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문을 여는 일

봄이 오면 꽃이 핍니다. 목련이 가장 먼저 봄의 시작을 알립니다. 3월, 초등학교 담장의 개나리가 등교하는 아이들을 반기려는 듯 고개를 내밉니다. 4월, 봄의 절정을 축하하며 벚꽃이 만발합니다. 이팝과 조팝이 하얀 눈이 내리듯 소복소복 피어납니다. 5월, 눈길이 닿는 곳마다 철쭉이 만개하고 담벼락을 감싼 넝쿨 장미가 흐드러집니다. 6월, 수국과 작약이 고봉밥처럼 그득그득 소담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길가 돌담 틈, 계단 층계, 보도블록 사이에 핀 작은 꽃들을 놓칠 순 없습니다. 미세한 틈바구니에 아주 작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은 식물도감을 펼쳐 꽃 이름 찾기 놀이를 했습니다. 꽃다지, 괭이밥, 개불알풀, 제비꽃, 봄맞이꽃, 돌단풍…. 두 아이에게서 작은 꽃들의 이름을 배웠습니다. 크고 작은 봄꽃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피어나 어느새 멋진 풍경이 됩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봄날이면, 엄마 소피아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냉장고에는 보리차가 든 큰 주전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목이 마르면 우리 집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보리차를 꺼내 마실 수 있었습니다. 놀다 보면 어느새 허기가 졌고 그 무렵 전 굽는 냄새가 나곤 했습니다. 마당의 평상에서 소피아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그날그날 감자나 호박을 썰어 전을 부쳤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집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서 평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소피아가 부쳐놓은 전을 양손으로 죽죽 찢어 잘도 먹었습니다. 소피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이 마당에 핀 봄꽃들만큼이나 예쁘다고 했습니다.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이 어릴 적에 엄마 소피아가 그랬듯이 저, 클라라 역시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현관에는 금세 아이들 신발이 뒤섞였고 아이들은 “배고파요” 하며 부엌을 기웃거렸습니다. 밥에 소금과 볶은 깨, 참기름을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날그날 멸치볶음이나 김자반을 추가해 주먹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 식탁에서 주먹밥을 먹는 아이들이 아파트 화단에 핀 봄꽃들만큼이나 예뻤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혈연이라는 담장을 넘어 가족이 확장될 가능성을 말이지요. 엄마 소피아가 대문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초대했던 것처럼 저, 클라라 역시 현관문을 열어 아이들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되었으니까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자캐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사람들이 수군거렸음에도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날 자캐오의 집은 환대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사랑은 문을 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숟가락 하나를 더 꺼내는 손길이며, 조금 옆으로 당겨 앉는 몸짓입니다. 봄꽃의 향기가 담장을 넘듯, 가족이 혈연이라는 담장을 훌쩍 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 식탁이 자캐오의 집처럼 환대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나는 봄날의 풍경이기를 바랍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곁에 있는 이름입니다

가족은 늘 곁에 있던 존재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가족의 기척 속에 살아갑니다. 현관문 여는 소리, 부엌에서 들리는 물소리, 늦은 밤 돌아와 “나야” 하고 말하던 목소리. 가족은 설명보다 먼저 기척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가까워 고마움을 잊고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 삶의 바탕에는 늘 그 기척이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가족의 기척이 따뜻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상처를 남긴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이미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곁에 다시 서는 관계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신앙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신비를 다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계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고, 그들의 부르짖음 안에 계시며, 역사의 한복판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느님은 보시는 분이고, 들으시는 분이며, 아시는 분입니다. 멀리서 관찰하듯이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삶 한가운데서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은 차가운 정의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 “내가 네 곁에 있다”고 들려오는 응답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물며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사람들 삶의 바탕에 늘 함께하는 관계 가족도 그렇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고통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압니다. 말투가 달라진 것을 알고, 밥을 남긴 이유를 짐작하고, 문 닫는 소리로 마음의 날씨를 느낍니다. 가족은 서로를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다치게도 하지만, 가장 오래 기억해 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사랑은 다정한 말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묻지 않고 기다리는 침묵, 식탁 위에 남겨 둔 반찬, 무심한 듯 건네는 안부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처럼 멀리 세우지 않으시고, 친구처럼 곁에 두십니다. 교회 안에서 기억되어 온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도 이 마음을 전합니다. 가난하고 두려운 사람들 곁에서 성모님의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너희 곁에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알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는 뜻밖에 깊이 닮아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나야” 하고 돌아오는 목소리, 말없이 차려 놓은 밥상, 끝내 잊지 않고 불러 주는 이름입니다. 가족이니까 가능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곁에 있는 일입니다. 보아 주는 일입니다. 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그렇게 계시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가족이 되어 가는 중인지 모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스스로에게 예쁘다고 말해 주는 일

카타리나는 눈이 큽니다. 동공 크기가 보통 3에서 5밀리미터 사이라는데, 카타리나의 동공 크기는 6밀리미터가 넘습니다. 큰 눈동자에 진한 쌍꺼풀과 짙고 긴 속눈썹이 더해져 카타리나를 보는 이들은 감탄하곤 했습니다. “눈이 참 예쁘구나”라면서요. 엘리사벳은 눈이 그리 크진 않습니다. 작은 눈은 아니지만 카타리나 옆에 있으면 작아 보였습니다. 엘리사벳이 웃으면 가느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둥글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언니는 눈이 큰데, 너는 눈이 작구나”라고요. 카타리나가 중학교 1학년이고 엘리사벳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와! 정말 예쁜 눈이야.”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카타리나의 눈에 주목했습니다. 엄마인 저, 클라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좁은 공간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에게만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 불편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특히 카타리나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엘리사벳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우리 엘리사벳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고요. 엘리사벳이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 한마디에 그동안 졸였던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저, 클라라는 스스로를 못났다고 여긴 적이 많았습니다. 비단 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울 속 제 모습에서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한숨만 나왔습니다. 얼마 전, 이제는 고등학생인 엘리사벳에게 “우리 엘리사벳,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 알지?”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고단한 고등학생에게 건네는 응원의 말이었습니다. “그럼요. 제가 엄마 닮았잖아요.” 엘리사벳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날 닮아 예쁘다고?’ 엘리사벳은 분명히 예쁘지만 저, 클라라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었기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마구 생겨났습니다.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이 뱃속에 있었을 땐 심지어 아이가 저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구일기도를 바칠 정도였으니까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엘리사벳처럼 예쁘게 웃어봅니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볼에 보조개가 파이는 모습이 엘리사벳을 꼭 닮았습니다. 하느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오래도록 스스로를 혐오하며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불현듯 “우리 클라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는 저, 클라라 역시 “저도 알아요”라고 화답하고 싶습니다. 저를 만드신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엘리사벳이 제게 했던 대로 말이지요. 하루를 마무리한 후 자리에 누워 아가서 구절을 읊습니다. 오십 대 중년을 지나는 클라라에게 해주는 응원의 메시지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 2,10)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클라라야, 너는 참 예쁘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는 일입니다. 부푼 가슴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 (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아리고 쓰린 고개마다, 함께 부르는 노래

강원도 정선의 한 성당 벽에 예수님이 고개를 넘고 계십니다. 골고타의 길이 정선의 산길 위로 옮겨 온 듯합니다. 원주교구 정선본당은 지난 3월, 정선아리랑과 예수님의 수난을 잇는 ‘골고타 아리랑 십자가의 길’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선의 산길을 오르시고, 그 길 위에 아리랑 가락이 얹힙니다. 본당 주임 이동훈(프란치스코)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셨다면, 아마 아리랑을 부르셨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 한쪽이 젖어 듭니다. 아리랑은 흥겨운 노래이기 전에, 고개를 넘는 노래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혼자 견디기 어려운 길,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넘어야 하는 길에서 흘러나온 노래입니다. 정선아리랑에는 깊은 한이 배어 있습니다. 척박한 산골의 삶,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마음이 긴 가락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절망의 노래로만 남지 않습니다. 부르는 사람의 숨을 타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지나, 함께 견디는 노래가 됩니다. 아리랑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픔을 없애 주지는 못하지만, 아픔을 혼자 두지 않습니다. 아리고 쓰린 마음 곁에, 아리랑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붙입니다. ‘나’의 고통이 ‘너’에게 건너가고, ‘너’의 한숨이 ‘우리’의 노래가 됩니다. 사랑은 때로 이런 작은 합창에 가깝습니다. 복음서에도 그런 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태 26,30; 마르 14,26)고 전합니다. 배신과 죽음이 다가오는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노래하시고, 그 노래를 품고 수난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이 찬미가를 시편 136장과 연결합니다. 이 시편은 창조와 탈출, 사막과 해방의 역사를 노래하면서 절마다 같은 후렴을 붙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험한 기억에도 자비의 후렴을 붙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노래입니다. 가족의 시간에도 그런 후렴이 필요합니다. 가족은 아픔이 없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의 아림과 쓰림이 가장 가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쉽게 서운해지고, 익숙한 얼굴 앞에서 깊이 침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평화가 아닙니다. 아픔 뒤에 다시 붙이는 후렴입니다. 실망 뒤에 다시 말을 거는 일. 상처 뒤에 다시 식탁에 앉는 일. 마음이 닫힌 밤에도 내일 아침밥을 차리는 일. 미안하다는 말이 아직 나오지 않아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다시 놓아주는 일. 사랑은 늘 뜨거운 감정으로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반복으로 옵니다. 같은 자리에 다시 앉고, 같은 이름을 다시 부르며, 관계의 고개마다 다시 ‘함께’라는 가락을 붙이는 일로 옵니다. 정선의 고개마다 아리랑이 흘렀듯, 우리 가족의 고개마다 어떤 노래가 흘렀는지 돌아봅니다. 기쁜 날의 노래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아프고 서러운 날에도 끝내 함께 불렀던 노래인지 모릅니다. 아리고 쓰린 생의 고개마다, 우리 가족은 아직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있는지요?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아빠 베드로는 이제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이 울리면 초록색 동그라미를 오른쪽으로 밀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 소피아가 백 번을 넘게 말해도 소용없답니다. 이제 팔순이 넘은 베드로는 이미 수년 전에 인지장애 판정을 받았고 작년에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클라라는 늘 베드로가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고 경기도 파주에서 경상남도 밀양까지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갈 수는 없기에 영상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전화를 받지 못하니까 소피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화면 속 아빠 베드로는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엄마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느그 아빠 니가 사 준 옷 입고 있다, 지금”, “니 첫 월급 받았을 때 백화점에서 사 준 옷 있다아이가.” 첫 월급이라니요. 그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중간고사 마치고 첫 직장에 취업했으니 1998년 늦가을이었을 것입니다. 첫 월급을 받고 나서 샀다면 정확히 27년 전 한겨울이었을 텐데, 그 옷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니요. 이제 완연한 봄 날씨인데, 베드로는 계절을 상관없이 27년 전의 그 따뜻한 온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하면서요.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셨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 각자 가진 고유의 아름다운 어떻게 찾고 사랑해야 할까 저, 클라라는 베드로가 정신이 또렷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제가 베드로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나는 건강하게 타고났는데도 나이가 들어서 (건강 상태가) 이 모양인데, 니는 약하게 타고났으니 나이가 들면 더 힘들끼다. 니 걱정이나 해라”라고 했고, 제가 소피아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느그 엄마는 내가 잘 챙길끼다. 그러니까 니는 니나 잘 챙기라” 했었습니다. 그랬던 아빠 베드로가 이제 엄마 소피아 없이는 전화도 받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마음만큼은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약하게 타고난 딸 클라라가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진정한 성인이 되었던 그날, 어쩌면 클라라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을 그 순간 말이지요.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지혜서를 읽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기도 지향은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 베드로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며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일과는 제가 사 드린 옷을 입고 집 앞 골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쓰레기를 줍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좁은 길을 쓰는 일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깨끗이 씻고 하루하루 생을 정돈합니다. 그 모습에서 젊은 베드로가 매일 어린 클라라의 구두를 닦았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소멸해 가는 존재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참 아름답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먹이고 돌보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두고 흔히 ‘방귀를 튼 사이’라고 말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가족의 본질을 꽤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가족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사이입니다. 숨길 것도 체면도 없이 서로의 습관과 약점까지 아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에게 엉겨 붙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호르몬이 작용합니다. 자극을 찾게 하는 도파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 스트레스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 같은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사랑 호르몬’이라는 별칭을 가진 호르몬이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은 손을 잡거나 포옹할 때,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분비됩니다. 옥시토신이 충분히 분비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안정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연결될 때 안정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힘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두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로 설명합니다. 에로스는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이고, 아가페는 자신을 내주는 사랑입니다. 가족은 이 두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살게 하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의 첫 장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숯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행동은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식사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세 번 명령하십니다. 전례용 성경에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리듬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여라.” 예수님은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동사’로 보여 주십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게 하는 행동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차려 주고, 지친 사람을 돌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족의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함께 식탁에 앉고, 서로의 하루를 묻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는 경쟁과 성취를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이루라는 압박이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경쟁이 아니라 사랑에서 옵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합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함께 어우러진 사랑, 그것이 가족의 근간입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사랑의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는 사랑. 그것이 가족을 이루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발을 씻어 주는 일

클라라가 만삭이었을 때 일입니다. 엘리사벳이 태어날 즈음, 클라라는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신발 가방을 따로 챙겨야 했습니다. 두 발은 무거워진 몸을 지탱하기가 힘겨워 보였습니다. 아침에는 괜찮았던 발이 시간이 지날수록 부어서 퇴근할 무렵이면 출근할 때 신었던 신발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퉁퉁 부은 발이 들어갈 만한 큰 사이즈의 신발을 넣은 신발 가방은 만삭 임산부의 필수 지참물이 되었습니다. 직장 동료가 말린 쑥을 챙겨주었습니다. 미지근한 물에 넣고 불린 다음 발을 담그면 부기가 가라앉을 거라고 하면서요. 집으로 돌아와 쑥물에 족욕을 했습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루를 버텨 준 두 발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양손으로 구석구석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했을 뿐인데도, 발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온몸으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좋은 곳에 갈 때 가족이 떠오르는 것처럼 족욕의 기쁨도 가족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카타리나를 불러 식탁 의자에 앉혔습니다. 쑥물이 담긴 대야 두 개를 두 사람 발 앞에 각각 두었습니다. 두 발을 담그라고 하자, 두 사람은 클라라를 빤히 쳐다볼 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발이 더럽고 냄새도 날 거라며 발을 내보이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 클라라는 곧 자신의 발을 씻은 그 방식대로 두 사람의 발을 담그고 천천히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날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세족식을 한 날입니다. 만삭의 몸으로 두 사람의 발을 씻어 주던 그날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하루 종일 신사용 검정 구두 안에 갇혀 건장한 남성의 체중을 견디며 분주하게 움직였을 큰 발과 엄마 아빠가 일하는 사이 다섯 살의 세상을 누볐을 작은 발. 클라라는 그 발들을 씻으면서 그들이 보낸 하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의 세족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 클라라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은 ‘발을 씻어 주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언젠가 친한 친구의 발에 통풍성 관절염으로 심한 부종이 생긴 걸 본 적 있습니다. 그의 발을 씻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의 발을 씻어 주는 대신, 그의 아픔을 목격하며 얼마만큼 아픈지 어쩌다 아프게 되었는지 도울 일이 있는지 그의 말을 천천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게 발을 씻어 주는 일의 의미는 아픔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지치고 고단했을 발을 씻어 주는 시간, 온몸으로 사랑이 전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자주 서로의 발을 씻어 줍니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하루의 무게가 물 안에 풀어지고, 손끝으로 전해진 온기가 다시 몸으로 스며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나누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 갑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공부는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만난 황용연(바오로 예레미야) 신부님은, 훗날 이태석(요한)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이끈 분이십니다. 황 신부님은 중학생인 저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사흘을 굶은 사람이 빵집 유리창을 깨고 빵을 꺼내 먹었다면, 그 사람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저희는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 나라 법으로 무죄입니다.” 그 말은 세상의 법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공부를 평가와 비교의 언어로 배워 왔습니다. 얼마나 잘했는지, 누구보다 앞섰는지를 묻고 답하는 데 익숙합니다.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고,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가족과 나누지 않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들꽃을 가리키시며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아라”(마태 6,28) 하십니다. 무엇을 먹고 입을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먼저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불안을 덜어 내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공부는 평가하기 전에 먼저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바라봄은 경탄을 낳고, 끝내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서게 합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12,34),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복음은 생각보다 거칩니다. 그 거친 언어는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목소리입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 앞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는 점수에는 민감하지만, 불의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의 점수는 묻지만,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결과를 요구하는 데 익숙합니다. 예수님의 공부는 우리를 머물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경탄은 우리를 바라보게 하고, 그 바라봄은 끝내 정의를 찾게 합니다. 공부는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공부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설 것인지, 외면당한 이들과 함께할 것인지, 이런 선택들이 우리가 무엇을 배웠는지를 드러냅니다. 분노가 감정으로 흩어지지 않고 삶의 방향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공부는 가족 안에서 드러납니다. 자녀는 버티고 있는데, 우리는 결과를 먼저 묻습니다. 함께 견디며 머무르는 일에는 서툽니다. 그렇게 자녀는 우리 곁에서 자라지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함께 배웁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이해하려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부는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기보다, 더 깊이 바라보고, 외면하지 않으며, 끝내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성당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가족 독서

카타리나가 일곱 살이고 엘리사벳이 세 살이었을 때 저, 클라라는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경기도 파주시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처음 성당을 방문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엘리사벳을 유아차에 태워 카타리나와 함께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성당에 갔습니다. 성당에 들어가 맨 앞자리에 앉아 세 모녀가 두 손을 모았습니다. ‘이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몇몇 여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함께 구일기도를 하는 자매님들이라 소개하며, 본당의 새 가족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은 구일기도의 마지막 날이었고, 마침 새 가족이 들어와 더욱 반갑다고 하시며, 앞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이런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당시에는 반가움이나 고마움보다는 예상치 못한 환대가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줍고 민망해 뒷걸음치다, 성당 앞마당 한 구석의 컨테이너를 발견하였습니다. 컨테이너 문 앞에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아이를 교육하기 전에 나를 먼저 교육해요 아이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부모 아이 잘못을 나무라기 전에 먼저 이해해 주는 부모 사교육 없이 아이를 키워도 주눅 들지 않는 부모 옆집 아이가 잘해도 부러워하지 않는 부모 대안교육의 길을 열어주는 부모가 되기 위해 공부합니다. 어떻게 공부할까요? 어린이책을 읽고 토론합니다. 어른책도 읽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봅니다. 컨테이너는 도서관이었습니다. 컨테이너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에 감탄했습니다. 지역 도서관이 없던 시절, 지역 여성들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만들고 월 만 원의 회비를 걷어 헌책방과 출판 단지를 돌며 싼 값에 책들을 사들였다고 했습니다. 책들이 쌓이자 서가를 만들고 라벨링해 관리했다고요. 지역 여성들이 뭉쳐 십시일반 힘을 모아 만든 컨테이너 도서관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역 어린이들에게 책을 이용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공연장으로, 사랑방으로, 벼룩시장이나 나눔 장터를 하는 행사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당 앞마당 컨테이너 도서관을 중심으로 공동 육아와 사교육 없는 자립 교육이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아!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2011년 봄날의 깨달음은 2026년 봄날에도 유효합니다. 그때 컨테이너 도서관을 드나들며 가족이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하던 시간은, 장소만 공공도서관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날의 깨달음을 기억하며 클라라, 아우구스티노 부부는 함께 가족인문학연구소를 운영하며 널리 가족 독서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새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가족 독서의 시작을 열어 주신 여성 동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정답을 넘어서 함께 머무르는 공부

성경을 읽다가 문득 멈출 때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좀 불편합니다.”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항합니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꺼내면 종종 이런 말이 돌아옵니다. “그건 너무 나간 해석이야”,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마.” 어느새 그 말은 타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가 됩니다. 흔들림은 흔히 위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믿음은 단단해야 하고, 신앙은 안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천천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세리와 식탁에 앉으셨고, 안식일의 질서를 뒤흔드셨고,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냐”(마르 3,33)고 물으셨습니다. 가족과 혈연, 권위의 경계까지 다시 묻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위로이기 전에 먼저 불편함이었습니다. 익숙한 자리를 흔들어 놓는 말씀이었습니다. 불편함을 믿음의 위기로 오해하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아무 질문도 남지 않고, 아무 저항도 느껴지지 않을 때, 그때야말로 신앙이 멈춘 것은 아닐지요. 불편함은 믿음이 살아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언어와 자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움직임입니다. 신앙의 여정뿐 아니라 공부 또한 그러합니다. 공부는 나를 옳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묻게 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 온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공부, 그것이 예수님의 공부법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불편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이의 선택이 부모의 기대와 어긋날 때, 배우자가 이전과 다른 길을 말할 때, 부모 세대와의 대화가 자꾸만 충돌로 끝날 때. 그때 우리는 일단 설득하려 하고, 보다 강하게 통제하려 합니다. 불편함을 서둘러 정리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가족이 할 수 있는 공부는 다른 길일지도 모릅니다. 견디며 곁에 머무르는 일. 쉽게 답을 내지 않고, 관계를 서둘러 끊지 않는 일. 불편함은 관계의 결렬이 아닌,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히 무관심해졌다면 우리는 아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픔이 있다는 것은 아직 관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불편함이 없는 상태를 더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이 보여 주는 평화는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마음이 함께 머무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불편함을 밀어내지 않고 그 안에 함께 머무를 수 있을 때, 관계는 조금씩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단번에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남기시고, 시간이 흐르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품도록, 그 질문이 삶이 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때로는 정답이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주어진 답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불편함을 듣고 그 안에 함께 머무르며 우리가 걸어갈 길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식탁은 어떠한 자리입니까. 정답만을 점검하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서로의 불편함을 드러내고 함께 머무르며 길을 찾아가는 자리입니까.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 (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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