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니콜로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은 삼위일체의 수줍은(shy) 위격이다.” 신학자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와 윌리엄 호든의 정의는 파격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께 ‘수줍음’이라는 수식어는 분명 낯설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령께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신 채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 내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게 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은 신앙 속에서 늘 현존하지만, 동시에 가장 붙잡기 어려운 분이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반면 성령은 숨결, 바람, 물, 불, 구름과 빛, 손가락, 비둘기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성령은 모습이 없다”고 지적하며, 그분은 형태로 포착되기보다 ‘선물(Donum)’처럼 선사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성령에 대한 노래는 종종 청원으로 시작된다. 성령 찬미가 〈오소서, 창조주님(Veni, Creator Spiritus)〉 역시 그렇다.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께서 찾아오사, 창조하신 마음속에, 천상 은총 채우소서’라는 가사는 성령을 정의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을 부른다.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의 〈오소서, 창조주님〉는 바로 이 부름을 전아한 선율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욤멜리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나폴리악파의 주요 인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소속의 카펠라 줄리아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성음악도 다수 남겼다. 곡은 소프라노 독창과 4성부 합창으로 구성된다.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독창의 유려함과, 그것을 받아 확장하는 합창의 응답이 작품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마치 개인과 교회의 목소리가 서로를 비추고 대답하는 듯한 구조는 성령의 신비를 음악 형식 안에서 드러낸다. 성령은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오시지만, 그 은사를 개개인 안에 가두지 않고 교회의 일치, 공동체의 찬미로 확장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찬미가는 성령을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그중 ‘보호자(Paraclitus)’는 본래 ‘곁으로 불려 온 분’이라는 뜻을 지니며, 라틴어 ‘advocatus’, 즉 변호자이자 협조자의 의미를 함께 품는다. 노래는 이어 성령을 ‘사랑의 샘(fons vivus)’, ‘불(ignis)’, ‘사랑(cáritas)’, ‘축성기름(únctio)’으로 부르는데, 이는 성령의 활동을 놀라울 만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수사들은 ‘일곱 은혜 베푸시고’와 이어지며 세례, 견진, 성체, 성품과 같은 교회의 주된 성사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중개하는 강력한 성령의 작용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아멘’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악상 지시어는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Allegro con spirito)’인데, 물론 여기서 ‘spirito’를 성령으로 읽는 것은 음악 용어를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 찬미가의 마지막 부분이 ‘활력 있게(con spirito)’라는 지시어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지나치기 어렵다. 앞선 악장들이 성령을 부르고 그 호칭들을 묵상한다면, 아멘은 성령께서 인간과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힘을 공동체가 함께 예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듣는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을 준다. 여기서 ‘오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은 ‘아멘’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7항) 그러나 그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흩어진 목소리는 교회와 공동체의 찬미가 된다. 성령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은폐되는 분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살베 레지나〉와 마르티니 신부

1760년 무렵, 대 바흐의 막내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름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1735~1782). 이는 그저 전기적 사실처럼 보이지만, 바흐 가문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바흐 일가는 루터교 신앙과 불가분인 음악가 집안이었고, 그 시초에는 파이트 바흐(Veit Bach)가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루터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튀링겐에 정착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떠난 사람.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 독일 최고의 음악 가문인 바흐 일족은 자신들의 선조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 가문의 막내가 다른 길을 택했다.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밀라노에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복형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가계도 속 동생 이름 옆에 씁쓸한 문장 하나를 남겼다. “우리 가운데 이 사람만이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살았다.” 이탈리아에서 크리스티안은 마르티니 신부(Giovanni Battista Martini·1706~1784)를 만난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마르티니 신부는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고, 크리스티안은 그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신학자 존 자나로(John Janaro)는 마르티니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음악적·영적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의 개종에 마르티니 신부를 주요 배경으로 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리라. 그의 결단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얻을 수 있었던 현실적 고려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개종 직후 1760년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된다. 그의 전환에는 교회음악가로서의 직책 획득, 이탈리아 음악계에서의 생존과 성공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현실이 있다고 해서 사제지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안에게 가톨릭 신앙은 음악으로 먼저 다가왔다. 마르티니 신부의 가르침을 통해 라틴 전례음악의 악보로, 대위법 훈련으로, 간절한 기도와 정연한 음악학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으로 왔을 것이다. 5월 성모 성월의 한복판, 그래서 그의 성모 찬송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는 남다르게 들린다. 물론 루터교 전통이 마리아 관련 전례 텍스트들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다. 루카복음 1장 46~55절을 기반으로 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은 루터교 전례 안에서도 주요 축일마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 바흐도, 이복형 에마누엘 바흐도 이 찬가로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살베 레지나〉는 크리스티안이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을 보이소서’ 같은 수사가 표방하는, 가톨릭 성모 신심의 정수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살베 레지나〉를 듣는 일은 한 작곡가의 변심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극적인 회심담으로 치환하는 것도 위험하다. 바흐 가문은 그를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산 사람’으로 기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남긴 라틴 교회음악들은 깊은 신심과 모차르트조차 매료되었던 국제성과 유창함, 전아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마르티니 신부 곁에서 대위법을 익히고, 라틴 교회음악을 손으로 더듬으며 배운 청년이 있었다. 스승은 음악가이자 신학자였고, 제자는 그 두 가지가 조화로이 통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호소력 있는 〈살베 레지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루터교 바흐 가문의 막내가 어떻게 가톨릭 음악 언어를 배웠고, 그 일생일대의 전환이 어떤 자취로 남았는지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브렌다노의 항해〉와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5월 16일은 아일랜드의 성인, 항해자 브렌다노 축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배를 타고 형제들과 함께 ‘약속된 땅’을 찾아 서쪽 바다로 떠났다. 항해가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세계를 사로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브렌다노가 향한 곳은 지리의 바다이기 이전에, 신앙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중세 라틴어 문헌 「성 브렌다노 수도원장의 항해(Navigatio Sancti Brendani Abbatis)」, 「브렌다노의 삶(Vita Brendani)」 등으로 전해진다. 항해담 속 바다는 평온하지 않다. 브렌다노 일행은 섬이라고 믿고 내린 곳에서 불을 피우지만, 그곳은 섬이 아니라 거대한 해양 생물 야스코니우스(Jasconius)의 등이다. 그들은 떠돌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새들의 섬, 유다 이스카리옷이 절망 속에서 잠시 쉬는 바위를 본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기이한 전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바다는 인간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느님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의 장소다. 이런 성 브렌다노를 20세기 음악으로 듣는 경험은 각별하다. 아일랜드 작곡가 숀 데이비(Shaun Davey)가 1980년 선보인 〈브렌다노의 항해(The Brendan Voyage)〉는 탐험가 팀 세버린이 아일랜드에서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까지 배를 타고 나아간 과정을 묘사한 곡이다. 여기서 세버린의 모험은 성 브렌다노의 뱃길을 재현한 것이다. 아일랜드 전통 악기 일리언 파이프의 음색은 성인의 배를 표현하고, 오케스트라는 그들이 마주하는 바다, 기상 조건, 섬, 생물들을 형상화한다. 10개 악장의 구조는 실제 항로를 그대로 따른다. ‘서곡’과 ‘브렌다노의 테마’로 시작된 도정은, ‘미키네스의 절벽’ 같은 구체적인 풍경 속으로 청자를 인도한다.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행로’와 집어삼킬 듯한 ‘강풍’의 위기는 신앙의 시련처럼 그려지지만, 배는 끝내 ‘뉴펀들랜드’라는 평화로운 항구에 도착한다. 이 서사는 9세기 철학자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의 ‘지성적 항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의 이름 ‘스코투스’는 당시 맥락에서 아일랜드인을, ‘에리우게나’ 역시 에리우(Ériu, 아일랜드) 태생임을 의미한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활동한 그는 주저 「자연구분론(Periphyseon)」 4권에서 신학·철학적 탐구를 위태로운 바닷길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독자를 초대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항해에 들어선다. 여기서는 수많은 굽이치고 얽힌 논의들 사이에서 항로를 가려내야 하고, 난해한 교리들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 하며, 시르테스의 해역, 곧 낯선 가르침들의 급류가 만들어내는 위험한 지역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곳에서는 가장 미묘한 지성들의 어스름 속에서 언제나 즉각적인 난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숨겨진 암초처럼 갑작스레 우리의 배를 산산이 부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선장이자 조타수가 되고, 성령의 은혜로운 바람이 우리 돛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는 이 모든 위험 속에서도 참되고 안전한 항로를 가려낼 것이며, 마침내 우리가 찾는 항구에, 상처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평온한 여로 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아가자.”(「Periphyseon」, Ⅳ. 744a-b) 이 점에서 브렌다노, 작곡가 데이비, 에리우게나는 아일랜드 수도승 전통인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 Christo)’와 겹친다. 이는 고향과 안온한 삶을 떠나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거룩한 유랑의 정서다. 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장소인 동시에, 나를 비우고 하느님 현존과 이끄심을 느끼는 은총의 공간이었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넘었던 수도자들, 지성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철학자, 〈브렌다노의 항해〉 선율은 오늘날 여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조타수 삼아, 각자의 대해로 기꺼이 향하고 있는가. 그러니 이제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아가자.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하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와 브뤼허 성 요한 병원(하)

성 요한 병원을 묘사한 그림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쪽에서는 사제가 병자 성사를 집전하고 다른 쪽에서는 수녀가 막 숨을 거둔 이를 위해 기도한다. 여기서 배경음처럼 한 성가가 들려온다. 〈하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 이 노래는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이를 성인들과 천사들이 맞아들이도록 청하는 화답송(Responsorium)이다. 장례미사 고별식에서 시신에 성수를 뿌리고 분향할 때 고별 노래로 쓰인다. 초입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Subvenite, Sancti Dei) 주님의 천사들이여, 마주 오소서.(occurrite, Angeli Domini) 이 교우를 받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앞에 바치소서.(Suscipientes animam eius, Offerentes eam in conspectu Altissimi)” 성 요한 병원은 병자와 순례자, 가난한 이가 머물던 곳이었고, 돌봄은 치료만이 아니라 기도와 전례, 임종 동반까지 포함했다. 치유할 수 없는 이들,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자, 순례 중 쓰러진 이들을 위한 공간. 이것이 병원이 오랫동안 수행해 온 호스피스 역할이었다. 이 계보를 더 멀리 끌어올 수 있다. 4세기 카파도키아의 성 바실리우스가 세운 바실레이아는 가난한 이, 병자, 여행자를 위한 복합 시설이었고, 당시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던 한센인들을 위한 시설 켈루포코메이온(keluphokomeion)까지 있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친구 바실리우스를 위한 추도 연설에서 한센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 이전에 이미 죽었으며, 몸 대부분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 도시에서, 집에서, 공공장소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수원지에서, 심지어 가장 친한 벗들에게서 쫓겨난 사람들.”(「대 바실리우스 추도연설」 Oration 43) 바실리우스 공동체의 급진적인 면은 이처럼 혐오 받는 계층에 대한 포용에 있었다. 불치병이나 말기 환자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 의료 상황에서는 거의 전례가 없던 일이다. 호스피스 개념과 전인적 돌봄의 시작이다. 성 요한 병원 역시 그 전통을 충실히 잇는 기관이었다. 이곳이 소장하고 있는, 화가 한스 멤링의 역작 〈성 우르술라의 성유물함〉이나 아폴로니아의 어금니 같은 성 유해들도 장소의 정체성과 연계되어 있다. 병자들은 각자 앓는 질병에 따라 성인에게 치유를 청원했다. 성 로코는 흑사병, 성 아폴로니아는 치통, 성 고르넬리오는 간질·발작, 성 루치아는 안질, 성 우르술라는 급작스러운 죽음으로부터 환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고, 성인들에 대한 전구는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성 요한 병원이 소장한 〈해골을 든 수녀의 초상〉은 인상적이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해골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의 표지였다. 수도자의 손에 들린 해골은 헛됨과 무상함을 상징하는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 소품과는 조금 다르다. 죽어가는 이들 곁에 있었던 이들이 쥔 해골은,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실제로 마주하는 죽음 자체였기 때문이다. 〈애덕이 있는 곳에〉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타인을 씻기고 안는 찬가였다면, 〈하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는 사랑이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음을 들려준다. 전자가 산 이를 위한 애덕이라면, 후자는 떠나는 자를 위한 환대다. 병원은 두 노래가 한 곳에서 만났던 공간이다. 병자는 치료받았고, 가난한 이는 의탁할 곳을 얻었으며, 죽어가는 이는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 카리타스는 생명을 돌보는 일에만 머물지 않았다. 죽음마저 품어 안는 환대로 완성되었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애덕이 있는 곳에〉와 브뤼허 성 요한 병원(상)

벨기에 브뤼허 성 요한 병원(Sint-Janshospitaal) 박물관의 고요한 전시실. 한 유물 앞에서 헤드폰을 쓴 순간 그레고리오 성가가 흘러나왔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애덕이 있는 곳에(Ubi Caritas)〉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발 씻김 예식의 교송(안티폰)으로 오랫동안 사용됐다. 가사는 8세기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인 아퀼레이아의 바울리노 성인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정의는 어떤 교리적 진술보다 명료하다. 지금 서 있는 장소의 정체성을, 성가는 단번에 관통하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설립된 성 요한 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병자와 순례자, 여행자들을 돌보았고, 신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조력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받았다. 〈애덕이 있는 곳에〉가 흙먼지 묻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재현하는 세족례, 주님 만찬 미사에서 불리듯, 이 시설은 환자들의 피고름과 토사물을 닦아내며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던 정신이 깃든 곳이다. 수녀들의 초상화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근대 이후 이곳은 아우구스티노 규칙서를 따르는 수녀회의 헌신으로 유지됐다. 이들의 사망률이 관 모양의 인포그래픽 형식으로 전시되어 있다. 1300년부터 1500년 사이, 이곳의 수녀와 간호하는 이들이 5년 이내 죽음에 이른 비율은 16퍼센트. 얼핏 작아 보이는 숫자다. 그러나 동일 조건으로 환산하면 10년 내 치사율은 약 30퍼센트, 15년 수치는 40퍼센트를 넘어선다. 도리어 환자들의 사망률은 낮게 유지됐다. 1782년부터 1796년까지 14년간 환자 생존율은 85퍼센트에 육박했다. 아픈 자보다 돌보는 자가 감염이나 과로로 먼저 쓰러진 것이다. 많은 종교가 희사나 자선을 강조한다. 그러나 재산을 내어주는 것과 생명을 내어주는 일은 다르다. 한 번의 순교가 아니라, 매일 병동에서 일하며 전염에 노출되고, 역병의 계절마다 쓰러져 가면서도 서원을 거두지 않는 삶. 이런 완전한 자기 봉헌, 애덕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전통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히 선명하고 눈물겹다. 성 요한 병원은 그래서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다. ‘환대’의 원형이다. 병원(Hospital)과 환대(Hospitality)는 ‘손님 혹은 주인’을 뜻하는 같은 어근 ‘hospes’에서 왔다. 성 베네딕토가 수도 규칙서 53장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라고 했듯이, 이곳은 타인을 품어 안는 환대와 연민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전시장 곳곳의 〈착한 사마리아인〉, 〈아브라함의 환대〉를 그린 걸작들은 이 공간의 신념을 반복해서 증언한다. 이곳에는 또 다른 음악이 깃들어 있다. 죽어가는 이 곁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기도하는 사제와 수녀의 모습, 그것은 호스피스의 원형이다. 다음 편에서는 〈하느님의 성인들이여 오소서(Subvenite, Sancti Dei)〉를 다룬다. 〈애덕이 있는 곳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자비의 노래라면, 이는 여정의 끝에서 망자를 성인과 천사들에게 의탁하는 찬가다. 두 음악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치유와 환대, 돌봄과 임종은 이 공간에서 완벽히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편에서 계속〉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샤르팡티에의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와 포르루아얄 데샹 방문기(하)

얀세니즘의 본거지, 포르루아얄 데샹 국립박물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샤토(château), 즉 아담한 성이나 대저택 정도 크기다. 하지만 소박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전시장을 둘러보니 성 아우구스티노에 관한 문헌과 도판들이 빼곡하다. 「신국론」, 「삼위일체론」 등 성인의 방대한 저작 중에도 유독 얀세니스트들이 집중한 저서는 「고백록」이었다. 다채롭게 진열된 「고백록」 판본들은 공동체에서 성인이 가졌던 절대적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다면, 얀세니즘의 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는 오늘의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얀세니즘뿐만 아니라 현대의 변형된 ‘신(新) 얀세니즘’까지 경계하셨다. 교황께서는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 얀세니스트들이 인간적, 정서적, 육체적인 것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지적하며, 이를 그릇된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한다.(86항) 또한 현대화된 얀세니즘이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과 영지주의의 재연으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87항) 실제로 오늘날 얀세니즘은 다양한 얼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회의, 육체를 멸시하는 영육 이원론, 선행이나 능동적 실천조차 무용하다고 여기는 냉소주의, 타자에게 배타적인 근본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현대인의 신앙 및 영성에 균열을 유발하는 독소이기도 하다. 둘째,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와도 맞닿아 있다. 얀세니즘 특유의 엄격주의(Rigorism)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MEP)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천주교회에도 간접적으로 투영되었다. 선교 사제들의 숭고하고도 투철한 의지와 청빈한 영성은 박해 시기 신앙을 지탱하는 동인이 되었으나, 초기 한국교회의 영적 기저에 다소 엄격하고도 금욕적인 정서를 남기기도 했다. 전시된 교본 등을 통해 얀세니스트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의 흔적도 보인다. 비록 체계적인 교육 지침서를 통해 인문·자연과학·천문학까지 아우르는 당대 예수회식 첨단 교육의 위세를 당해낼 순 없었으나, 그들은 독자적인 학업 시스템을 구축하며 인재 육성을 이어갔다. 얀세니스트들과 대립했던 예수회를 풍자하고 희화화한 그림들 앞에서는 당시 첨예했던 갈등 상황도 읽을 수 있다. 대표적 얀세니스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코너는 박물관의 백미다. 그의 초상과 저서 사이에서 「팡세」의 단장들을 떠올린다. 파스칼은 몇몇 부분에 A.P.R. 표식을 남겼는데, 이는 ‘포르루아얄에서(À Port-Royal)’의 약어로 추정된다. A.P.R.이 붙은, 그러니까 그가 포르루아얄에서 쓴 문장을 인용해 본다.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인간은 비참하기에 비참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진정 위대하다.”(라퓌마 판본 122) 1709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쇄되고 파괴된 포르루아얄 데샹. 박물관을 나와 옛 수도원 터를 둘러보니 덩그러니 남은 채마밭만이 과거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오후 1시 반에 입장해 폐관 시간까지 방문자는 나 혼자였다. 방문일이 월요일임을 고려하더라도 이토록 적막할 수 있을까. 하기야 요즘 얀세니즘에 누가 깊은 관심을 두겠는가. 하지만 샤르팡티에가 남긴 미사곡 선율처럼, 그 열렬한 영성의 뿌리는 포르루아얄 폐허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샤르팡티에의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와 포르루아얄 데샹 방문기(상)

17세기 프랑스 작곡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의 음악에는 두 가지 결이 존재한다. 하나는 루이 14세 시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장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내밀하고도 영적인 교회음악을 향한 감각이다. 그 가운데 〈포르루아얄을 위한 미사(Messe pour le Port-Royal)〉는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미사는 1687년 7월 20일, 파리 포르루아얄 공동체를 위해서 작곡되었다고 추정된다. 병에서 회복된 프랑수아 드 알레 대주교를 위한 감사의 의미와, 대주교의 여동생이자 수녀원장이었던 마르가리타 드 알레의 영명 축일이 겹친 자리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미사 구조에 있다. 입당송, 화답송, 봉헌송, 영성체송에 해당하는 부분이 두 세트로 제시되어, 상황에 따라 성 프란치스코 혹은 성 마르가리타를 축일별로 선택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오빠 프랑수아, 곧 프란치스코와 누이 마르가리타의 이름이 구조 속에 중첩된 것이다. 요컨대 하나의 미사가 복수의 의미와 용도를 수용하도록 짜여 있는 셈이다. 음악적 구성 역시 독특하다. 세 명의 소프라노와 여성 합창 그리고 통주저음으로 이루어진 편성은 극도로 절제되면서도 투명한 음향을 만들어낸다. 과시하지 않는 소박한 선율이 중심을 이루고, 오르간 역시 절제되어 사용된다. 이 곡의 배경으로 우선 ‘얀세니즘(Jansenism)’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벨기에 지역인 이프르의 주교이자 루뱅대학교 교수였던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저작에서 출발한 신학적 흐름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을 강조하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보다 하느님 은총의 절대성을 부각했다. 얀세니즘은 교회와 왕권에 의해 반복적으로 단죄·탄압되고 18세기 해체되었지만, 그 엄격한 은총 중심의 영성은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잔존했다. 작품이 연결되는 지점은 흔히 떠올리는 얀세니즘의 본거지 포르루아얄 데샹(Port Royal des Champs)이 아니라, 파리 포르루아얄이다. 두 공동체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1668년 이후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우리가 기억하는 ‘얀세니즘’ 이미지는 포르루아얄 데샹에 더 강하게 남아 있지만, 미사가 울려 퍼졌던 파리 포르루아얄은 왕권과 교권의 질서 속에서 일정 부분 재편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음악에서 느껴지는 얀세니즘의 잔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 수도회와 공동체를 염두에 둔 소프라노 중심의 편성, 과장되지 않은 음색은 당시 얀세니즘이 품고 있던 방향성을 조용히 드러낸다. 이제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장소로 시선을 옮긴다. 얀세니즘의 중심지 포르루아얄 데샹을 찾았던 것은 늦가을이었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도시 경계가 끊기는 지점부터 풍경은 달라진다. 길은 조용해지고, 사람의 흔적은 희미해진다. 안내 표지조차 드물고, 주변은 지나치게 고요하다. 그렇게 홀로 걷다가, 확신이 사라질 무렵 포르루아얄 데샹 국립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편에서 계속〉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윌리엄 버드의 〈나는 부활하였다〉와 헨리 가넷 신부

1586년 여름, 템스강 북쪽 할리퍼드의 한 저택. 문을 굳게 닫은 채 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잉글랜드 선교 책임자였던 예수회원 헨리 가넷(Henry Garnet, 1555~1606)과 음악을 지휘하고 감독한 작곡가 윌리엄 버드(William Byrd, 1540~1623)가 있었다. 기록은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를 거부하고 지하로 밀려난 가톨릭 신앙 공동체, ‘레쿠전트(Recusant)’들의 실제 전례 현장을 증언한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떠받쳤다. 가넷 신부는 1586년 영국 선교를 위해 입국한 뒤, 20여 년간 가톨릭 인사들의 집을 전전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흩어진 신자들을 결집했다. 버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전속 음악가였지만,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전례와 교회음악 차원에서 공동체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이들은 당대 영국 지하교회의 서로 다른 역할이자 기둥이었다. 1605년과 1607년, 버드는 「그라두알리아(Gradualia)」를 세상에 내놓았다. 전례력에 따른 주요 축일 미사 고유문과 관련 곡들을 수록한 방대한 전례음악 모음집이었다. 문제는 첫 권이 출판된 해가 1605년이라는 점이다. 같은 해 영국 가톨릭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제임스 1세를 폭약으로 암살하려고 했던 ‘화약 음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후 반가톨릭 정서는 극도로 악화했고, 가톨릭 신앙은 자체로 정치적 불충의 표지로 간주했다. 실제로 한 남자가 「그라두알리아」 제1권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일도 있었다. 화약 음모 사건을 계기로 가넷 신부는 체포되었다. 그는 주동자의 고해성사를 통해 사전에 계획을 알게 되었고, 설득을 통해 폭력을 막으려 했으나 끝내 저지하지 못했다. 그는 국왕 암살 역모의 공모자로 몰렸고, 자신이 마지막까지 고해성사의 비밀을 수호했으며 무력행사에 반대했음을 주장했다. 그는 1606년 처형되었고, 죽음 이후 피가 묻은 짚에서 그의 얼굴 형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명 ‘가넷의 짚(Garnet's Straw)’은 순교자의 상징이 되었다. 버드는 가넷 신부 사후 17년을 더 살았다. 레쿠전트에게 청구되었던 끝없는 벌금 고지서들. 거듭된 억압과 긴장.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작곡하고 출판했다. 그의 후기 음악은 점점 더 압축되고 내밀해진다. 대성당의 공명보다는 작은 공간에 어울릴법한 음향. 다성 합창과 더불어 3성부 같은 소규모 편성을 전제한 형식들. 이것은 단순한 양식 변화가 아니라, 당시 미사가 봉헌되던 현실적 환경의 반영이었다. 「그라두알리아」에 실린 부활 입당송 〈나는 부활하였다(Resurrexi)〉를 들어본다. 5성부로 쓰인 이 작품은 은밀한 전례 속에서도 부활의 충만함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나는 부활하였고, 지금 너와 함께 있노라. 알렐루야.” 박해받는 공동체가 가사를 부를 때, 이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었으리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핍박받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위로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버드 연구자 케리 매카시는 이 곡이 거침없는 비상이 아닌, 주저와 반복을 거쳐 비로소 부활에 도달하는 음악처럼 보인다고 썼다. 그래서일까. 버드의 입당송은 부활의 승리보다는, 사라지지 않는 것, 끊어낼 수 없는 것, 종국에는 살아남는 선율처럼 들린다. 이는 400년 전 역사로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지하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공동체들이 있다.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 중국과 북한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서. 그들은 버드와 가넷 신부가 그랬듯 어둠 속 희망을 부여잡으며 성체를 나누고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이다. Resurrexi, et adhuc tecum sum, Alleluia. 나는 부활하였고, 지금 너와 함께 있노라. 알렐루야.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0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마태 수난곡〉

바흐의 서가에 도미니코회 수도자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의 강론집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외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이자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음악감독, 즉 칸토르였던 바흐가 왜 중세 가톨릭 신비주의자의 저서를 소장했을까.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작성된 유품 목록에는 81권의 신학 서적이 기록되어 있다. 바흐는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장서는 당대 신학의 다양한 조류가 반영된 ‘신학자의 서가’에 가깝다.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추구한 신앙 쇄신 운동, 이른바 ‘경건주의(Pietism)’ 관련 저작도 다수 보인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아른트, 프랑케, 스페너, 뮐러의 서적이 바흐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추구하며 개인 쇄신 및 종교 체험을 강조했는데, 그 근원은 13~14세기 독일 라인강 유역을 중심으로 피어났던 ‘라인란트 신비주의(Rhenish mysticism)’와 맞닿아 있다. 타울러는 이런 흐름의 핵심 인물이었다. 예일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볼커 레핀(Volker Leppin)은 라인란트 신비주의 계승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그 정점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가 있었으나, 그의 명제 일부가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며 그의 사상을 수용하는데 제약이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타울러는 에크하르트 신비주의를 계승하고, 때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해 전달하는 매개자가 되었다. 즉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이 무명이나 타울러의 이름으로 위장되어 필사본 형태로 조심스럽게 전해졌다면, 타울러의 저술은 인쇄물을 통해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를 통해 타울러는 라인란트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저자가 되었으며, 루터와 경건주의자들 같은 프로테스탄트 영성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바흐가 책을 소장했던 요한 아른트 역시 당대 타울러의 것으로 여겨졌던 에크하르트 강론의 영향을 받았다. 에크하르트가 강조한 ‘하느님과 인간 영혼의 일치’가 타울러를 거쳐 아른트에게 이식된 것이다. 아른트는 「참된 그리스도교」 3권 제1장에서 이렇게 적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신자의 마음 안에 거하신다. 중세 신비가 타울러가 특별히 이를 다루었다.” 이후 경건주의는 독일 전역을 휩쓴 영적 부흥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경건주의의 거점 도시 할레와 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는 마차로 불과 반나절 거리였고, 바흐는 두 도시 사이의 사상이 교차하는 궤적 한가운데 있었다. 요컨대 에크하르트-타울러-루터-아른트-경건주의-바흐로 이어지는 거대한 계보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 대한 갈망이라는 하나의 줄기로 관통된다. 바흐의 서재는 이 조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모든 흐름은 1727년 라이프치히 성금요일 저녁, 〈마태 수난곡〉 초연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작품은 복음사가가 노래하는 마태오복음 서사를 따르지만, 음악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영혼의 주관적 체험에 가깝다. 제1합창과 제2합창, 두 오케스트라가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은, 수난 현장을 중계하는 장치를 넘어 긴밀한 대화와 친교를 시각·청각화한다. 첫 합창 “오라, 너희 딸들아, 슬퍼하라”에서 시온의 딸이 신자들과 주고받는 대화는 아가서에서 이미지를 차용했으며,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 교회, 나아가 인간 영혼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며 애곡하는 이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희생되시는지 보라”고 외친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한 뒤 흐느끼는 장면에서 나오는 알토 아리아 “자비를 베푸소서(Erbarme dich)”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를 배반한 연인이, 자신을 끝까지 사랑했던 눈빛과 응시 앞에서 쏟아내는 처절한 후회요 눈물이다. 결국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인류를 사랑하시어 목숨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연가’로 읽어내는 독법은 설득력을 갖는다. 그 뿌리는 라이프치히와 할레를 지나 14세기 라인 강변에서 하느님과 영혼의 합일에 대해 말하던 에크하르트, 타울러 같은 도미니코회 수사들과 만난다. 바흐는 이 위대한 음악적 강론 도입부에서 “보라! 누구를? 신랑을!”이라고 외치며, 우리 모두가 신랑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태 수난곡〉은 비통한 수난곡이지만, 가장 위대한 사랑의 노래이기도 하다. 글 _ 박찬이 율리안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루트비히 판 베토벤 〈올리브산의 그리스도〉

베토벤은 오랫동안 ‘종교를 넘어 운명과 싸운 투사’ 혹은 ‘보편 종교의 화신’으로 생각되었다. 제9번 교향곡, 일명 ‘환희의 송가’가 발산하는 거대한 인본주의적 메시지에 가려, 그가 가졌던 그리스도교 신앙은 학계에서조차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연구는 이 오랜 도식을 상당 부분 수정하고 있다. 2016년 니콜라스 총의 논문 「베토벤의 가톨릭성(Beethoven's Catholicism)」이나 2024년 출간된 「가톨릭 베토벤(The Catholic Beethoven)」 같은 단행본은 베토벤과 가톨릭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한다. 18세기 말 독일어권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화해, 인간의 내면 및 존엄성, 교육을 강조하는 가톨릭 계몽주의(Catholic Enlightenment)가 전개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근간은 이런 독일 가톨릭 계몽주의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이 레겐스부르크 주교였던 요한 미하엘 자일러(Johann Michael Sailer, 1751~1832)를 존경했고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자일러는 독일 가톨릭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베토벤은 그의 책을 세 권이나 소장했다. 또한 베토벤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 독일어판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자일러가 번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일러는 개신교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종교적 관용성을 주장했고,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공격받기도 했다. 그의 초기 에큐메니컬 사상이 베토벤의 초교파적 신념과 유사성을 보이며, 훗날 제2차 바티칸공의회까지 연결된다는 점은 의외의 연결고리가 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8년 자일러를 독일 교회 쇄신의 인물로 언급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2007년 연설에서 그를 인용하기도 했다. 일련의 흐름에서 중요하게 부상하는 작품이 1803년 초연된 오라토리오 〈올리브산의 그리스도〉다. 이는 베토벤 초기작이라는 이유로, 〈장엄 미사〉에 비해 덜 완숙하다는 평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 곡이 베토벤의 종교성과 실존적 위기를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십자가 사건보다 겟세마니의 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 갈등과 고뇌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듯, 베토벤은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서 난청으로 인한 절망을 토로한다. 음악가로서 청력을 잃는다는 공포,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까지 고백한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예술이었고, 유서 이후 베토벤은 〈올리브산의 그리스도〉를 작곡한다. 친연성은 강렬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도 끝내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는 모습은, 절망 속에서 결국 살기로 결심한 베토벤의 내적 서사와도 유사하다. 그래서 이는 베토벤 자신의 번민을 우회적으로 기록한 음악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밤이 베토벤의 어두운 밤과 겹치는 순간이다. 그리스도를 테너로 설정해 극 중심에 세운 방식은 인상적이다. 그는 멀리서 낭독되는 존재가 아니라,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통해 고통과 순명의 결단을 노래하는 주인공이다. 초연 이후 이 곡이 “지나치게 오페라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성격 덕분에,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뇌는 청중에게 훨씬 밀접하게 다가온다. 베토벤은 이런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안과 흔들림을 담은 대목들에서는 전조와 반음계적 진행이 심리적 동요를 묘사한다. 선율 또한 상행하거나 도약 후 급히 하강하거나 가라앉는 식으로 쓰여 있어, 영혼이 한순간 솟구쳤다가 이내 무너지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리브산의 그리스도〉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순종과 응답, 고통과 결단, 감정과 초월의 긴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을 통해 베토벤은 그리스도교 역사와 당대 종교 문화 맥락을 생생히 조망할 수 있는 좌표가 된다. 최근 ‘가톨릭 베토벤’ 연구들이 이 오라토리오에 주목하는 이유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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