 설립 50주년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이자, 앞으로 이어갈 사랑의 사명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꽃동네는 “설레고, 감사하고, 은혜로운 이날에 고마운 회원님들을 모시고자 한다”며 “함께 기뻐하고 격려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문의 043-879-0101 재단법인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인터뷰]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창설자 오웅진 신부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 꿈꿔” “꽃동네가 바라는 소망은 세 가지입니다.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의 소명을 이와 같이 설명했다. 오 신부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에게 사랑은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다.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내어준 하느님처럼, 본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 부연했다. 오 신부는 “인간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항상 겸손하신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삶도 죽음도 전부 내어주시고, 심지어 당신의 살과 피까지 주고 가셨다”며 “이처럼 가장 큰 사랑은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꽃동네는 이러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오 신부는 달라고 요구할 줄만 알았던 노숙인들이 꽃동네에서 나눠줄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볼 때 꽃동네가 사랑의 공동체임을 느꼈다. 오 신부는 “꽃동네에 온 식구들이 감사하면서 살다가 선종 직전에 안구와 장기 기증을 약속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처럼 가장 보잘것없다고 여겨지던 이들이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꽃동네 50년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오 신부는 모든 과정이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가능했던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고 고백했다. 오 신부는 “꽃동네가 50년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며 “꽃동네 식구들이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해 주시고, 편하게 잠잘 곳도 마련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꽃동네의 시작과 같이, 꽃동네가 끝날 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다. 오 신부는 “예수님의 삶이 시작도 사랑이고, 그 끝도 사랑이었던 것처럼 꽃동네도 이러한 예수님과 함께하고자 한다”며 “예수님의 고향 마을인 나자렛을 본받아 성가정을 이루는 꽃동네가 되겠다”고 밝혔다. 끝으로 오 신부는 9월 8일 열리는 꽃동네 50주년 기념행사에 많은 신자가 자리를 함께해 줄 것을 청했다.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바치면서, 버려지는 이들 없는 세상을 만드는 꽃동네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손잡고 행복한 이날을 기념합시다. 많이 오셔서 사랑을 많이 배우고, 가져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1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특집] 태안 기름 유출 사고 20년…살아난 갯벌에 가다

생태계를 보전하는 일은 거창한 구호보다 개개인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이 모이면 생각지도 못했던 큰 결실을 볼 수 있다.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2007년 충남 태안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름 유출 사고, 그리고 이를 극복한 자원봉사자와 태안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태안 바다가 검게 물들었다 서해안 갯벌은 ‘생태계의 보고’로 불린다. 8월 20일 찾은 태안군 소원면 소근진 갯벌에는 칠게, 농게 등 갯벌 생물들이 우글거렸다. 모래사장이 펼쳐진 만리포해수욕장에는 늦여름에도 관광객들이 해수욕이나 서핑을 즐겼다.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는 갈매기들도 보였다. 20여 년 전 이 일대는 온통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였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군 만리포 앞 해역에서 유조선과 크레인선이 충돌해 약 1만900톤의 기름이 유출되는 ‘허베이 스피리트호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만리포해수욕장에 기름띠가 몰려와 해변을 덮쳤다. 모래사장, 갯벌, 갯바위가 모두 시커멓게 물들었다. 당시 사목회장이었던 대전교구 태안본당 김용순(안드레아) 씨는 “사고가 난 후 첫 주일에 신부님, 수녀님과 함께 만리포 바다에 나갔는데, 새까만 원유가 바닷가까지 치고 올라왔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회상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거대한 기름띠는 태안 해안 거의 전 지역을 덮쳤다. 해안선 375km, 섬 101개가 오염되는 피해를 입었다. 타르 덩어리가 전남·전북까지 흘러가며 근해 어장 등 무려 3만4703.5헥타르가 직간접적인 피해를 봤다. 생태계도 붕괴했다. 철새들은 기름 범벅이 돼 옴짝달싹 못 했고, 조개, 게, 망둥이 등 바다와 갯벌 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굴과 김 양식장이 모두 마비되는 등 태안군 전체 어장 면적의 63% 이상이 타격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바다의 자정 작용으로 피해 지역이 완전히 복구되는 데 최소 20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학생, 직장인, 종교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태안으로 발걸음을 이어갔다. 죽어가는 갯벌과 해변을 살리고, 고통받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자원봉사자 123만 명… 태안본당도 발 벗고 나섰다 “갯벌에 나갔는데 글쎄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진흙이 눌리면서 게 구멍에서 시커먼 기름이 쑥 하고 올라오는 거야. 바닷물은 빠졌는데 구멍 속에 기름이 남아 있던 거지”(윤길상 대건 안드레아·대전교구 태안본당) 태안본당도 유류 사고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신자 중 300가구 이상이 직간접적 피해를 봤지만, 그렇다고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본당은 수습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신자 자원봉사자들에게 군청 등에서 보급받은 방제복을 배부하는가 하면, 방제 작업이 필요한 지역으로 봉사자들을 안내했다. 봉사자들이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도록 하루에 1700그릇이 넘는 떡국을 끓여 대접했다. 당시 수습본부장 손승만(로마노) 씨는 “새벽마다 40대가 넘는 버스가 성당으로 몰려왔다”며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고 회상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해 태안과는 인연이 없던 전국 각 교구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섰다. 봉사자들은 한겨울 추위와 기름의 악취를 견뎌야 했다. 사고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포해수욕장과 피해가 컸던 소근진 갯벌·방파제, 의항해수욕장 등에서는 봉사자들이 갯바위를 닦고 해변의 기름을 퍼냈다. 제주도에서 휴가를 내고 온 젊은 직장인 봉사자도 있었다. 본당 신자들은 먼 길 달려온 봉사자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집을 숙소로 흔쾌히 내어줬다. 태안을 찾은 자원봉사자는 123만 명에 달했다. 한 명 한 명의 노력이 모여 태안 해변은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윤길상 씨는 “사고 후 2~3년이 지나니 갯벌에 조개가 보이기 시작했고, 바다에서 잡히는 해산물에서도 더 이상 기름 성분이 검출되지 않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며 “정말 기적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방제 작업을 비롯해 유류 사고를 극복하며 정부와 지자체, 민간단체와 개인들이 남긴 ‘태안 유류피해 극복 기록물’은 2022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역목록에 등재됐다. 회복된 생태계, 개개인이 직접 실천한 피조물 보호 태안 해안이 원래대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태안본당 최병석(요한 사도) 씨는 “외출할 때마다 머리가 띵할 정도의 악취를 견뎌야 했다”고 회상했다. 또 유류 사고 후 관광객이 다시 태안을 찾기까지도 수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태안 주민들의 노력은 생태계의 복원을 앞당겼다. 2014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서해안 잔존유류 모니터링 결과 심각한 수준의 오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9년 만인 2016년에는 사라졌던 토종 돌고래 상괭이가 태안 앞바다에 돌아왔다. 깨끗한 바다에서만 산다는 상괭이의 귀환은 서해안 생태계의 회복을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년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제정했다. 교황은 “이날은 개인과 공동체가 창조계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가해진 죄악에 대한 용서를 구할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안의 경험은 피조물 보호가 거창한 구호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부주의와 무관심이 생태계에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실천은 훼손된 생태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수많은 주민과 자원봉사자들이 기름 묻은 돌과 모래를 직접 닦아낸 태안의 모습은 이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태안본당은 유류 사고와 그 극복 과정, 지역주민과 봉사자들의 연대를 기억하며 2025년 봉헌한 성당 십자가의 길 제6처에 그 의미를 담았다.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리는 청동 조형물 아래 기름을 닦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본당 주임 곽승룡(비오) 신부는 “자신이 사는 지역이 아님에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달려와 준 봉사자들의 모습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복음적 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전했다.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1면

교황청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학회’…“사랑·인 공통 가치로 공감대 모색”

교황청 종교간대화부가 유교와 공식적인 첫 만남에 나서며 종교간 대화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종교간대화부는 8월 4일부터 5일까지 서강대학교 정하상관에서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학회’를 주최했다. 이번 학회의 주요 논의 내용을 ‘최종 공동성명서’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학회는 5일 “두 종교의 참된 만남이 서로의 이해를 깊게 하고 신뢰를 굳건히 하며 모두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최종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이번 학회는 교황청 종교간대화부가 주최하고 주교회의, 성균관, 서강대학교가 공동 협력해 ‘이상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기여를 위한 대화: 새 하늘, 새 땅과 대동(大同)’을 주제로 열렸다. 종교간대화부는 1년 전부터 성균관, 서강대와 이번 학회를 준비해 왔다. 종교간대화부 장관 조지 제이콥 쿠바카드 추기경을 비롯한 교황청 대표단과 인도네시아, 홍콩, 미국 등 12개국 신학과 철학, 종교학, 유교학 전문가들이 학회에 참가해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핵심 가치인 새 하늘과 새 땅, 대동, 그리고 사랑과 인(仁)이 지닌 공통점을 탐구했다. 또한 두 개념이 현대사회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찾기 위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학회를 마치며 ‘제1회 유교-그리스도교 학회 참가자 일동’ 명의로 나온 최종 공동성명서 발표는 종교간대화부 차관보 폴랭 바타이르와 쿠부야 신부가 맡았다. 학회 참가자들은 최종 공동성명서 채택을 위해 이틀간 이어진 학회에서 모두 8개의 세션 발제와 그룹 토의를 이어갔다. 제1세션에서는 종교간대화부가 기획하고 그리스도교-유교 연구 그룹이 공동 프로젝트로 제작한 「그리스도교와 유교 대화 지침서」를 발표했다. 이 지침서는 아시아적 맥락에서 그리스도교와 유교 간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필수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최종 공동성명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교가 희망하는 새 하늘, 새 땅과 유교가 지향하는 대동 곧, 큰 조화와 큰 일치를 성찰하면서, 두 전통 모두가 정의와 연민, 평화, 모든 이를 향한 돌봄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도록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유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이 서로 다른 종교적, 철학적 토대에서 비롯됐지만, 이번 학회를 통해 중요한 공통점을 찾게 된 점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이 급속하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현실과 관련해 “인공지능의 대전환 시대를 맞아 유교의 인, 어짊의 정신과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가치에 바탕을 두고, 모든 기술 발전이 인간 존엄과 윤리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증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최종 공동성명서는 유교 고유 용어 표기에 대해 상이한 견해가 제기됨에 따라 성균관과 종교간대화부 실무자 논의를 거쳐 그 최종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최종수 성균관장은 이와 관련해 “처음 시작을 잘했으니, 앞으로 바른길을 세워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회 참가자들은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지속돼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유하고 최종 공동성명서 발표 후, 제2회 학회는 2028년에 인도네시아에서, 제3회 학회는 2030년에 홍콩에서 개최한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쿠바카드 추기경 등 종교간대화부 대표단은 한국 사회의 종교간 대화 촉진을 위해 2일에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과 원불교 원남교당, 3일에는 불교 진관사와 천도교 중앙대교당, 한국 유교를 대표하는 성균관을 방문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주한 교황청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쿠바카드 추기경은 “한국은 역사와 문화, 종교가 하나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나라”라며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의무”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12면

[광복절 특집]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메우스 신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141호인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항일운동을 지원하는 미주 한인사회에 전달하고자 제작됐다. 이 태극기의 오른편 상단에는 김구 선생이 직접 쓴 글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우사(梅雨絲)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광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 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매우사 신부’는 미주 한인사회에 이 태극기를 전달한 인물인 벨기에 출신 사제 샤를 메우스 신부(가롤로·Charles Meeus·1909~1974)의 중국 이름이다. 메우스 신부는 이 태극기를 194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전달했다. 이후 후손들이 보관하던 태극기는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됐고, 2021년 보물 제2141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한국 항일활동에 도움을 줬던 그는 훗날 한국으로 파견되면서 우리와 깊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한국에서는 ‘차매우(車梅雨)’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선교를 펼쳤던 메우스 신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중국에서 항일운동… 김구 선생과 친분 벨기에 신학생이자 전교협조회(Société des Auxiliaires des Missions, SAM) 회원이었던 그는 1935년 우연히 중국 하이먼교구 주카이민(시몬) 주교와 인연을 맺고, 1936년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귀화한다. SAM 회원은 파견지역의 교구장 주교에게 순명하며 현지인과 똑같은 생활조건으로 사는 것이 목적이자 특색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메우스 신부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이면서,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빈 주교(于斌·1901∼1978) 등과 친분을 맺으며 항일운동에도 참여한다. 메우스 신부가 김구 선생을 알게 된 것도 위빈 주교를 통해서였다. 메우스 신부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했던 송명호 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전문위원은 “메우스 신부는 김구 주석을 존경했고, 안중근(토마스·1879~1910) 의사의 아들 안준생(마태오·1907~1952)의 통역으로 여러 차례 김구 주석과 동지적 신뢰를 쌓았다”며 “메우스 신부는 단순히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전달한 인물을 넘어,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우리 민족의 아픔에 공감했던 진정한 대한민국의 광복운동 조력가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여러 의미에서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국보로 지정되는 것이 마땅하다”며 “특히 메우스 신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메우스 신부는 중국을 점령한 공산당의 탄압에 의해 1955년 추방되고 벨기에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국에서 펼친 사랑의 선교 메우스 신부는 1957년 대구대교구 소속 사제로 파견되며 한국과의 두 번째 인연을 시작했다. 미8군부대 군종신부로 임명된 메우스 신부는 구미 금오산 정상에 설치된 무선 중계소 근무 장병들의 미사 봉헌을 위해 거친 길을 오르내렸다. 위트가 넘치던 메우스 신부는 미군방송에 출연해 우스꽝스런 1인 2역 모노드라마를 진행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선종 직전까지는 대구 가르멜 여자 수도원 지도신부로 사목했다. 수도원 성당이 한때 준본당이 되면서, 그는 지역민들에게 본당 신부 역할을 하며 사랑의 선교를 펼쳤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쾌활하고 열린 자세로 종교를 넘어 모든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말한다. 오토바이 마니아였던 그는 지역민의 빠른 발이 되어줬고, 장날이면 배달꾼 역할을 자처했다. 메우스 신부는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 편집동인으로도 활동했던 평신도 선구자 김익진(프란치스코·1906~1970) 선생과 수묵추상화 대가 지홍(智弘) 박봉수(니코데모·1916∼1991) 화백 등 국내 예술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으며 그들의 영적 아버지이자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다. 특히 김익진 선생과는 학문적이며 정서적인 친구 사이였다. 중국의 석학 우징숑(吳經熊·1899~1986) 박사가 자신의 신앙 자서전 「동서의 피안」 한국어 번역을 김익진 선생에게 부탁했는데, 그 매개 역할을 한 사람이 우징숑 박사의 지인이었던 메우스 신부다. 그 일을 계기로 메우스 신부와 김익진 선생은 자주 만나 대화하고 사제관 정원을 함께 가꾸는 등 깊은 우정을 나눴다. 김익진 선생의 딸인 예수 카리타스 우애회 김화영(소화 데레사) 회원은 “차매우 신부님과 아버님이 만날 때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며 “신부님은 지역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특히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시고자 많이 노력하셨다”고 기억했다. 묵묵히 또 강하게 하느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던 메우스 신부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1974년 향년 65세로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미국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 메리놀 묘지에 안장돼 있다.

발행일 2026-08-16 제3503호 2면

“이성당 줄서기 전…이 ‘성당’ 어때요?”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간직한 적산가옥과 철길마을 등 옛 풍경을 품어 ‘레트로 도시’로 통하던 전북 군산시가 최근 영화와 책, 미술 등을 만날 수 있는 문화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군산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데이터랩의 통계에 따르면, 군산시 외지인 방문자 연인원은 2024년 2562만 명에서 2025년 2681만 명으로 약 120만 명 증가했다. 군산 관광·여행 관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언급량도 같은 기간 25만8599건에서 38만1280건으로 상승했다. 오랜 역사 위에 새로운 시간을 덧입히며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도시로 변화하고 있는 군산을 걸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군산 여행은 이 ‘성당’부터! 군산 여행은 도심에 나란히 자리한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화유산이 즐비한 원도심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전주교구 둔율동성당을 만난다. 한산한 주택가 골목의 빌라와 상가 사이로 첨탑을 높이 드러낸 이곳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군산 지역 최초의 본당이다. 본당에는 군산 천주교회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병인박해 이후 금강과 만경강 하구로 피신한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면서 사옥개·회현·나포 등에 공소가 세워졌다. 군산항 개항 뒤 신자가 늘자 이들 공소를 관할하던 나바위본당은 1929년 군산본당을 분가했다. 현 둔율동본당의 전신이자 군산과 익산에 25개 본당을 분가시킨 모본당이다. 이곳은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건축적 의미도 지녔다. 1955년 건립된 현재의 성당은 1945년 군산경마장 폭발 사고로 크게 파손된 옛 성당을 보수해 사용하다가 신자들의 정성을 모아 새로 지은 건물이다. 장방형 평면의 성당은 종탑과 장미창, 아치형 창문 등을 갖춰 고딕양식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안으로 들어서면 북쪽 출입문에서 남쪽 제대까지 길게 이어진 공간과 넓은 중앙 통로를 둔 바실리카양식의 구조가 눈에 띈다. 전후 호남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대형 성당이자 전통적인 성당 건축에서 현대적 건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건축 도면과 자재, 공법, 신자들의 봉헌 내역 등 착공에서 준공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성당신축기’와 ‘건축허가신청서’도 2020년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성당 한편에 마련된 유물전시관에는 본당과 함께해 온 성물들과 역사를 담은 기록물 등이 전시돼 있다. <임 쓰신 가시관> 등의 시를 남긴 시인이자 본당 초대 보좌를 지낸 하한주 신부(요셉, 1909~1984), 전주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김재덕 주교(아우구스티노, 1920~1988)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8월과 크리스마스 성당을 나와 원도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8월의 군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1998년 개봉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 ‘초원사진관’이다. 영화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진사 정원과 그의 앞에 나타난 활기찬 주차단속원 다림의 사랑을 그린다. 영화의 대부분은 정원의 일터인 사진관과 그 주변에서 촬영됐다. 사진관이 만들어진 과정에도 소소한 사연이 담겨 있다. 제작진은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전국의 사진관을 돌아다니다 군산 월명동의 한 카페에 들렀다. 그곳에서 창밖으로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했고, 촬영이 끝나면 철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사진관으로 개조했다. 초원사진관이라는 이름은 정원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의 사진관 이름에서 따왔다. 촬영이 끝난 뒤 철거됐지만, 군산시가 2013년 영화 속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개봉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진관을 향한 관심은 꾸준하다. 인스타그램에는 초원사진관을 해시태그한 게시물이 약 10만 건에 이른다. 사진관을 찾은 평일 오후, 연인과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사진관 앞에서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영화 속 장면을 재현했다. 사진관 주변에는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1908년 지어진 옛 군산세관을 비롯한 근대문화유산들이 반경 1㎞ 안에 모여 있다. ‘군산시간여행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군산시간여행 안내소도 마련돼 있어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군산 대표 먹거리인 짬뽕을 맛볼 수 있는 ‘짬뽕특화거리’와 빵집 ‘이성당’도 가까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좋다. 새로운 문화 거점으로 원도심을 벗어나 군산의 새로운 문화 거점으로 떠오른 나운동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군산회관(옛 군산시민문화회관)과 JB문화공간이 자리한다. 군산시민문화회관은 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이자 한국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이 남긴 유작이다. 1989년 개관한 뒤 지역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지만, 2013년 군산예술의전당이 들어서며 주요 기능이 옮겨간 뒤 오랫동안 문을 닫았다. 이후 2019년 국토교통부 도시재생사업 선정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2024년 ‘군산회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김중업 건축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오늘의 감각을 더해 예술과 일상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공연·전시를 비롯한 행사가 열리는 ‘너른홀’, 건축·디자인·예술 분야 책을 다루는 서점, 개방형 아카이브실 등이 들어서 있다. 2024년과 2025년에는 독서문화 확산을 위한 ‘군산북페어’가 개최됐다. 2025년 사흘간 열린 행사에는 9800명이 방문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올해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군산회관에서 약 500m 떨어진 JB문화공간은 군산시와 전북은행의 문화교류 업무협약으로 2023년 개관했다. 기존 은행 지점을 새롭게 단장한 공간으로, 전북은행미술관과 카페 등이 운영되고 있다. 미술관은 한국 근대미술 대가 김환기, 유영국(바오로) 등의 작품을 선보인 개관 기념전 이후 다양한 전시를 마련했다. 최근에는 ‘당신이 보지 못한 유럽 명화전’을 열어 파블로 피카소와 마르크 샤갈, 조르주 루오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간직한 군산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문화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0면

‘묵묵히’ 옛 항구 정취 따라 ‘호젓한’ 성당에 다다르다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 일대를 찾는 여행객이 부쩍 늘었다. 젊은 세대는 물론 가족 단위 여행객도 이 작은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옛 정취를 간직한 어촌 벽화마을부터 탁 트인 동해, 짜릿한 체험 시설까지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항구와 벽화마을, 전망대가 이어지는 길 한편에는 6·25전쟁 때 주임 신부가 순교한 춘천교구 묵호성당도 자리하고 있다. 전망과 액티비티 모두… ‘도째비골’ KTX를 타고 강릉을 지나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묵호역에 도착한다. 묵호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기차역에서 바닷가까지 비교적 가깝다는 것이다. 역에서 10분가량 걸으니 이내 항구와 바다가 펼쳐진다. 묵호항을 지나 해안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도째비골 해랑전망대와 스카이밸리 입구가 여행객을 반긴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강원도 방언이다. 도째비골은 어두운 밤 비가 내릴 때 골짜기에서 푸른빛이 보여 마을 사람들이 도깨비불로 여겼다는 구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해안에 설치된 해랑전망대에서는 바다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바닥 일부가 유리와 철제 그물망으로 만들어져 발아래로 밀려오는 파도와 너울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언덕 위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바다 풍경과 체험시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지다. 케이블 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스카이사이클과 원통형 미끄럼틀을 타고 약 27m 아래로 내려오는 자이언트 슬라이드도 눈길을 끈다. 도째비골 비탈면에는 ‘동해의 정령’을 형상화한 거대한 얼굴바위가 조성돼 있다. 마을 사람들의 선행에 감동한 정령이 풍랑과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줬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얼굴바위를 비롯해 도깨비 조형물과 잘 가꾼 정원이 곳곳에 있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길도 지루하지 않다. 관광객들은 색다른 풍경이 신기한 듯 연신 사진을 찍는다. 해발 약 60m 지점에 설치된 스카이워크에서는 묵호항 일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투명한 유리 바닥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스릴은 덤이다. 항구의 삶 벽화에 새긴 ‘논골담길’ 묵호항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개항했다. 삼척과 태백 지역의 석탄과 동해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실어 나르며 성장했고, 해방 이후에는 동해안의 주요 항구로 자리했다. 오징어와 명태 어업이 활기를 띠던 시기에는 항구와 마을 골목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어획량이 줄고 동해항이 개항하면서 예전의 활기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 시절 묵호 사람들의 고단하면서도 정겨운 삶은 ‘논골담길’에 남아 있다. 논골담길은 묵호등대 아래 가파른 언덕에 형성된 마을 골목이다. 항구에서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에 지고 나를 때 흘러내린 바닷물로 길이 논처럼 질척거려 ‘논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논골담길은 등대오름길과 논골1길·2길·3길 등 네 갈래 골목으로 나뉜다. 골목의 벽화에는 생선을 나르는 주민과 만선을 기다리는 가족 등 옛 묵호 사람들의 일상과 역사가 담겨 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 보면 벽화뿐 아니라 소원의 등대와 카페, 선물 가게, 잡화점, 전시 공간 등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언덕 곳곳의 카페에서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논골담길 정상에는 묵호등대가 있다. 바다와 묵호항은 물론 멀리 두타산과 청옥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스카이워크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묵호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묵호등대를 비롯한 묵호항 일대는 1968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바다로 열린 길, 어달삼거리 시간이 허락한다면 논골담길과 도째비골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어달삼거리까지 가도 좋다. 최근 새로운 사진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내리막 도로와 푸른 바다가 한 장면에 담겨 ‘인생샷’을 남기려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다만 어달삼거리는 관광을 위해 조성된 별도의 촬영장이 아니라 주민들이 이용하는 실제 도로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도에 오래 머물거나 차량 통행을 막지 않도록 주의하자. 순교 사제의 기억 품은 묵호성당 묵호역에서 걸어서 7분 남짓한 거리에 춘천교구 묵호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957년 6월 준공된 성당은 푸른빛이 감도는 청회색 외벽에 흰 장식선이 어우러져 단아한 모습을 뽐낸다.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 주변으로 펼쳐진 푸른 잔디밭도 성당 외관과 조화를 이룬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논골담길의 정취와도 닮았다. 성당에는 6·25전쟁 중 순교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묵호본당은 1948년 본당으로 승격됐고, 이듬해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패트릭 라일리 신부(라 파트리치오, 1915~1950)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라일리 신부가 사목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신자들은 피란을 권유했지만, 라일리 신부는 양 떼를 두고 목자만 떠날 수 없다며 묵호에 남았다. 결국 북한군에 체포된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순교했다. 춘천교구는 전쟁 중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기 위해 소양로와 묵호, 삼척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했고, 그 뜻에 따라 현재의 묵호성당도 세워졌다. 본당은 1974년 성당 마당에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비’를 세웠다. 지금도 해마다 라일리 신부의 순교일을 전후해 추모의 날을 지내며 그의 삶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있다. 라일리 신부는 한국교회가 시복을 추진하고 있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중 한 명이다.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0면

[농민 주일 특집] 생명농업 이어 가는 농민의 하루

7월 19일은 제31회 농민 주일이다. 교회는 농민 주일을 맞아 농촌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생명을 일구는 농업과 농민의 가치를 되새긴다. 오늘날 농촌은 기후위기로 농사 시기와 수확량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데다 고령화와 생산비 상승, 일손 부족까지 겹쳐 어느 때보다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생명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묵묵히 논과 밭을 일군다. 의정부교구 가톨릭농민회 대광분회 회원 최성순(로사) 씨가 운영하는 경기도 연천 안뜨레농장을 찾아, 기후위기 시대 생명농업을 이어 가는 농민의 하루를 함께했다. 기후위기가 바꾼 농촌 “10년 전도 아니야. 고작 2~3년 전부터 자외선이 너무 강해졌어요. 햇볕이 뜨거운 정도가 아니라 따가워요. 피부가 익는다니까요.” 39년째 안뜨레농장을 운영하는 최성순 씨는 최근 몇 년 사이 햇볕이 확연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 밭일을 하고 한낮의 열기를 피해 쉬었다가, 오후 4시쯤 다시 밭으로 나간다. 해가 가장 높은 시간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새벽에도 체감온도가 25도를 훌쩍 넘는 것 같아요. 열대야가 이어지면 밤새 달궈진 열기가 아침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기후변화는 농민의 노동시간과 방식까지 바꾸고 있다. 새벽과 늦은 오후로 일을 나눠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 같은 체감은 한 농민의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24년 농업·농촌 국민의식 조사」에서 농민들은 농업 경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재배 여건 변화’를 꼽았다. 달라진 기후는 작물의 생육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워졌고, 작물이 품종 고유의 크기와 모양대로 자라지 않는 일도 잦아졌다. 올해 안뜨레농장의 미니 단호박은 일반 단호박만큼 커졌다. 어른 주먹 정도여야 할 열매가 아이 얼굴만 한 크기로 자란 것이다. 최 씨는 “예전에는 봄에 심은 단호박을 가을까지 일정하게 수확했지만 이제는 언제까지 열릴지 가늠하기 어렵다”며 “올해는 미니 단호박 크기도 유난히 크고 열린 양도 지난해보다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작물이 크고 많이 열린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농산물은 품종에 맞는 크기와 모양을 갖춰야 상품성이 높다. 기후가 바뀌며 오랜 농사 경험으로도 수확량과 품질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그래도 생명농업을 이어가는 이유 최 씨는 약 3000평의 밭에서 미니 단호박과 감자, 고추, 오이, 가지, 양배추, 상추, 무 등 20여 종의 채소를 기른다. 10년 전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농약을 사용하던 기존 농법에서 무농약 농사로 전환했다. 주력 작물은 미니 단호박이지만 판로에 맞춰 여러 작물을 함께 재배한다. 수확한 농산물은 인근 하나로마트 로컬푸드 매장과 계약 업체, 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생활공동체 나눔터, 직거래 장터인 명동보름장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농장 창고에는 갓 수확한 감자가 가득 널려 있었다. 농민 주일을 맞아 7월 19일 서울 명동에서 열리는 명동보름장에 내놓을 농산물이었다. 무농약 농사는 일반 농법보다 훨씬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제초제를 쓰지 않으니 밭의 풀을 일일이 뽑아야 하고, 해충도 사람의 손으로 잡아야 한다. 덥고 습해질수록 풀과 벌레는 더 빠르게 번진다. 무농약 농사를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농민회 회원으로서 생명농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다시 밭으로 이끌었다. “예전 농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무농약·친환경 농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명감으로 이어 가고 있어요.” 심각한 기후위기 직격탄 맞은 농촌…잇따른 기상이변에 농사 여건 악화 39년째 농장 운영하는 최성순 씨…수확량·품질 예측 힘든 상황에도 무농약·친환경 농업 사명감 지켜…“생명농업 우리 농산물 선택해 주길” 빈자리 채우는 이주노동자 농촌 고령화도 농민들이 마주한 또 다른 어려움이다. 농장이 자리한 지역의 농민 대부분은 70~80대다. 올해 63세인 최 씨는 마을에서 ‘젊은 농부’다. 때문에 외국인 계절근로자(E-8)는 부족한 일손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농사를 지속하기 위한 필수 인력이 됐다. 이들은 파종기·수확기 등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업 분야 인력난 해소를 위해 입국한 노동자들이다. 최 씨도 3년 전부터 농번기마다 계절근로자를 직접 고용한다. 특히 무농약 농사를 지으려면 풀을 뽑고 벌레를 잡는 데 더 많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농장에서는 베트남에서 온 양 씨와 코아 씨, 고용허가제 비전문취업(E-9)으로 입국한 네팔 출신 라즈 씨가 함께 일하고 있다. 올해 처음 한국에 온 양 씨에게도 고온다습한 여름은 버겁다. 그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이른바 ‘선풍기 조끼’를 입고 밭일을 이어 갔다. 농촌과 생명농업, 농민 홀로 지킬 수는 없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최 씨가 농사를 지으며 지키는 기준은 분명하다.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은 팔지 말자.” 최 씨는 “예쁘고 깨끗한 농산물을 팔기 위해 수확 한 달 전까지 농약을 뿌리는 일은 농민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며 “내가 먹지 못할 것을 소비자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선택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몸에 걸치는 옷에 쓰는 비용을 조금 줄이더라도, 몸속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만큼은 친환경 농산물과 질 좋은 우리 농산물을 선택해 달라는 것이다. 의정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본부장 박인수(요셉) 신부는 “도시 소비자들이 농가를 찾아 일손을 돕고 농민들의 어려움을 들으며 함께 식사하고 교류하는 자리에서 농민들은 큰 힘과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가 농민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해 주기를 바란다”며 “매일 마주하는 한 끼의 밥상이 농민들의 땀과 생명의 땅에서 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농업의 소중함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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