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크로 스페코, 프란치스코의 영감과 영성이 넘쳐 흐르는 곳

아시시와 로마의 중간에 있는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 수도원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나르니 인근 산트우르바노 마을과 바시아노 마을 사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푸르른 곳에 비둘기 둥지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알레 델 페르도노(용서의 길)’ 끝에서 만나는 이 수도원은 15세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 시절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213년 몇몇 형제들과 이곳을 찾은 프란치스코는 기원후 1000년 무렵부터 베네딕도회 은수자들이 사용하던 성 실베스테르 경당을 만나게 됩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기로 하고, 각자 은수자처럼 기도할 수 있는 자연 동굴을 찾아 개인기도 시간을 갖다가 저녁이 되면 경당에 모여 공동 기도를 했습니다. 제대 뒤편에는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프란치스코를 예수님께 안내하는 듯한 성모 마리아, 오른편에는 사도 요한과 성 실베스테르 교황의 모습이 있습니다. 경당 옆에는 성인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일으킬 때 사용한 우물이 있습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최초로 쓴 토마스 첼라노(1185~1260)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산트우르바노 마을 근처에서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성 프란치스코는 나른한 목소리로 포도주를 요청했지만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성인은 물을 요청했고, 십자 성호를 그어 축복했습니다. 그러자 물은 성질이 바뀌어 다른 맛을 갖게 됐습니다. 한때 순수한 물이었던 것이 훌륭한 포도주가 됐고, 가난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거룩함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 포도주를 마신 성 프란치스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만약 그 변화가 놀라운 치유의 원인이었다면, 그 놀라운 치유 자체가 기적적인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은총 때문에 이곳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처럼 ‘프란치스칸의 카나’라고 불립니다. 경당과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14세기에 사각 회랑이 더해졌습니다. 15세기에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회랑 위 2층에 수도자들의 독방 여섯 개를 마련했고, 그 아래는 형제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동 식당을 두었습니다. 사각 회랑은 수도원 안의 여러 공간을 이어 주는 전형적인 정원이자, 형제들의 삶을 이어 주는 소통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의 사각 정원은 더욱 특별합니다. 세 면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나머지 한 면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서면 사람과 자연과 하느님이 함께 머무는 듯한 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수도원 밖으로 나와 십자가의 길 14처가 만들어진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기도소가 함께 붙어있는 작은 경당에 도착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자주 기도했지만, 건강이 나빠지자 형제들은 그를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로 작은 독방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나무로 된 침대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인이 병중에 사용했던 나무 침대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몸이 아픈 프란치스코가 성 실베스테르 경당까지 내려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형제들은 독방 옆에 기도소를 마련했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이 되면 형제들은 경당이 아니라 이곳으로 올라와 함께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기도소 벽에는 프란치스코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과 관련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독방 옆에는 ‘천사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돌탑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영혼까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프란치스코가 기도로 위로를 청하자 천사가 나타나 바이올린으로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돌탑은 그 은총의 순간을 기념합니다. 독방 앞 초원에는 수백 년 된 밤나무가 서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곳을 떠나기 전 두 팔을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인사를 하고, 그곳에 자신이 아플 때 사용한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자라서 튼튼한 밤나무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기도소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성인이 자주 기도하던 갈라진 거룩한 바위 동굴을 만납니다. 갈라진 바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창에 찔려 성혈이 흐르는 늑골을 상징하기에, 프란치스코에게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일치하기 위한 충분한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날을 머물며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숨소리로 고요하고 어두운 갈라진 바위 동굴을 채웠고 눈물로 땅을 적시어 구세주의 수난을 큰 소리를 내며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은 포도주의 기적으로 육적인 위로를, 천사의 음악으로 영적인 위로를 주신 주님 사랑이 꽃피운 장소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위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온전히 일치하려 했던 프란치스코의 슬픔이 깊이 배어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몬테루코 성지, 성스러움 가득한 숲속 은둔소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스폴레토(Spoleto) 남쪽, 해발 800m에 자리한 몬테루코(Monteluco)는 ‘산’을 뜻하는 Monte와 ‘성스러운 숲’을 뜻하는 lucus에서 유래했습니다. 수백 년 된 상수리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들어서면, 이름에 담긴 의미를 모르더라도 사방에서 밀려드는 거룩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신성한 숲은 기원전 3~2세기에 제정된 ‘스폴레토 숲의 법(Lex Luci Spoletina)’에 따라 보호되어 왔습니다. 스폴레토 지역의 신성한 숲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한 이 법은 최초의 산림법 가운데 하나로도 여겨집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기원후 5세기부터는 시리아에서 온 수도자들이 성지 안에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 경당을 세우고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던 수도자들은 이 경당을 은둔 장소로 이어 오다, 1212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프란치스코에게 사용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1218년 프란치스코는 초기 형제들과 함께 카타리나 경당 주변에 나뭇가지와 진흙, 석회로 독방들을 만들고, 은둔 생활과 공동 기도 생활을 함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선교 활동에서 벗어나 은둔하기 위해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1205~1206년, 그가 기사 복장을 하고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주로 향하던 길에 스폴레토에서 처음 신앙의 소명을 느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난 장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듯, 스폴레토에서 들은 주님의 음성은 프란치스코가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한 힘이었을 것입니다. 15~16세기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 정원의 몬테루코 성지 입구를 지나면, 프란치스코가 기적적으로 물을 솟아나게 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나옵니다. 그 옆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소’라고 불리는 경당이 있습니다. 초기 형제들이 사용했던 다른 공간들처럼 이 경당도 본래 자연 동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경당 안 제대를 받치고 있는 돌은 프란치스코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잠을 잤던 자리로 전해집니다. 우물 왼쪽으로는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들 때부터 1960년대까지 사용한 독방들이 이어진 좁은 복도가 나옵니다. 성지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은둔 생활에 관한 규칙서를 작성했는데, 그 안에서 강조한 것은 홀로 고립되는 고독이 아니라 형제애였습니다. 은수자는 셋이나 넷을 넘지 않도록 했고, 두 사람이 마리아처럼 주님 곁에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면, 나머지 두 사람은 안주인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역할을 바꾸어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일을 우선하도록 한 것입니다. 가로세로 2m 크기의 작은 방 일곱 개로 지어진 은둔소에는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방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좁은 창문으로 희미한 빛만 들어옵니다. 푹신한 침대 대신 널빤지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몇 가지 물건과 함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무문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방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마치 시간이 800년 전에 멈춘 듯 모든 방에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눈을 감으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방들은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성인과 복자들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오랜 기간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성 보나벤투라(1217~1274),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 파올루치 트린치(1309~1391)를 비롯해 이름 없는 많은 수도자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이 이곳을 찾은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다가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셨던 것처럼, 형제들도 이 거룩한 숲에서 스스로 고독을 택했습니다. 이 고독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홀로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중 성 안토니오는 1221년 시칠리아 여행 중 이 은둔소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숲속 깊은 곳, 접근하기 어려운 동굴 가운데 하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몬테루코 성지에 성 안토니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바로 스폴레토 대성당에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시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몬테루코 숲의 신성한 분위기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듯합니다. 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험준한 바위 능선 사이에 보물처럼 숨겨진 작은 동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동굴들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를 비롯한 여러 성인이 머물렀던 곳이며, 그들은 이곳에서 온전히 은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숲속 끝 전망대에서는 스폴레토 계곡의 푸르름에 둘러싸인 스폴레토 마을, 요새, 두오모 대성당 등 역사적 중심지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광활한 풍경은 프란치스코의 영혼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벨베데레 벽에 새겨진 것처럼 “nil iucundius vidi valle mea spoletana(스폴레토 계곡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카르체리 성지, 하느님이 계신 곳에 평화 있다

해발 800m에 있는 ‘에레모 델레 카르체리(Eremo delle Carceri)’는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약 6km 떨어진 수바시오산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고요한 성지입니다. 이곳은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은둔하며 묵상에 잠기고, 더욱 간절한 기도 생활을 하며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곳입니다. ‘카르체리(Carceri)’는 라틴어 카르세르(carcer)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울타리’를 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과 떨어져 머무는 외딴 장소, 곧 은둔소를 의미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카르체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두는 안식처이자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의 제자이자 작가인 첼라노의 토마스가 그의 책에서 기록한 다음의 글에서도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는 영혼만이 아니라 몸까지도 주님과 하나 되려고 늘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녔고, 장소가 없으면 망토로 방을 만들었으며, 망토가 없으면 옷소매로 얼굴을 덮었고, 옷소매마저 없으면 가슴에 성전을 만들었다.” 또한 그가 머물렀던 여러 은둔소에는 공통적으로 바위와 물이라는 상징이 나타납니다. 바위는 든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고, 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성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카르체리 역시 이러한 영성을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 전쟁(1202년) 패배와 1년간의 감옥 생활 이후 아시시로 돌아와 이곳에서 은둔하며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홀로 잠자고 기도하던 프란치스코의 바위 동굴 은둔소에는 웅크려 누울 정도의 공간만 남아 있지만, 진정한 자유는 귀족으로의 신분 상승이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주인이신 예수님과 하나 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가난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형제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그리고 모든 이와 자신의 것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눔은, 줄어듦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해지는 주님의 현존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머무르며 기도했던 이 장소를 중심으로 15세기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설교자인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성인에 의해 여러 수도자가 머물 수 있는 수도원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계신 곳에 평화 있다(Ubi Deus, ibi pax)’라고 적힌 문을 지나면 두 개의 우물이 있는 회랑, 사방이 막힌 사각형 구조의 정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외형적으로는 삼각 정원처럼 보이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수도원 구조와 공간적 의미를 고려하면 ‘무형의 사각의 정원’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수도원의 우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물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공동체 생활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베르나르디노 성인의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예수는 세상의 빛, 태양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상징하는 ‘IHS’ 문양이 새겨진 문을 지나면,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공동 식당이 있습니다. 성당이 기도를 하는 영적 양식을 위한 공간이라면, 식당은 육체적 양식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모든 식사를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수도자의 앞자리는 항상 비워 두었습니다. 식당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15세기에 조성된 수도자들의 독방으로 이어집니다. 바위 절벽과 맞닿은 복도 사이에 자리한 이 독방들은 침묵과 인내, 기도와 찬미의 삶을 상징합니다. 프란치스코가 머물렀던 동굴 옆에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기도소인 ‘성모 마리아 경당’이 있습니다. 초기 형제들이 함께 기도하던 이곳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은 채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제단화가 있는데, 이는 1506년 아시시의 티베리오가 그린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제단화 안에는 13세기에 그려진 십자가상 제단화가 겹쳐 있습니다. 아기 예수와 십자가의 예수를 겹쳐 표현함으로써, 육화하신 아기 예수님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자신의 희생을 아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앉아 계신 성모님은 더욱 깊은 위로로 다가옵니다. 프란치스코의 동굴 밖으로 나오면 절벽 아래 구멍이 뚫린 붉은 돌바닥이 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들」 29장에는 이곳에서 루피노 수사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루피노에게 재치 있게 대응하도록 권했고, 그 말에 격분한 악마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돌에 구멍을 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유혹에 흔들릴 수 있지만, 인내와 믿음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지금은 물이 마른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설교할 때 새들이 머물렀던 나무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대부터 존재해 온 나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곳부터 오래된 참나무 숲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 10항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그는 신비주의자이자 순례자였으며, 하느님과 타인, 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보다 ‘하느님 계신 곳에 평화 있다’는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포르치운콜라 경당, 성모님의 보금자리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돔 아래 작은 경당 하나가 마치 특별한 보석처럼, 동시에 겸손한 여인처럼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로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 경당입니다. 이 경당은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입니다.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이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수도회 인준 이후 공식적인 가난의 수도 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발현하시어 회개한 이들에게 ‘완전한 용서’, 곧 전대사를 약속하신 거룩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경당은 프란치스코와 잘 어울리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포르치운콜라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 포르치오네(porzione, 작은 몫)와 아그리콜라(agricola, 농사 또는 농부)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즉 ‘작은 몫의 땅’, 다시 말해 매우 작은 장소를 의미합니다. 6세기경부터 존재했던 이 경당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역 수바시오 산(Monte Subasio)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유였습니다. 이곳은 수도원 농장에서 일하던 수사들과 사람들이 기도 시간에 사용하던 장소였습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려 하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이를 무상으로 내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이 작은 경당마저 소유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해마다 한 번 물고기 한 바구니를 바치며 이곳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경당 전면 벽에는 세 차례에 걸쳐 복원된 벽화가 있었으나, 현재 작품은 1829년 독일 화가 요한 프리드리히 오버벡(Johann Friedrich Overbeck)이 다시 그린 것입니다. 이 벽화는 성모님의 전구로 포르치운콜라의 완전한 용서를 예수님께 받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포르치운콜라는 1206년 프란치스코가 성 다미아노 성당과 아시시 지역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수리한 뒤, 1208년 세 번째로 수리한 경당입니다. 그래서 경당 내부의 벽돌에는 성인의 손길을 느끼고자 했던 많은 순례자의 손길이 더해졌고, 그 거친 표면은 사라져 하느님의 사랑처럼 부드럽게 남아 있습니다. 1209년 마티아 사도 축일에 들은 복음 말씀(루카 9,1-6 참조)으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설교를 시작했고, 더 많은 형제를 받아들이며 세상 곳곳에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돗자리 총회를 통해 자신들이 한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포르치운콜라는 프란치스코 형제들에게 영적인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1216년 프란치스코는 이곳 인근에서 장미의 기적을 체험한 뒤,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기도 중 환시를 통해 예수님과 성모님을 뵙고, 성모님을 통해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전대사를 청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전구를 받아들여 그 청을 허락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이 전대사는 그전까지 교회 안에서 시행되던 전대사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 당시 전대사가 일정한 조건과 대가를 요구했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조건적이고 금전적 대가가 필요한 전대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예수님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전대사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아시시의 용서’는 은총이라는 말의 뜻처럼,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아무런 대가 없는 선물입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위대함이 나타납니다. 정확히 300년 후인 1517년 마르틴 루터도 프란치스코처럼 돈을 치러야 하는 교회의 전대사를 반박했고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분열이라는 두 갈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나 마르틴 루터 모두 교회의 세속화를 경고하며 개혁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사람의 개혁 즉 ‘회개’를 외쳤고,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개혁 즉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대가로 이루어지는 전대사를 둘 다 배격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전대사가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마르틴 루터는 교회가 만들어낸 장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여 순명하며, 가난이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을 찾는 최고의 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하느님 없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 대한 불만으로, 하느님을 가르고 사람을 가르는 일을 벌였습니다. 그러기에 마르틴 루터의 개혁은 고쳐 세운 것이 아니라 ‘분열’이었습니다. 진정한 종교개혁이 무엇이고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장미 경당, 회개와 완전한 용서의 시작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붙어 있는 장미 정원은 프란치스코가 예수님께 완전한 용서를 얻기 전, 마음속에 일어나던 의심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 알몸으로 뒹굴었던 장소입니다. 13세기 말 문서에 등장하는 전승에 따르면, 이 장소에는 원래 장미가 아니라 가시나무 덤불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덤불에 몸을 던져 뒹굴었을 때, 성인의 몸과 닿은 가시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장미의 기적’이 일어난 1215년과 1216년 사이, 프란치스코 주변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1210년경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인준받으면서 많은 사람이 그처럼 살겠다고 찾아왔지만, 성인의 엄격한 삶을 보고 떠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남아 있던 형제들 또한 수도회의 새로운 규칙인 ‘구걸하는 삶’ 안에서 설교자로서의 위치를 잡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공동체 안에서 유혹과 다툼으로 이어졌고, 성인에게도 공동체의 상황은 힘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프란치스코에게 유일한 해결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가시에 몸을 던진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일치함으로써 그 은총을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인의 행동은 가시나무의 가시뿐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 상처를 남긴 마음속의 가시까지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진정한 평화를 선물합니다. 가시가 사라진 장미 정원은 ‘인간적인 유혹과 의심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임을 말해 줍니다. 가시 없는 장미 정원 바로 옆에는 성인이 잠자고 기도하던 초막 위에 세워진 장미 경당이 있습니다. 이곳은 성인이 생애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와 설교를 위해 다른 도시를 다닌 뒤에도, 성인은 항상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형제들을 선교사로 파견하고, 매년 ‘돗자리 총회’를 열어 돌아온 형제들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1260년, 성 보나벤투라의 뜻에 따라 제대가 있는 자리에 처음으로 작은 경당이 세워졌습니다. 제대 아래 프란치스코의 동굴에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성인상이 있으며, 십자가 아래 놓인 나무는 설교대에 있던 것으로,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콜라 경당에서 전대사를 선포할 때 올라섰던 것입니다. 경당 벽에는 피사의 바르톨로메오가 쓴 프란치스코 성인 전기를 바탕으로 한 벽화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 1506년부터 1516년 사이 아시시의 티베리오가 ‘아시시의 완전한 용서’를 주제로 그린 다섯 장면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천사들과 함께 포르치운콜라에 도착한 성인은 탈혼 상태에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왔던,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전대사를 청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예수님께 직접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질 보다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가 아님에도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처럼, 프란치스코 역시 성모님의 도움을 먼저 청합니다. 무릎을 꿇고 성모님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예수님께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전구해 달라고 청합니다. 성모님은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두 손으로 받아들이며, 얼굴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눈빛은 무언의 압력처럼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프란치스코를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축복을 내리시며 전대사의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사실들을 호노리오 3세 교황을 만나 설명하고 인준을 청하였습니다. 이 당시 전대사라는 것은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거나 십자군으로 참전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작은 경당인 포르치운콜라에서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의 인준을 청한 것입니다. 호노리오 3세 교황은 ‘장미의 기적’과 포르치운콜라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자 선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이를 인준하며, 기간을 얼마로 할지 묻습니다. 이에 성인은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기간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전대사”라며,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사람이 전대사를 받기를 희망했습니다. 성인은 아시시로 돌아와 포르치운콜라 옆에 설교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 ‘아시시의 완전한 용서’, 곧 전대사를 기쁜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순례나 십자군 참전 없이도,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까지 누구나 하느님이 주시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회개(悔改)는 하느님 안에서 잘못 가는 길을 인식하고 올바른 길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는 순간이고 하느님의 부름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의 순서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바로 그 순간 결단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천국 문은 항상 열려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가 이루어진 장미 경당과 포르치운콜라 경당은 가장 작은 땅이지만 가장 복된 땅이라고 어찌 말할 수 없겠습니까!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운 수도회의 시작, 라테라노 성전의 꿈

다미아노 성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직후 프란치스코의 회개의 행동은 빨랐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을 가난한 아시시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복음적 삶을 살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심한 질책과 감금을 불러왔고, 결국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극단적인 결단으로 이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친 프란치스코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없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아시시의 귀도 주교에게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재산을 더 이상 쓰지 못하도록 재판을 청하였습니다. 조토 디 본도네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장면들>을 통해 이후 프란치스코의 행보를 살펴봅니다. 이상하고도 재미있는 이 재판을 보기 위해 아시시의 어린아이들까지 모여들었습니다. 주교좌였던 성모 마리아 대성당 광장 한가운데서 맨몸의 프란치스코는 손과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 구름 사이로 나타난 하느님의 손은 지상과 천상이라는 대비되는 상황을 위아래로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손을 바라보며 육적인 아버지에게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벗어준 옷을 받으며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격분합니다. 그는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발을 내디디며 프란치스코를 한 대 때릴 기세입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아내이자 프란치스코의 어머니 피카 부인은 프란치스코의 뜻을 알아차린 듯 남편의 손목을 꽉 잡으며 말리고 있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의 신앙심과 알몸에 놀란 귀도 주교는 자신의 망토로 프란치스코를 감싸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옷을 벗어 알몸이 된 것은 세상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알몸을 감싸 주는 주교의 망토는 프란치스코가 교회의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대치되는 상황은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부자들인 세상 사람들이 서 있고, 프란치스코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교회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건물들의 모습은 현실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 보이는 하느님의 손은, 마치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고 올라오실 때 울려 퍼졌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프란치스코에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1209년과 1210년 사이 수도회 인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당시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교황의 힘이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 가난의 중요성을 외쳤던 사람이 프란치스코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 또한 같은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의 자식들이었던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마을을 떠돌며 구걸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와 구걸을 나갔던 형제들이 매를 맞고 돌아오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적 삶을 살며 형제들을 보호할 방법은 수도회 인준뿐이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수도 생활을 적은 새로운 회칙에 대한 인준을 청하였지만, 몇몇 추기경들은 프란치스코의 생각이 너무나 새롭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교황은 잠시 생각하기 위해 당신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깜빡 잠이 들며 꿈을 꾸게 됩니다. 꿈속에서 교황은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라테란 성전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지 한 명이 나타나 자신의 어깨로 기울어 가던 라테란 성전을 떠받쳐 다시 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거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조금 전 자신을 알현하였던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을 황급히 불러들입니다. 교황의 축복 없이는 황제가 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권한을 지니고 있던 교황은, 가장 가난하고 가장 겸손한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회칙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를 구두로 인준하며 오른손으로 축복했습니다. 사실 수도회 인준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인준 이전에는 반드시 증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증명은 성령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창립자의 카리스마로 시작되는 수도회에 얼마나 많은 회원이 늘어나는지, 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통해 얼마나 많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오랜 시간 두고 지켜봅니다. 교회는 새로 시작되는 수도회 안에서 성령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확인한 뒤 인준합니다. 그러기에 수도회 인준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순간적인 꿈을 통해 모든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준서를 써 줄 시간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교황은 프란치스코가 가져온 회칙을 받으며 구두로 인정해 줍니다. 이로써 베네딕도 수도회가 탄생한 지 700년 만에 새로운 정신의 수도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수도회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는 구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탁발 수도회’ 혹은 ‘설교자 수도회’라고 부르게 됩니다. 강력한 힘만이 교회의 평화를 가져온다고 모두가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나눔의 밑바탕인 가난과 성경 안에 보여주신 예수님 삶의 재실천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느님께서 이를 인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수도원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 인준이 곧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다미아노의 클라라,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

1193년 성녀 클라라는 아시시의 성 루피노 대성당 근처에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1182년에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와 거의 띠동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라의 집안은 귀족파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주인으로 섬기며 지지하고 있었고, 프란치스코는 중간 계급으로 아시시의 자치 도시제를 외치는 집안이었습니다. 1206년 프란치스코가 재판에서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아시시를 떠난 사건은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클라라에게도 프란치스코의 회개 방법과 하느님을 향한 행동은 큰 충격과 함께 감명을 줬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211년,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감화된 클라라는 그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됩니다. 클라라는 1212년 성지주일인 3월 18일 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아시시 성에서 2km 떨어진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 경당으로 내려가 성 프란치스코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며 회개의 표식으로 귀족의 옷을 벗고 누더기를 입었습니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큰딸이 지난밤 저지른 행동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클라라가 머물던 수녀원으로 찾아와 딸을 강제로라도 데려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클라라는 완강히 제대포를 붙잡고 잘린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딸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제대 오른편에는 클라라와 수녀들이 기도했던 나무로 만들어진 가대가 있는 작은 기도소가 있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나무로 만든 독서대와 기도소는 클라라가 살아 있을 당시의 시절로 우리를 안내하는 듯합니다. 수도원의 심장인 이 장소는 우리에게 기도란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귀 기울임이며,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애독과 묵상임을 일러줍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자정, 클라라가 이곳에서 촛불을 밝히며 자매들을 초대했듯이, 이 장소는 우리를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이끄는 기도의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성 다미아노 성당 2층으로 올라가면 클라라에게 봉헌된 경당이 있습니다. 클라라는 1224년부터 선종할 때까지 29년간 병상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클라라가 기도하고 미사드릴 수 있도록 잠자리 가까이에 경당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클라라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였기 때문입니다. 제대 앞 바닥에는 성 다미아노 성당 가대가 보이는 사각 나무로 된 덮개가 있습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등을 내려보내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마도 성당까지 내려갈 수 없었던 클라라가 미사 소리를 들으며, 이 구멍을 통해 사제가 올려주는 성체를 영하였을 것입니다. 클라라는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굳건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방이 막힌 수도원 안에서만 그 현존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1264년 볼세나의 성체 기적보다 앞서, 믿는 이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교도들에게까지 그 현존을 드러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Friedrich II, 1197~1250 재위)는 사라센인들을 시켜 수녀원과 아시시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때마다 클라라는 방패처럼 성체를 모시고 나와 수녀원과 도시를 지켰고, 사라센 사람들은 성체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빛을 보고 놀라 달아났다고 전해집니다. 성체의 기적은 수도원의 공동 식당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클라라와 자매들이 검소한 식사를 했던 이 장소에는 초창기에 사용했던 아무 장식 없는 투박한 나무 의자와 식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식탁 오른쪽 끝에 꽃이 놓여있는 자리가 클라라가 건강이 허락할 때 내려와 식사하였던 곳입니다.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시성식 후 이 식당에서 클라라와 함께 자리했고, 성녀에게 식사 전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클라라가 십자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자, 그곳에 있던 빵 하나하나에 십자 표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빵의 기적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드러내심이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수녀원에 식사 시간이 다 되었지만, 빵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들은 걱정과 함께 오늘은 굶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클라라는 그 한 덩어리 빵마저 반은 잘라서 프란치스코 형제들에게 보냈고 나머지 반은 50조각으로 잘라 식탁에 앉아 있는 각 자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성녀의 강한 믿음과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 속에서, 바구니에서 꺼낸 50조각의 빵은 온전한 빵처럼 풍성해졌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충분히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지붕 아래에는 클라라와 자매들이 잠을 잤던 침실이 있습니다. 천장에 기와가 보이는 이 장소는 겨울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웠을 것이고, 여름엔 뜨거운 열기가 한증막처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위 사이에서 잠을 청하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리면, 병으로 고통받던 클라라에게는 이것조차 사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29년이라는 시간을 병상에 머물며 수도 생활을 했지만, 클라라는 클라라회에 맞는 특별한 영성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느님 체험 속에서 얻은 규칙서를 오랜 시간 동안 작성하며 끈기 있게 인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종하기 이틀 전 여자 수도회 최초로 인준된 규칙서를 받게 됩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 수도회를 인준한 인노첸시오 3세 교황(Innocentius III, 1198~1216 재위)이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더 이상 새로운 수도회 인준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서 탄생할 다양한 카리스마를 가진 여자 수도회를 위한 하느님 은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선종 27년째인 1253년 8월 11일 저녁, 클라라는 “저를 창조하신 주님, 당신은 축복받으소서”라는 마지막 감사 기도를 드린 후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시시의 작은 꽃이 된 클라라는 오늘도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예수님을 증거하며,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성 다미아노 성당, 충만한 시간의 완성

불타는 떨기 한가운데에 당신 모습을 모세에게 드러내시며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스러운 장소는 하느님께서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 곳입니다. 이 신비를 아시시 성 밖 한적한 곳에 있는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를 통해 성 프란치스코에게 보여주셨고, 현재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삶을 통해 당신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의사이며 순교자인 다미아노 성인에게 봉헌된 성 다미아노 성당은 8~9세기 사이에 처음 지어졌고 1030년까지 베네딕토 수도원의 중요한 경당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부서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당 안에 있는 이콘형 십자가는 12세기 익명의 화가가 제작했는데, 성당의 이름을 따 ‘다미아노 십자가’로 불립니다. 성녀 클라라 선종 이후 베네딕토 수도원이 1257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클라라 대성당으로 이전하면서 이 십자가도 함께 옮겨졌기 때문에 현재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는 모조품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이콘이라는 말은 ‘비친 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바로 이콘인 것입니다. 초기교회 시절, 눈으로 볼 수 없는 초월적인 대상을 그림으로 그린다거나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교리적으로 우상숭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이콘의 주제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넓게는 사도들까지만 가능했고, 이콘을 그리는 것도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 영성이 뛰어난 수도자만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항상 단식과 기도를 먼저 하신 것처럼, 수도자는 이콘을 그리기 전 단식기도와 회개를 하고, 지도 사제로부터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대상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비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콘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이콘에 그려진 분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런 이유로 이콘 속 가장 중요한 분은 가장 크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분은 조금 더 작고, 이콘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콘 속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콘 속 예수님의 시각으로 평면은 공간으로 확장되고, 우리 또한 그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한 다미아노 십자가가 우리의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 내 앞에서도 뭔가를 말씀하실 것만 같이 보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콘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지만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성화 앞에서는 그림에 대한 감상만 하게 됩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에서 무엇보다 먼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지만, 죽음의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고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내신 성부의 뜻을 이해하시고 모두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 머리 뒤의 후광이 증명하듯 밝게 빛나고 있고,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이나 천사들에게서도 어떤 슬픔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팔 아래 다섯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보다 작지만 십자가에 그려진 다른 사람들보다는 크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직접 본 증인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왼쪽 두 명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 그리고 오른쪽 세 사람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의 어머니인 클레오파의 마리아 그리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한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의 이 한마디는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아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성모 마리아 아래 작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로마 병사이자 순교자인 성 론지노입니다. 백인대장 아래 작은 모습의 사람 역시 로마 병사로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으로 예수님의 입을 적셔드렸던 성 스테파톤입니다. 발아래에는 여섯 명이 사람이 서 있고 덜 훼손된 두 명의 사람에게서는 후광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여섯 명은 움브리아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성 요한 사도, 성 미카엘, 성 루피노, 성 요한 세례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양 팔의 끝에 있는 여섯 명의 천사도 슬퍼하는 모습보다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서로 이야기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를 ‘살아 계시며 양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에게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에는 죄명판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말이 라틴어로 적혀있고 그 위로 황금색 옷을 입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고 계십니다. 열 명의 천사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고, 하늘나라에 오르시는 예수님은 손을 들어 인사하시는 것처럼 밝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는 두 손가락을 펴고 올라오는 성자를 축복하며 맞으시는 성부이신 하느님의 오른손이 보입니다.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두 팔과 손을 벌려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세상 끝 날까지 기다리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십자가 앞에서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곁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의 부르심과 회심 그리고 카이로스의 완성

포목점과 염색업을 하는 부유한 상인 집안에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프란치스코에게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은, 당시 황제를 지지했던 도시 페루자와 교황을 지지했던 아시시의 전쟁에 참전하면서부터입니다. 어린 시절 라틴어도 배우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프란치스코였지만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중인이었지 귀족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 신분 상승의 유일한 방법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02년 부푼 꿈을 안고 페루자와의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포로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하 감옥 안에서 1년 가까이 갇혀 있던 기간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참담하고 나약한 모습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순간 처음 밖으로 보이는 ‘나’가 아닌 내부의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진정한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지만 아직도 프란치스코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귀족이 되고 싶은 열망을 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새로운 꿈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위해 십자군들이 모이는 아시시 근처 도시 스폴레토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을 자다 꿈꾸게 되는데 주님께서는 더 많이 베풀어줄 주인을 섬기지 않고 왜 종에게 자신의 삶을 바치려고 하는지 질문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향인 아시시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프란치스코는 꿈에서 들었던 음성대로 기사가 되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아시시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꿈은 하느님이 프란치스코를 부르시는 중요한 첫 번째 때,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으로 아이온(αἰών), 크로노스(χρόνος) 그리고 카이로스(καιρός). 세 가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이온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을 나타내는 신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개념으로 1년, 1시간, 1분 등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세상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개념으로 측정할 수 없는 순간이나 때를 가리키는 시간입니다. 아이온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만날 수 없는 영역이고, 크로노스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이며, 카이로스는 사람의 힘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절대자의 개입으로 아이온과 크로노스를 이어주어 새로운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강요와 명령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의 시작이고 그 완성의 때는 오로지 ‘사람의 응답’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택을 위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있는 이성과 믿음인 것입니다. 기사가 되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아시시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프란치스코의 온전한 선택과 믿음,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서 완성된 충만한 시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프란치스코에게 무작정 아시시로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세상과 싸울 무기를 주셨습니다. 꿈속 예수님의 손이 향한 궁전 안에 있는 무기들은 사람을 죽이는 칼과 창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평화를 지키는 십자 표시가 들어간 방패들이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싸움의 무기는 세상의 칼이 아니라 믿음의 방패임을 프란치스코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에페 6,12-16) 고향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성 밖에 있는 허물어져 가던 다미아노 경당에서 하느님의 뜻을 청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제대 위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이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영혼의 안식을 느끼며 십자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 순간 십자가로부터 울리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세워라.” 이 말씀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처음엔 문자적으로만 알아들어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다미아노 경당을 수리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집을 고쳐 세우라는 것은 작은 성전인 개인의 회개와 큰 성전인 교회의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임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회개하라는 이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그림 <십자가의 기적>을 보고 있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앞으로 몸이 기울어져 다가가는 프란치스코의 모습과 놀란 얼굴, 그리고 벌어진 손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모두를 회개의 시간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3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교황권의 승리와 프란치스코의 탄생

799년 레오 3세 교황이 프랑크족의 왕 카를로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축성하며 시작되었던 교황과 황제의 ‘양검론’(예수님께서 영적인 칼은 교황에게 세속의 칼은 황제에게)이라는 공생관계는 서로의 욕심으로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주교 서임권이라는 문제로 촉발된 싸움은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라는 사건으로 하인리히 4세 황제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에게 무릎을 꿇으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세속의 권한을 둔 교황과 황제의 대립 시기를 지나 프란치스코가 활동하였던 13세기는, ‘교황은 자체 발광체인 태양, 황제는 그 태양 빛에 의존해서 빛나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교황권이 최고의 정점을 찍은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 시절이었습니다. 교황의 축복 없이는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군대는 없었지만, 파문이라는 막강한 교회 무기로 살아있는 황제도 지옥으로 보낼 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라는 구호 아래 성전이라 불리는 십자군 전쟁이 교황의 지휘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로, 마치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 완성될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자치도시라고 불리는 코무네(Comune)가 등장할 정도로 상공업이 도시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영주들이나 수도원장들의 예속된 삶에서 벗어나 자기의 능력을 더 중요시하는 자유 시민의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황권을 태양이라 부르던 시대, 상공업 발전과 자치도시 번성 탄생 설화로 예고된 ‘가난의 영성'…세속·영성 기로에서 가난의 길 선택 프란치스코는 1182년 아시시에서 태어나 1226년 44세의 나이로 아시시 성 밖 포르치운쿨라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처럼 프란치스코에게는 신비로운 탄생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어머니 피카 부인은 아이를 따뜻한 집 안에서 낳으려고 하였지만 산파의 어떤 도움도 소용없이 산고만 더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 지팡이를 짚고 집 안으로 들어온 한 순례자는 예언자처럼 피카 부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아이는 편안한 집 안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려면 집 밖의 마구간으로 가야 합니다.” 피카 부인은 순례자의 말을 믿고 마구간으로 가서 기적적으로 프란치스코를 출산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하고 300년이나 지나서야 문서상으로 처음 등장한 이 탄생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아마도 마구간이라는 탄생 장소의 진위를 밝히려 했다기보다는 그의 삶은 첫 순간부터 예수님을 닮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앞날에 관한 이야기는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시시의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이 프란치스코를 볼 때마다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공경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예언이라도 하듯 프란치스코 앞에 자기의 망토를 깔아 그 위를 걸어가도록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간적인 토론을 하고 있고, 프란치스코 또한 자신 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에게 망토를 깔아준 사람의 눈을 보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여 프란치스코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그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인간적 갈등은 계속됩니다. 아직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프란치스코지만 자신의 본성인 측은지심을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는 길에서 가난한 기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자신의 망토를 주저함 없이 벗어줍니다. 이 모습은 비신자 시절 투르의 마르티노 성인(316~397)이 거지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에게 자신의 망토를 잘라 주었던 이야기를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림 속 배경을 보면 왼쪽 언덕 위에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이고 있고 오른쪽 언덕 위에는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덕 골짜기의 두 선이 만나는 지점에 프란치스코의 머리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세속을 상징하는 마을과 영적인 삶을 상징하는 수도원 사이에서 프란치스코는 아직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수도원 쪽을 향해 있는 그의 몸과 가난한 사람을 향한 그의 자비로운 행동은 앞으로 프란치스코가 어떤 삶을 살지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크로노스의 양적인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카이로스의 질적인 시간인 주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충만한 시간인 그때는 오로지 주님께서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를 잡기 위해 사람은 등불을 들고 깨어있는 여인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망토를 부여잡고 서 있는 프란치스코의 모습 속에서 그때가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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