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아리고 쓰린 고개마다, 함께 부르는 노래

강원도 정선의 한 성당 벽에 예수님이 고개를 넘고 계십니다. 골고타의 길이 정선의 산길 위로 옮겨 온 듯합니다. 원주교구 정선본당은 지난 3월, 정선아리랑과 예수님의 수난을 잇는 ‘골고타 아리랑 십자가의 길’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선의 산길을 오르시고, 그 길 위에 아리랑 가락이 얹힙니다. 본당 주임 이동훈(프란치스코)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셨다면, 아마 아리랑을 부르셨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 한쪽이 젖어 듭니다. 아리랑은 흥겨운 노래이기 전에, 고개를 넘는 노래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혼자 견디기 어려운 길,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넘어야 하는 길에서 흘러나온 노래입니다. 정선아리랑에는 깊은 한이 배어 있습니다. 척박한 산골의 삶,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마음이 긴 가락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절망의 노래로만 남지 않습니다. 부르는 사람의 숨을 타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지나, 함께 견디는 노래가 됩니다. 아리랑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픔을 없애 주지는 못하지만, 아픔을 혼자 두지 않습니다. 아리고 쓰린 마음 곁에, 아리랑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붙입니다. ‘나’의 고통이 ‘너’에게 건너가고, ‘너’의 한숨이 ‘우리’의 노래가 됩니다. 사랑은 때로 이런 작은 합창에 가깝습니다. 복음서에도 그런 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태 26,30; 마르 14,26)고 전합니다. 배신과 죽음이 다가오는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노래하시고, 그 노래를 품고 수난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이 찬미가를 시편 136장과 연결합니다. 이 시편은 창조와 탈출, 사막과 해방의 역사를 노래하면서 절마다 같은 후렴을 붙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험한 기억에도 자비의 후렴을 붙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노래입니다. 가족의 시간에도 그런 후렴이 필요합니다. 가족은 아픔이 없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의 아림과 쓰림이 가장 가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쉽게 서운해지고, 익숙한 얼굴 앞에서 깊이 침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평화가 아닙니다. 아픔 뒤에 다시 붙이는 후렴입니다. 실망 뒤에 다시 말을 거는 일. 상처 뒤에 다시 식탁에 앉는 일. 마음이 닫힌 밤에도 내일 아침밥을 차리는 일. 미안하다는 말이 아직 나오지 않아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다시 놓아주는 일. 사랑은 늘 뜨거운 감정으로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반복으로 옵니다. 같은 자리에 다시 앉고, 같은 이름을 다시 부르며, 관계의 고개마다 다시 ‘함께’라는 가락을 붙이는 일로 옵니다. 정선의 고개마다 아리랑이 흘렀듯, 우리 가족의 고개마다 어떤 노래가 흘렀는지 돌아봅니다. 기쁜 날의 노래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아프고 서러운 날에도 끝내 함께 불렀던 노래인지 모릅니다. 아리고 쓰린 생의 고개마다, 우리 가족은 아직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있는지요?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니콜로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은 삼위일체의 수줍은(shy) 위격이다.” 신학자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와 윌리엄 호든의 정의는 파격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께 ‘수줍음’이라는 수식어는 분명 낯설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령께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신 채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 내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게 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은 신앙 속에서 늘 현존하지만, 동시에 가장 붙잡기 어려운 분이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반면 성령은 숨결, 바람, 물, 불, 구름과 빛, 손가락, 비둘기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성령은 모습이 없다”고 지적하며, 그분은 형태로 포착되기보다 ‘선물(Donum)’처럼 선사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성령에 대한 노래는 종종 청원으로 시작된다. 성령 찬미가 〈오소서, 창조주님(Veni, Creator Spiritus)〉 역시 그렇다.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께서 찾아오사, 창조하신 마음속에, 천상 은총 채우소서’라는 가사는 성령을 정의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을 부른다.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의 〈오소서, 창조주님〉는 바로 이 부름을 전아한 선율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욤멜리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나폴리악파의 주요 인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소속의 카펠라 줄리아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성음악도 다수 남겼다. 곡은 소프라노 독창과 4성부 합창으로 구성된다.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독창의 유려함과, 그것을 받아 확장하는 합창의 응답이 작품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마치 개인과 교회의 목소리가 서로를 비추고 대답하는 듯한 구조는 성령의 신비를 음악 형식 안에서 드러낸다. 성령은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오시지만, 그 은사를 개개인 안에 가두지 않고 교회의 일치, 공동체의 찬미로 확장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찬미가는 성령을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그중 ‘보호자(Paraclitus)’는 본래 ‘곁으로 불려 온 분’이라는 뜻을 지니며, 라틴어 ‘advocatus’, 즉 변호자이자 협조자의 의미를 함께 품는다. 노래는 이어 성령을 ‘사랑의 샘(fons vivus)’, ‘불(ignis)’, ‘사랑(cáritas)’, ‘축성기름(únctio)’으로 부르는데, 이는 성령의 활동을 놀라울 만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수사들은 ‘일곱 은혜 베푸시고’와 이어지며 세례, 견진, 성체, 성품과 같은 교회의 주된 성사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중개하는 강력한 성령의 작용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아멘’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악상 지시어는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Allegro con spirito)’인데, 물론 여기서 ‘spirito’를 성령으로 읽는 것은 음악 용어를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 찬미가의 마지막 부분이 ‘활력 있게(con spirito)’라는 지시어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지나치기 어렵다. 앞선 악장들이 성령을 부르고 그 호칭들을 묵상한다면, 아멘은 성령께서 인간과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힘을 공동체가 함께 예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듣는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을 준다. 여기서 ‘오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은 ‘아멘’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7항) 그러나 그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흩어진 목소리는 교회와 공동체의 찬미가 된다. 성령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은폐되는 분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성미술 산책]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오늘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거장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또 다른 불후의 명작 <아담의 창조>를 살펴봅니다. 그런데 먼저, 최고의 조각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가 어떻게 성 베드로 대성당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작업을 맡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놀라운 사연이 있습니다. 바로 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도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가 율리오 2세 교황(Julius II, 재위 1503~1513)에게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의 적임자로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는데, 이는 회화 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미켈란젤로를 골탕 먹이기 위한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부담스러운 제안을 수락한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무려 4년간 전념해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길이 40m, 폭이 13m에 달하는 거대한 천장은 구약성경의 ‘천지창조’ 외에 예언자들과 무녀 등의 장면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웅장한 인류 드라마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천장 중앙에는 총 10편, 즉 <빛과 어둠을 가르다>, <태양과 달의 창조>, <물을 갈라 뭍이 드러나게 하다>,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노아의 제물>, <대홍수>, <노아의 만취> 등 천지창조 장면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당시 육체에서 벗어나 정신으로의 초월을 이상으로 여긴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한 그의 신념이 적극 적용된 걸작으로,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담의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팔을 뻗어 그의 형상대로 빚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습니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분홍색의 커다란 망토 안에는 청년 모습의 천사들이 에워싸고, 근육질의 위엄 있는 모습의 하느님과 그가 빚은 아담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닌 모습입니다. 특히 이 장면이 유명한 것은 하느님의 손가락 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기 직전의 찰나를 포착해 극대화된 긴장감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대장정이 시작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같이 절묘하게 포착해 내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순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놀랍고 파란만장한 세계 창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글 _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4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크로 스페코, 프란치스코의 영감과 영성이 넘쳐 흐르는 곳

아시시와 로마의 중간에 있는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 수도원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나르니 인근 산트우르바노 마을과 바시아노 마을 사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푸르른 곳에 비둘기 둥지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알레 델 페르도노(용서의 길)’ 끝에서 만나는 이 수도원은 15세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 시절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213년 몇몇 형제들과 이곳을 찾은 프란치스코는 기원후 1000년 무렵부터 베네딕도회 은수자들이 사용하던 성 실베스테르 경당을 만나게 됩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기로 하고, 각자 은수자처럼 기도할 수 있는 자연 동굴을 찾아 개인기도 시간을 갖다가 저녁이 되면 경당에 모여 공동 기도를 했습니다. 제대 뒤편에는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프란치스코를 예수님께 안내하는 듯한 성모 마리아, 오른편에는 사도 요한과 성 실베스테르 교황의 모습이 있습니다. 경당 옆에는 성인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을 일으킬 때 사용한 우물이 있습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최초로 쓴 토마스 첼라노(1185~1260)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산트우르바노 마을 근처에서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성 프란치스코는 나른한 목소리로 포도주를 요청했지만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성인은 물을 요청했고, 십자 성호를 그어 축복했습니다. 그러자 물은 성질이 바뀌어 다른 맛을 갖게 됐습니다. 한때 순수한 물이었던 것이 훌륭한 포도주가 됐고, 가난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을 거룩함이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 포도주를 마신 성 프란치스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됐습니다. 만약 그 변화가 놀라운 치유의 원인이었다면, 그 놀라운 치유 자체가 기적적인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비로운 은총 때문에 이곳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처럼 ‘프란치스칸의 카나’라고 불립니다. 경당과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14세기에 사각 회랑이 더해졌습니다. 15세기에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회랑 위 2층에 수도자들의 독방 여섯 개를 마련했고, 그 아래는 형제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공동 식당을 두었습니다. 사각 회랑은 수도원 안의 여러 공간을 이어 주는 전형적인 정원이자, 형제들의 삶을 이어 주는 소통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의 사각 정원은 더욱 특별합니다. 세 면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나머지 한 면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서면 사람과 자연과 하느님이 함께 머무는 듯한 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수도원 밖으로 나와 십자가의 길 14처가 만들어진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기도소가 함께 붙어있는 작은 경당에 도착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갈라진 바위틈에서 자주 기도했지만, 건강이 나빠지자 형제들은 그를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로 작은 독방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나무로 된 침대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인이 병중에 사용했던 나무 침대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몸이 아픈 프란치스코가 성 실베스테르 경당까지 내려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형제들은 독방 옆에 기도소를 마련했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이 되면 형제들은 경당이 아니라 이곳으로 올라와 함께 기도했다고 전해집니다. 기도소 벽에는 프란치스코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과 관련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독방 옆에는 ‘천사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돌탑도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영혼까지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프란치스코가 기도로 위로를 청하자 천사가 나타나 바이올린으로 천상의 음악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돌탑은 그 은총의 순간을 기념합니다. 독방 앞 초원에는 수백 년 된 밤나무가 서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곳을 떠나기 전 두 팔을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인사를 하고, 그곳에 자신이 아플 때 사용한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자라서 튼튼한 밤나무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기도소에서 조금 더 위로 오르면, 성인이 자주 기도하던 갈라진 거룩한 바위 동굴을 만납니다. 갈라진 바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창에 찔려 성혈이 흐르는 늑골을 상징하기에, 프란치스코에게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일치하기 위한 충분한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날을 머물며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숨소리로 고요하고 어두운 갈라진 바위 동굴을 채웠고 눈물로 땅을 적시어 구세주의 수난을 큰 소리를 내며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사크로 스페코 수도원은 포도주의 기적으로 육적인 위로를, 천사의 음악으로 영적인 위로를 주신 주님 사랑이 꽃피운 장소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위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온전히 일치하려 했던 프란치스코의 슬픔이 깊이 배어 있는 땅이기도 합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3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살베 레지나〉와 마르티니 신부

1760년 무렵, 대 바흐의 막내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름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1735~1782). 이는 그저 전기적 사실처럼 보이지만, 바흐 가문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바흐 일가는 루터교 신앙과 불가분인 음악가 집안이었고, 그 시초에는 파이트 바흐(Veit Bach)가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루터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튀링겐에 정착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떠난 사람.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한 분. 독일 최고의 음악 가문인 바흐 일족은 자신들의 선조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런 가문의 막내가 다른 길을 택했다.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밀라노에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복형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가계도 속 동생 이름 옆에 씁쓸한 문장 하나를 남겼다. “우리 가운데 이 사람만이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살았다.” 이탈리아에서 크리스티안은 마르티니 신부(Giovanni Battista Martini·1706~1784)를 만난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마르티니 신부는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고, 크리스티안은 그에게서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신학자 존 자나로(John Janaro)는 마르티니를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음악적·영적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크리스티안의 개종에 마르티니 신부를 주요 배경으로 놓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리라. 그의 결단에는 가톨릭 신자로서 얻을 수 있었던 현실적 고려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개종 직후 1760년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된다. 그의 전환에는 교회음악가로서의 직책 획득, 이탈리아 음악계에서의 생존과 성공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현실이 있다고 해서 사제지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티안에게 가톨릭 신앙은 음악으로 먼저 다가왔다. 마르티니 신부의 가르침을 통해 라틴 전례음악의 악보로, 대위법 훈련으로, 간절한 기도와 정연한 음악학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으로 왔을 것이다. 5월 성모 성월의 한복판, 그래서 그의 성모 찬송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는 남다르게 들린다. 물론 루터교 전통이 마리아 관련 전례 텍스트들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었다. 루카복음 1장 46~55절을 기반으로 한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은 루터교 전례 안에서도 주요 축일마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 바흐도, 이복형 에마누엘 바흐도 이 찬가로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살베 레지나〉는 크리스티안이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을 보이소서’ 같은 수사가 표방하는, 가톨릭 성모 신심의 정수까지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살베 레지나〉를 듣는 일은 한 작곡가의 변심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극적인 회심담으로 치환하는 것도 위험하다. 바흐 가문은 그를 ’신실했던 파이트와 다르게 산 사람’으로 기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남긴 라틴 교회음악들은 깊은 신심과 모차르트조차 매료되었던 국제성과 유창함, 전아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마르티니 신부 곁에서 대위법을 익히고, 라틴 교회음악을 손으로 더듬으며 배운 청년이 있었다. 스승은 음악가이자 신학자였고, 제자는 그 두 가지가 조화로이 통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호소력 있는 〈살베 레지나〉와 마주한다는 것은, 루터교 바흐 가문의 막내가 어떻게 가톨릭 음악 언어를 배웠고, 그 일생일대의 전환이 어떤 자취로 남았는지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아빠 베드로는 이제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이 울리면 초록색 동그라미를 오른쪽으로 밀기만 하면 된다고 엄마 소피아가 백 번을 넘게 말해도 소용없답니다. 이제 팔순이 넘은 베드로는 이미 수년 전에 인지장애 판정을 받았고 작년에 치매 판정을 받았습니다. 클라라는 늘 베드로가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고 경기도 파주에서 경상남도 밀양까지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갈 수는 없기에 영상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전화를 받지 못하니까 소피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화면 속 아빠 베드로는 한겨울에나 입을 법한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엄마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느그 아빠 니가 사 준 옷 입고 있다, 지금”, “니 첫 월급 받았을 때 백화점에서 사 준 옷 있다아이가.” 첫 월급이라니요. 그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중간고사 마치고 첫 직장에 취업했으니 1998년 늦가을이었을 것입니다. 첫 월급을 받고 나서 샀다면 정확히 27년 전 한겨울이었을 텐데, 그 옷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니요. 이제 완연한 봄 날씨인데, 베드로는 계절을 상관없이 27년 전의 그 따뜻한 온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우리 클라라가 사 준 옷…” 하면서요.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셨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 각자 가진 고유의 아름다운 어떻게 찾고 사랑해야 할까 저, 클라라는 베드로가 정신이 또렷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제가 베드로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나는 건강하게 타고났는데도 나이가 들어서 (건강 상태가) 이 모양인데, 니는 약하게 타고났으니 나이가 들면 더 힘들끼다. 니 걱정이나 해라”라고 했고, 제가 소피아의 노후에 대해 걱정하면, 베드로는 “느그 엄마는 내가 잘 챙길끼다. 그러니까 니는 니나 잘 챙기라” 했었습니다. 그랬던 아빠 베드로가 이제 엄마 소피아 없이는 전화도 받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의 마음만큼은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약하게 타고난 딸 클라라가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진정한 성인이 되었던 그날, 어쩌면 클라라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을 그 순간 말이지요.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지혜서를 읽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기도 지향은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 베드로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함께 하며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일과는 제가 사 드린 옷을 입고 집 앞 골목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쓰레기를 줍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좁은 길을 쓰는 일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깨끗이 씻고 하루하루 생을 정돈합니다. 그 모습에서 젊은 베드로가 매일 어린 클라라의 구두를 닦았던 모습을 봅니다. 사랑은 소멸해 가는 존재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참 아름답습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브렌다노의 항해〉와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5월 16일은 아일랜드의 성인, 항해자 브렌다노 축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배를 타고 형제들과 함께 ‘약속된 땅’을 찾아 서쪽 바다로 떠났다. 항해가 역사적으로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세계를 사로잡은 이유는 분명하다. 브렌다노가 향한 곳은 지리의 바다이기 이전에, 신앙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중세 라틴어 문헌 「성 브렌다노 수도원장의 항해(Navigatio Sancti Brendani Abbatis)」, 「브렌다노의 삶(Vita Brendani)」 등으로 전해진다. 항해담 속 바다는 평온하지 않다. 브렌다노 일행은 섬이라고 믿고 내린 곳에서 불을 피우지만, 그곳은 섬이 아니라 거대한 해양 생물 야스코니우스(Jasconius)의 등이다. 그들은 떠돌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새들의 섬, 유다 이스카리옷이 절망 속에서 잠시 쉬는 바위를 본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기이한 전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바다는 인간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느님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의 장소다. 이런 성 브렌다노를 20세기 음악으로 듣는 경험은 각별하다. 아일랜드 작곡가 숀 데이비(Shaun Davey)가 1980년 선보인 〈브렌다노의 항해(The Brendan Voyage)〉는 탐험가 팀 세버린이 아일랜드에서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까지 배를 타고 나아간 과정을 묘사한 곡이다. 여기서 세버린의 모험은 성 브렌다노의 뱃길을 재현한 것이다. 아일랜드 전통 악기 일리언 파이프의 음색은 성인의 배를 표현하고, 오케스트라는 그들이 마주하는 바다, 기상 조건, 섬, 생물들을 형상화한다. 10개 악장의 구조는 실제 항로를 그대로 따른다. ‘서곡’과 ‘브렌다노의 테마’로 시작된 도정은, ‘미키네스의 절벽’ 같은 구체적인 풍경 속으로 청자를 인도한다.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행로’와 집어삼킬 듯한 ‘강풍’의 위기는 신앙의 시련처럼 그려지지만, 배는 끝내 ‘뉴펀들랜드’라는 평화로운 항구에 도착한다. 이 서사는 9세기 철학자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의 ‘지성적 항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의 이름 ‘스코투스’는 당시 맥락에서 아일랜드인을, ‘에리우게나’ 역시 에리우(Ériu, 아일랜드) 태생임을 의미한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활동한 그는 주저 「자연구분론(Periphyseon)」 4권에서 신학·철학적 탐구를 위태로운 바닷길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독자를 초대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항해에 들어선다. 여기서는 수많은 굽이치고 얽힌 논의들 사이에서 항로를 가려내야 하고, 난해한 교리들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야 하며, 시르테스의 해역, 곧 낯선 가르침들의 급류가 만들어내는 위험한 지역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곳에서는 가장 미묘한 지성들의 어스름 속에서 언제나 즉각적인 난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숨겨진 암초처럼 갑작스레 우리의 배를 산산이 부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선장이자 조타수가 되고, 성령의 은혜로운 바람이 우리 돛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는 이 모든 위험 속에서도 참되고 안전한 항로를 가려낼 것이며, 마침내 우리가 찾는 항구에, 상처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평온한 여로 끝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아가자.”(「Periphyseon」, Ⅳ. 744a-b) 이 점에서 브렌다노, 작곡가 데이비, 에리우게나는 아일랜드 수도승 전통인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Peregrinatio pro Christo)’와 겹친다. 이는 고향과 안온한 삶을 떠나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거룩한 유랑의 정서다. 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장소인 동시에, 나를 비우고 하느님 현존과 이끄심을 느끼는 은총의 공간이었다.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넘었던 수도자들, 지성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철학자, 〈브렌다노의 항해〉 선율은 오늘날 여전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조타수 삼아, 각자의 대해로 기꺼이 향하고 있는가. 그러니 이제 돛을 펼치고 바다로 나아가자.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6면

[성미술 산책]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녀 안나와 성모자>

이 작품은 당시 60대 초반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으로 물 흐르는 듯 생기 넘치고 절제된 움직임과 고상하고 우아한 색채 그리고 무한대로 펼쳐지는 원경의 자연 풍광 등 그의 원숙한 화풍이 고스란히 담긴 걸작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과학적인 일점소실원근법을 넘어 ‘시각적 효능은 어느 한 지점으로 귀착되지 않고 눈의 동공 전체로 확산된다’는 광학적 연구에 근거한 ‘대기원근법(atmospheric perspective)’과 사물의 윤곽선을 ‘연기처럼(sfumato)’ 흐릿하고 몽환적으로 표현하는 화풍을 창안했는데, 이는 바로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성모자의 모친 성녀 안나도 함께 등장하는데 모녀간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들이 세상의 시간 개념을 초월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맨 뒤에는 가장 크게 표현된 안나가 있고 무릎 위에 마리아가 앉아 있는데, 우리 시선은 사랑 넘치는 눈으로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성녀 안나,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시선과 그를 향해 뻗은 두 팔 그리고 천진하게 성모를 올려다보며 흰 양에게 팔을 뻗는 아기 예수에게로 이어집니다. 여기 아들이 맞닥뜨릴 고통의 운명을 막으려는 듯 희생의 상징인 양 위에 올라타려는 예수를 말리려는 성모의 간절함이 전해져 애처롭습니다. 또한 안나의 몸은 좌측으로 움직이는 반면 시선은 예수에게로 향하고, 마리아의 몸과 시선은 다시 우측의 예수에게로 그리고 예수와 양은 고개를 돌려 마리아를 바라보는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구도로 표현되었는데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인물들이 균형 잡힌 피라미드 구도로 배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에서 동작과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복잡 미묘하고 신비로운 교감, 바로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가 오가는 순간입니다. 자연과 인체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본 레오나르도. 그에게 땅은 인간의 ‘살’, 산맥은 ‘골격’ 그리고 강물은 ‘피’입니다. 여기 원경의 푸르스름 어렴풋한 자연풍광과 전경의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듯 느껴지는 것은 이 모두 대자연 속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의 자연 속 성가족은 동양의 장자(莊子)가 일컫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즉 ‘바깥 사물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우러져 한 몸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연상시킵니다. 이같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대자연의 신비, 바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글 _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4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몬테루코 성지, 성스러움 가득한 숲속 은둔소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스폴레토(Spoleto) 남쪽, 해발 800m에 자리한 몬테루코(Monteluco)는 ‘산’을 뜻하는 Monte와 ‘성스러운 숲’을 뜻하는 lucus에서 유래했습니다. 수백 년 된 상수리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들어서면, 이름에 담긴 의미를 모르더라도 사방에서 밀려드는 거룩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신성한 숲은 기원전 3~2세기에 제정된 ‘스폴레토 숲의 법(Lex Luci Spoletina)’에 따라 보호되어 왔습니다. 스폴레토 지역의 신성한 숲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한 이 법은 최초의 산림법 가운데 하나로도 여겨집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기원후 5세기부터는 시리아에서 온 수도자들이 성지 안에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 경당을 세우고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던 수도자들은 이 경당을 은둔 장소로 이어 오다, 1212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프란치스코에게 사용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1218년 프란치스코는 초기 형제들과 함께 카타리나 경당 주변에 나뭇가지와 진흙, 석회로 독방들을 만들고, 은둔 생활과 공동 기도 생활을 함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선교 활동에서 벗어나 은둔하기 위해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1205~1206년, 그가 기사 복장을 하고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주로 향하던 길에 스폴레토에서 처음 신앙의 소명을 느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난 장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듯, 스폴레토에서 들은 주님의 음성은 프란치스코가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한 힘이었을 것입니다. 15~16세기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 정원의 몬테루코 성지 입구를 지나면, 프란치스코가 기적적으로 물을 솟아나게 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 나옵니다. 그 옆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소’라고 불리는 경당이 있습니다. 초기 형제들이 사용했던 다른 공간들처럼 이 경당도 본래 자연 동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경당 안 제대를 받치고 있는 돌은 프란치스코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잠을 잤던 자리로 전해집니다. 우물 왼쪽으로는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들 때부터 1960년대까지 사용한 독방들이 이어진 좁은 복도가 나옵니다. 성지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은둔 생활에 관한 규칙서를 작성했는데, 그 안에서 강조한 것은 홀로 고립되는 고독이 아니라 형제애였습니다. 은수자는 셋이나 넷을 넘지 않도록 했고, 두 사람이 마리아처럼 주님 곁에서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면, 나머지 두 사람은 안주인처럼 그들을 보호하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역할을 바꾸어 모두가 하느님을 찾는 일을 우선하도록 한 것입니다. 가로세로 2m 크기의 작은 방 일곱 개로 지어진 은둔소에는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방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좁은 창문으로 희미한 빛만 들어옵니다. 푹신한 침대 대신 널빤지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몇 가지 물건과 함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나무문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방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마치 시간이 800년 전에 멈춘 듯 모든 방에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눈을 감으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방들은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성인과 복자들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오랜 기간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성 보나벤투라(1217~1274),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 파올루치 트린치(1309~1391)를 비롯해 이름 없는 많은 수도자가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이 이곳을 찾은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다가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셨던 것처럼, 형제들도 이 거룩한 숲에서 스스로 고독을 택했습니다. 이 고독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홀로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중 성 안토니오는 1221년 시칠리아 여행 중 이 은둔소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숲속 깊은 곳, 접근하기 어려운 동굴 가운데 하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몬테루코 성지에 성 안토니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1232년 5월 30일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바로 스폴레토 대성당에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시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몬테루코 숲의 신성한 분위기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듯합니다. 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험준한 바위 능선 사이에 보물처럼 숨겨진 작은 동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동굴들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를 비롯한 여러 성인이 머물렀던 곳이며, 그들은 이곳에서 온전히 은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숲속 끝 전망대에서는 스폴레토 계곡의 푸르름에 둘러싸인 스폴레토 마을, 요새, 두오모 대성당 등 역사적 중심지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광활한 풍경은 프란치스코의 영혼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벨베데레 벽에 새겨진 것처럼 “nil iucundius vidi valle mea spoletana(스폴레토 계곡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3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먹이고 돌보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두고 흔히 ‘방귀를 튼 사이’라고 말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가족의 본질을 꽤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가족은 서로에게 가장 편안한 사이입니다. 숨길 것도 체면도 없이 서로의 습관과 약점까지 아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에게 엉겨 붙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호르몬이 작용합니다. 자극을 찾게 하는 도파민, 만족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 스트레스 때 분비되는 코르티솔 같은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사랑 호르몬’이라는 별칭을 가진 호르몬이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은 손을 잡거나 포옹할 때, 신뢰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분비됩니다. 옥시토신이 충분히 분비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안정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연결될 때 안정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힘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두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로 설명합니다. 에로스는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이고, 아가페는 자신을 내주는 사랑입니다. 가족은 이 두 사랑이 함께 작동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서로를 살게 하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의 첫 장면은 놀라울 만큼 평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숯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행동은 먹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식사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세 번 명령하십니다. 전례용 성경에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리듬이 있습니다.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먹여라.” 예수님은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보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동사’로 보여 주십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게 하는 행동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차려 주고, 지친 사람을 돌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족의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함께 식탁에 앉고, 서로의 하루를 묻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는 경쟁과 성취를 요구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이루라는 압박이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경쟁이 아니라 사랑에서 옵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합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과 서로를 살리는 책임이 함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함께 어우러진 사랑, 그것이 가족의 근간입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사랑의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먹이고, 돌보고, 다시 먹이는 사랑. 그것이 가족을 이루는 관계의 방식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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