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5)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

국익 내세워 신군부 지지한 미국, 광주 학살 묵인하고 독재 정당화 반독재·반미 투쟁 본격화…1982년 부산 미 문화원에 방화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 최 신부 등 5명 구속 - 치안본부는 지난 4월 8일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과 관련, 원주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39), 방화교사범 김현장(32), 교육원 관리인 문길환(37), 치악산 서점 주인 김영애(25), 가톨릭농민회 조사부원 오상근(29) 씨 등 5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최 신부에게는 범인 은닉, 다른 4명에게는 국가보안법·범인 은닉 및 교사 혐의 등이 적용됐으며... 최 신부의 혐의 내용은 80년 5월 김현장을 22개월간 교육원에 은신시켰고, 지난 3월 19일 김현장으로부터 방화 교사 사실을 고백받고 도피 자금 50만 원을 주었으며, 3월 28일부터 4일간 문부식과 김은숙을 숨겨준 것 등이다.”(가톨릭신문 1982년 4월 18일 1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치르며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오던 한국교회는, 1982년 4월 다시 한번 전 국민적 관심의 초점이 되는 사건을 맞게 됩니다. 이는 원주교구 최기식(베네딕토) 신부가 5·18 광주와 관련돼 수배 중이던 김현장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범 문부식, 김은숙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사건입니다. 제5공화국과 미국 신군부 세력은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위원장 전두환)를 설치했습니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공직자 숙청,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켰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제5공화국 헌법 개정안 통과, 국회 해산, 기성 정치인 활동 금지, 관제 정당 급조 등 사전 작업을 거쳐, 1981년 2월 25일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미국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묵인함으로써 어두운 속내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나아가 5·18 이후의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며 학살의 주범인 신군부를 지지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의 취임식 이전인 1981년 2월 말 그를 워싱턴으로 초청해 지지를 표했고, 1982년 4월에는 부시 부통령이,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재차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분노와 배신감, ’반미주의‘의 확산 무죄한 시민들의 학살을 묵인하고 그 주범인 전두환을 비호한 미국의 실체는 한국 국민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국인을 비하하고 독재를 정당화했던 미국 고위 인사들의 망언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특히 존 위컴 주한 미군사령관의 ’들쥐 발언‘은 가장 치욕적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 8월, 미국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들쥐(lemmings)와 같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자가 누구든 줄을 서서 그를 따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한국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으며,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 독재자를 통한 통제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폭력과 독재를 지원한 미국의 이중적인 모습은, 1980년대 내내 학생운동권이 반미 노선으로 기울게 만드는 원인이 됐습니다. 그 최초의 반미 투쟁이 광주 미 문화원 방화 사건입니다.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원들은 1980년 12월 9일 밤, 광주 미 문화원 지붕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당국은 반미 감정의 확산을 우려해 방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전기 누전에 의한 화재라고 거짓 발표를 했습니다. 성역의 침탈 최기식 신부의 구속을 불러온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은 광주 미 문화원 방화가 불씨가 된 것이었습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에 문부식, 김은숙 등이 불을 질렀습니다. 이들은 광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을 묻고 반미 투쟁을 호소했습니다. 사건 후 수배 중이었던 김은숙과 문부식은 원주교구 교육원으로 최기식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이곳에는 수배 중이던 김현장이 2년 가까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모두 교회의 주선으로 자수의 뜻을 밝혔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최 신부가 이들을 숨겨준 것을 두고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를 비호했다”며 범인 은닉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여론을 총동원해 방화범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았으며, 천주교회와 원주교구, 가톨릭농민회 등을 국가 안보를 해치는 범죄의 온상으로 몰았습니다. 이에 교회는 최 신부의 행위가 사제의 양심에 따른 정당한 직무 수행이라고 맞섰습니다.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는 1982년 4월 2일, 가톨릭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사제의 직분”이라며 “최 신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최 신부의 동료 사제들은 4월 12일 성명서를 통해 “당국의 발표와 언론 보도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진상 조사와 발표보다는 천주교 신부의 범인 은닉 문제를 확대 선전함으로써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나아가 의도적으로 천주교회를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4월 16일, 주교단은 “가톨릭교회를 불온집단의 온상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는 언론보도에 유감을 표시하고, “교회가 보호하던 이들의 자수를 주선해 준 최 신부의 행위는 최선의 길”임을 확신하며, “쫓기고 있던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는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최기식 신부는 부산지법(1심)과 대구고법(2심)에서 징역 3년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성직자의 직무라 하더라도 실정법(국가보안법 등)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판시하며 종교적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83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도 형법상 범인은닉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불고지죄 등)의 죄목으로 같은 형량이 확정돼 실형을 살게 됐습니다. 이후 198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고, 사면 복권됐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비록 성역과 양심의 영역이 침탈됐지만, 역사적 승리는 오히려 교회와 민주화 세력의 것이었습니다. 이제 천주교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으로 나서게 됩니다. 정치적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성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4)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광주의 비극을 목격한 이듬해인 1981년 10월, 한국교회는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한국 사회 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교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피 끓는 여정에 온전히 함께하지는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18 광주의 진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지역교회로 설정된 지 150주년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그날의 감격을 가톨릭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150여 년 전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터전을 마련하고 독립 교구를 이룩한 목자들과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며 그 높은 뜻을 오늘에 되새기기 위한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10월 1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장엄하게 펼쳐졌다.”(가톨릭신문 1981년 10월 25일자 1면) 한국교회 성장의 기폭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조선대목구를 설정해 한국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교구로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1981년 10월 18일 거행된 기념행사는 단순한 축하를 넘어, 3년 뒤인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성인 시성식’으로 이어지는,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서울 여의도에서 장엄하게 거행된 신앙대회에는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 총재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해, 주한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등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500여 명의 사제단, 그리고 80만 신앙인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날의 감격스러운 순간을 가톨릭신문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80만을 헤아리는 신앙의 인파가 여의도광장을 입추의 여지 없이 메운 가운데 오전 10시 막이 오른 신앙대회는, 순교자의 피로써 이 땅에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하나의 거대한 나무로 성장했음을 그대로 입증하는 한편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 교회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획기적인 전기를 이룩했다.”(가톨릭신문 1981년 10월 25일자 1면) 한국교회 성장에 경탄과 감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 신앙대회에 보낸 축하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사랑을 더 심화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열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습니다. 특히 교황은 “이 기쁜 축제는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한국 겨레의 마음에 뿌리를 내렸으며,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서 꽃피어 신자들의 삶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했는지 잘 말해 주고 있다”며 경탄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특별 강론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 안에서 교회가 참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교회 지도자들이 가난을 말하면서도 가난하지 않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 억눌린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또한 교회 역시 다른 이익단체와 같은 생리를 지녀 자기 팽창에만 몰두하고 자기만족에 빠져 사회의 구조악을 조장하지 않았는가”를 깊이 반성하자고 촉구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는 분명히 수적 증가를 모든 면에서 이룩하고 있으나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이 사회를 변혁하는 누룩의 구실을 과연 하고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며 교회 지도자들이 부패를 연장시키는 방부제가 아니라 생명을 부패에서 보호하는 소금의 역할을 다하도록 반성하고 선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의 의미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은 한국교회가 북경 주교의 관할에서 벗어나 교황청 직속의 독립된 교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150주년 행사는 평신도들의 자발적 투신으로 세워진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와 일치하면서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게 된 역사를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5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펼친 다양한 기념사업, 특히 여의도광장에 80만 명이 모여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함으로써,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와서 보시오”라고 외치며 자신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날 기념행사에 이어, 한국교회는 3년 후인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 및 103위 시성식 등의 대규모 종교 집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냅니다. 이러한 대규모 집회는 독재정권에 대항해 우리 사회 최후의 양심의 보루로 자리매김한 모습과 함께, 1980년대 한국교회의 비약적 교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날 대회에 이어 1984년 ‘이 땅에 빛을’ 주제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이뤄진 일련의 사업들은 한국 교회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습니다. 각종 기념행사와 정신운동, 기념사업과 사목회의 등은 선교 3세기를 여는 야무진 발걸음이었습니다. 더욱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0년대 말까지 두 차례에 걸쳐 방한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명실상부한 보편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그 첫 발걸음이었던 셈입니다. 겨레의 운명에 부활을 하지만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는 교회의 성장을 마냥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으로만 그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당시 불과 1년 전 폭압적 국가 권력에 의해 무죄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광주의 비극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광주라는 민족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져야 했습니다. 150주년 기념행사에 앞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9월 9일 담화문을 통해 이를 일깨웠습니다. 김 추기경은 담화문에서 “오늘 우리는 빛나는 교회사를 기리는 한편 감격과 함께 무거운 사명감을 느낀다”며 “일제의 식민지 36년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지만 동시에 초래된 국토분단의 아픔이 이어져 다시 36년, 우리 겨레는 지금 유물과 배금주의 권력의 획일주의 아래 지치고 허탈감에 빠져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어 “하느님의 법 안에서 양심과 정의와 일치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오늘의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형제가 의심하고 방황하며 괴로워할 때 희망을 주는 민족사의 누룩이 되어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수난사로 특징지어진 우리 겨레의 역사로 하여금 인류 평화에 크게 공헌하는 소명의 길”이라고 호소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이러한 호소는, 이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해 펼친 새로운 선교와 사목 정책의 수립 노력, 그리고 이 땅의 민주화를 향한 거침없는 투신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에서 1980년대는 그야말로 격동과 거대한 전환의 시기였습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3) 5·18 광주 민주화운동(하)

1980년 5월, 광주는 민족의 십자가였습니다. 국민을 지키라고 쥐여준 총칼로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던 그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며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그 참담한 시간을 과연 어떻게 통과하고 있었을까요? 강요된 침묵, 거대한 감옥 당시 대한민국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군화와 총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극에 달했고, 유언비어 유포죄로 즉결 심판을 받거나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신군부는 모든 언론을 사전 검열했습니다. 이 때문에 광주의 진상을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알더라도 침묵해야 했습니다. 언론은 광주의 참상을 불순분자와 간첩이 선동한 폭동으로 왜곡했고,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는 기사만 내보냈습니다.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과 민주화 인사들은 이미 예비검속으로 구속되거나 수배 중이었기에, 폭압적 정치를 비판할 지도자들은 물리적으로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총칼로 공포 정치 만행 신군부,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왜곡 광주대교구 등 진실 외쳤지만…주교회의는 양비론적 태도 보여 진실을 향한 광주대교구의 필사적 노력 이 암흑기 속에서 한국교회, 특히 광주대교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2014년, 당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는 ‘5·18 광주민중항쟁 34주년 기념 학술발표회’ 기조강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광주민중항쟁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참여했지만 지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제들이 평화적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체계적인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다만 사실 왜곡에 대한 진실 규명에 관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당시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구호 물품보다 ‘진실의 전파’였습니다. 비록 천주교회가 학살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묻혀버릴 뻔한 신군부의 만행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는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학살의 목격자 그리고 기록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와 수녀들은 학살 현장의 목격자였습니다. 남동성당 등은 시민군의 피난처가 되었고, 사제들은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외신기자들과 협력해 학살의 증거를 해외로 반출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도청 최후 진압을 앞둔 5월 24일, 긴박한 상황에서 사목교서를 발표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광주도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어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6월 10일경, 최초의 5·18 진상 보고서로 평가받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발표했습니다. 대검 사용, 무차별 구타, 조준 사격 등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이 문건은 비밀리에 복사되어 전국 성당과 대학가, 해외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광주는 폭동이 아니라 학살’이라는 진실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울지는 못했다 서울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지키고 있던 명동성당이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곳에서 봉헌된 시국미사는 광주의 진실이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됐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독일 제1공영방송(ARD)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일명 ‘광주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대학생과 시민들은 ‘폭동’이 아닌 ‘학살’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전두환 정권의 회개와 퇴진을 요구하며 최전방에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광주와 함께 울지는 못했습니다. 주교회의는 5월 23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주교단은 “정부, 군, 민간인 모두 자신의 입장만을 절대시해선 안 된다”며,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이성을 되찾고 형제의 입장에서 이해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양비론적 태도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와, 목숨을 걸고 광주를 탈출해 진상을 알린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 등은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에 깊은 고립감과 괴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광주 사제단이 7월 17일, 침묵하는 주교들에게 개별 서한을 보내 공식적 입장 표명을 촉구했던 것은 이러한 안타까움의 발로였습니다. 가톨릭신문의 침묵과 왜곡 그리고 동조 광주의 비극이 이어지는 동안 가톨릭신문의 지면에서 유혈사태의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6월 1일자 1면에 관련 소식이 실렸지만, 주교회의의 원론적인 담화문과 구호 활동 등 단편적인 소식뿐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6월 8일자 사설은 이번 사태가 “견해 차이나 오해로 인해 대화 대신 대결을 택한 탓”이라며, 책임 규명조차 무의미하다고 썼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 겪었던 시련은 우리 한국 백성의 것이기도 하다”며 광주의 비극을 하느님이 주신 시련인 양 묘사했습니다. 이는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비이성적 대결로 치부하고, 신군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보도였습니다. 예언자 직무를 유기한 부끄러운 역사 물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검열 속에서 사실 보도가 어려웠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고 예언자적 직무의 수행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는 교회 언론으로서 가톨릭신문의 당시 처신은 명백하게 비복음적이었습니다. 나아가, 단순한 침묵을 넘어 정권에 대한 ‘동조’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가톨릭신문은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습니다. 1980년 9월 7일자 사설이 대표적입니다. 신문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두고 ‘새 시대의 지도자’를 맞아 국민이 희망에 부풀어 있다며 장황하게 찬양했습니다. 광주의 5월에 대한 정의로운 판단은 완전히 삭제됐고, 민주화의 꿈을 짓밟은 정권에 종교적 언어로 면죄부를 준 셈입니다. 후대의 역사는 이 시기를 가톨릭신문이 교회 언론으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었던, 가장 부끄러운 시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신문은 교회 내의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유일한 교회 언론이었던 가톨릭신문을 대체할 대안매체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2) 5·18 광주 민주화운동(상)

민주화 열망 짓밟은 신군부…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교회 움직임은 구호·모금에 그쳐…언론 통제로 사실 보도 불가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의 억압적 통치가 이어지면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1980년에 접어들어 다시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계엄 철폐’와 ‘전두환 퇴진’의 목소리가 거리를 휩쓸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80년 5월 6일부터 9일까지 춘계 주교회의를 열고 시국 담화문을 발표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하루속히 민주정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신군부는 민주화의 요구를 국가 안보를 해치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짓밟힌 일상과 시민군 1980년의 봄은 잔인했습니다. 5월 18일 아침, 광주의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했습니다. 공수부대가 국민을 향해 곤봉과 대검을 휘둘렀습니다. 자식과 이웃이 짐승처럼 사냥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의 가슴속에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교구청 창문을 통해 이를 지켜보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공포에 떨며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진압이 아니다. 사냥이다. 인간 사냥이다. 하느님, 어찌하여 저들에게 저토록 잔인한 마음을 주셨나이까.”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계엄군은 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광주 시내 본당의 신부들은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을 수습하며 군인들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쏘지 마시오! 제발 쏘지 마시오! 이들은 당신들의 형제요, 누이입니다!” 총성은 멈추지 않았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를 열어 ‘시민군’이 되었습니다. 고립된 섬, 사제들의 '죽음의 행진' 광주는 고립된 섬이 되었으나, 주먹밥과 헌혈로 서로를 살리는 ‘절대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23일 오후 2시, 남동성당에 민주인사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를 꾸리고 계엄사령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답은 없었습니다. 26일 새벽, 계엄군의 전차가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와 조철현(비오) 신부 등은 수습대책위원회, 수백 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차 앞으로 ‘죽음의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살상했기 때문이오. 무력 진압을 멈추고 사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광주는 피바다가 될 것이오.” 다행스럽게도 전차가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 다시 전차 진입이 임박하자 도청에 남은 시민군과 학생들은 사제들을 억지로 내보냈습니다. “신부님, 저희는 여기서 죽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가 폭도가 아니었다고, 끝까지 광주를 지켰다고 증언해 주십시오.”(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가 사제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 광주의 진실 5월 27일 새벽, 도청을 사수하던 젊은 영혼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산화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침묵의 시간…. 6월 2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첫 번째 공식 성명서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과 우리의 견해>를 발표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언합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무력을 남용한 당국에 있으며,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던 의로운 시민들이었습니다.”(1980년 6월 2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성명서 발췌) 이 성명서는 복사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광주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진실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진실이 가려진 보도 광주 시민들이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했던 비극의 시대, 당시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 역시,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신문(1980년 4월 1일자부터 ‘가톨릭시보’에서 ‘가톨릭신문’으로 제호 변경)에 광주의 비극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6월 1일자부터였습니다. 그날 가톨릭신문 1면에 ‘광주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여기에서는 5월 23일 긴급 소집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를 거쳐 발표된 특별기도 요청 서한을 ‘형제적 화해(和解) 기반 마련해야’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로 전했습니다. “한 핏줄 한 형제, 유혈 충돌만은 말아야 - 광주사태와 관련, CCK 회의실에서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서한을 통해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인간적 충돌은 저지돼야 한다’고 천명,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자’고 촉구했다.”(가톨릭신문 1980년 6월 1일자 1면) 강요된 침묵, 구호와 모금 활동만 전해져 같은 날 신문에는 ‘광주 성직·수도자 전원 무사’, ‘김재덕 김남수 주교 광주 방문 실패’, ‘전주 사제단 광주 희생자 위로 미사’, ‘전국 각 교구장 각 본당에 신자들 기도 당부 서한 보내’, ‘서정길 대주교 담화문 발표, 구호금품 모집 등 호소’ 등이 보도돼 행간에 숨은 긴박함을 엿보게 했습니다. 주교회의 상임위는 23일 서한 발표 후, 27일 긴급회의를 열고 6월 1일 주일에 광주 지역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25일 주일 미사 때 서한문을 낭독하고 기도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어 대구대교구 이문희(바울로)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레나도)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아우구스티노) 주교와 성 베네딕도회 수련장 진 토마스 신부 등이 29일과 30일 광주대교구청을 방문했습니다. 전국에서는 헌혈 운동, 성금 모금 등을 전개하고 유족들에게 성금을 전달했습니다. 이후 가톨릭신문은 지속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구호금품 모집과 전달, 오태순(토마스)·장덕필(니콜라오) 신부 등 7명이 광주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된 사실 등과 관련한 후속 기사를 보도했고 6월 8일자에는 사설 ‘광주민에 마음의 구호를’을 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주의 본질에 대한 평가나 정확한 사실 보도는 전혀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광주에 대한 소식은 언론 보도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7월 6일자 가톨릭신문에 보도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발표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담화문 기사에서도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는 관련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광주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강요된 침묵과 절망으로 묻혀갔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인 1981년 3월 3일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온 나라가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특히 불의하게 가려진 진실은 하느님과 역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자적 소명을 한국교회는 길고 지루하지만, 끊임없이 이어갔습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1) 박정희 대통령 피살과 ‘서울의 봄’

10·26사태 박정희 대통령 서거…유신 종식으로 정치적 해빙 맞아 12·12쿠데타 저지른 신군부, 민주화 요구 묵살 후 비상계엄 확대 등 억압 이어가 독재자의 죽음과 유신체제의 종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따라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1월 2일 오후 6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미사를 엄수키로 결정했다. 지난 10월 26일 오후 7시50분경 서거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덕을 추모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이날 추모미사는 서울대교구 주관하에 한국천주교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된다.”(가톨릭시보 1979년 11월 4일자 1면) 1970년대 한국교회는 사회정의와 인권 수호를 위해 독재 정권과 대립하며 예언자적 소명을 실천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체포되는 등 희생이 뒤따랐고, 긴급조치로 정국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10월 26일, 영원할 것 같던 독재 권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교회의 추모와 애도 유신독재의 핵심 저항 세력이었던 교회는 비보를 접하자 비판을 멈추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교회는 10월 27일 비상계엄 선포 속에서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전국 성당에서 추모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난국을 헤쳐 나갈 지혜를 청하는 기도를 당부했습니다. 로마에서 급거 귀국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또한 “여야와 정견을 떠나 증오심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자”며 국민의 단합과 평화를 호소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날 모든 신자가 국가와 국민의 단결을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여야당을 막론하고 그리고 모든 정견을 떠나서 서로 간의 증오심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중대한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이어 ‘오늘의 사태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라고 강조하고 ‘모든 신자는 단합과 사랑과 신뢰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했다.”(가톨릭시보 1979년 11월 4일자 1면) 민주 헌정 질서의 회복을 위한 건의 박 대통령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붕괴와 '서울의 봄'을 불러왔습니다. 비상계엄하에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과도적 조치였습니다. 국민은 유신헌법의 종식과 민주적 질서의 회복을 기대했고, 억눌려 있던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 통제가 완화되고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공개 토론과 집회가 가능해지면서 한국 사회는 잠시 정치적 해빙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 역시 신중하게 민주 헌정 질서의 회복을 위한 기대와 제안을 피력했습니다. 김 추기경, 그리고 주교회의 윤공희 대주교와 부의장 김남수(안젤로) 주교가 11월 24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만나 구속 인사들의 석방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앞서 정의평화위원회도 공적 서한 형식의 건의서를 발송, 민주화 일정의 투명한 공개를 요구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12월 7일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함세웅(아우구스티노) 신부 등 복역 중이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모두 석방됐습니다. 12.12 군사 반란과 신군부의 부상 하지만 ‘봄’은 짧았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새 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헌법상 대통령과 정부는 존속됐지만, 실제 권력은 신군부 핵심 인물들에게 집중됐습니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적 질서가 아니라 또 다른 군사 권력이 대신 들어앉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곧 닥쳐올 민족의 고난을 예견한 듯, 1980년 신년사에서 성찰과 다짐을 드러냈습니다. 김 추기경은 지난 10년간 교회가 ‘인간의 가난과 비참, 죄와 죽음의 심연에까지 깊이 내려가는 강생의 신비’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렸을 뿐’이라고 자책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독재의 사악한 뜻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1980년 2월 18일,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주교회의 부의장인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3월 13일 발족한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됐습니다. 민주화 요구의 확대와 신군부의 강경 대응 군사 반란 이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 속에서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헌법 개정 작업이었습니다. 정의평화위원회는 1월 16일 ‘헌법 개정을 위한 원리적 건의’를 통해 군부 독재의 봉쇄와 민주화를 위한 5개 항의 법적 원칙을 요구했습니다. 1980년 초로 접어들면서 사회 전반에서는 다시금 민주화 요구가 거세졌습니다. 대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학원 자율화, 정치적 자유 회복을 요구했고, 노동 현장과 종교계, 지식인 사회에서도 유신 잔재 청산과 헌정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복권 문제 역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급격하게 고조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주교단은 5월 6~9일 춘계 주교회의를 열고 첫 시국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주교단은 담화문에서 “오늘의 우리 시국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고비에 서 있다”며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 헌정 수립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민주정치를 속히 정착시켜야 한다”며 “과거의 정치적 과오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은 최대한의 겸허와 자숙이 요망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러한 흐름을 ‘체제 위협’으로 규정했습니다. 민주화 요구는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행위로 낙인찍혔고, 군부는 점차 강경 노선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1980년 5월 17일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였습니다. 이 조치로 국회는 사실상 해산되었고, 정당 활동과 언론 보도는 중단됐으며, 주요 정치인과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종식됐고, 한국 사회는 다시금 전면적인 군사 통제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억압적 조치들은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발행일 2025-12-25 제3471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0) 가톨릭 농민운동의 단초 ‘오원춘 사건’

가톨릭농민회 간부 오원춘 씨, 농가 피해 보상 요구 중 기관원에 피납 안동교구 사제단 등 비난 성명…농민·민주화운동 기반 조성 교회 인권운동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여기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 한국가톨릭농민회였습니다. 군사 정권의 말기적 증세는 1979년에 접어들어 극에 달했습니다. 안동교구 신자이자 가톨릭농민회 간부였던 오원춘이 5월 5~21일 사이 정부 기관원에 의해 납치·폭행을 당한 뒤, 15일 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오 씨는 6월 13일 이를 영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고했고, 7월 5일 ‘양심선언’을 발표해 자신이 겪은 납치·폭행은 사실이며, 이후 양심이 허락하는 한 이를 번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시보는 8월 19일자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이사 겸 영양군 청기면 분회장 오원춘(알폰소·31) 씨가 모 기관원에게 피납됐다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의 주장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선 경북도경은 10일, 이 납치설은 허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이 같은 허위 사실을 유포한 오원춘 씨와 이 사건에 관한 유인물을 만들면서 국가 안녕질서를 문란케 할 내용을 삽입한 안동교구 사목국장 정호경 신부, 유인물을 배포한 정재돈(비오·25) 씨 등 3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상반된 주장 가톨릭시보의 보도는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하나는 경찰 발표문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의 주장이었습니다. 사건을 담당한 경상북도 경찰국은 오 씨가 “지난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 기관원에게 납치돼 폭행·감금 또는 감시를 받았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 신부에 대해서는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의 명에 의해 오 씨 납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정부가 농민 부흥을 짓밟고 농민을 천시하며 정당한 농민운동을 탄압해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한다는 등 왜곡된 설명문을 날조·전파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안동교구 사제단의 주장은 완전히 상반됐습니다. 즉, 이 사건은 “1978년 ‘청기 감자 피해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책임 있는 농정을 촉구하며 농민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던 오 씨에 대한 보복·납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단은 오 씨가 ‘하느님께 받은 양심에 의해’ 진술한 「양심선언」을 강조하며, “신앙인의 양심으로 이 납치설의 진실을 서약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의 발표문은 오 씨가 개인적 일탈로 인한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허위 납치극을 주장했다는 것이었고, 안동교구 사제단은 이를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으로 보았습니다. 후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과 정부의 농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농민회의 태동과 함평 고구마 사건 가톨릭농민회는 1964년 가톨릭노동청년회 산하 농촌부로 시작, 1966년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농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1971년 ‘한국가톨릭농민회’로 개칭하고, “농민의 경제적 정의 실현, 농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 전체 농민의 단결과 공동활동을 위한 조직 강화 및 확대, 궁극적으로는 농민 문화의 재창조와 공동체적 삶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으며, 1976년에는 6개 도에 연합회를 결성했습니다. 주교회의는 1975년 춘계총회에서 각 교구가 농민회 육성을 지원하기로 했고, 1976년 춘계총회에서 이를 교회 공식 단체로 인준했습니다. 이후 가톨릭농민회가 전국적 관심을 모은 것이 ‘함평 고구마 사건’이었습니다. 함평에서는 매년 약 2만 톤의 고구마가 생산됐는데, 1976년에는 약 2만 5000톤이 생산되었습니다. 전량 수매를 약속한 농협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가톨릭농민회 전남지구 연합회가 피해 보상을 위한 기도회를 잇달아 개최했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전국으로 확대된 이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단은 성명을 발표해 농민의 생존권과 인권을 위협하는 정부의 농정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나아가 농민들의 조직화와 의식화를 위한 ‘농민사목연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오원춘은 1978년 청기에서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연합회 산하 분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됐고, 교구 연합회 이사로도 선임됐습니다. 그는 그해 봄 군 당국이 농민에게 배부한 감자 씨앗에 싹이 트지 않은 문제와 관련해 피해 보상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확대되고, 오 씨가 강연을 통해 성공사례를 발표하기 시작하자 당국은 이를 통제할 필요를 느끼게 됐습니다.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반 오원춘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오 씨의 양심선언과 이후 진술 번복은 ‘허위사실 유포’와 ‘진실 은폐’라는 두 주장 사이에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이 진실 공방을 입증할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는 지금까지도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 따르면, 이 사건은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농정의 실패와 권위주의적 탄압,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연대가 충돌하면서 이후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동시에 오 씨의 ‘진술 번복’은 당시 국가 폭력의 강압적이고 공포스러운 구조에 따른 것으로 평가됩니다. 1979년 10월 15일 오원춘에게는 징역 2년이 선고되었고,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 씨는 각각 분리 심리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11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살 사건이 발생했으며, 오원춘은 그해 12월 8일 형집행정지로 정호경 신부·정재돈 씨와 함께 석방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의 의아한 보도 한편, 여기에서 가톨릭시보의 오원춘 사건 보도에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가톨릭시보의 첫 보도(1979년 8월 19일자)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농민회의 주장을 말미에 병렬하고 있지만, 기사의 제목과 리드 등 핵심 구조는 경찰 발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아쉬운 대목입니다. 둘째, 전국 사목국장 회의, 안동교구, 주교회의 상임위가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오원춘 사건을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으로 평가했음에도, 가톨릭시보는 지속적으로 판단과 평가를 유보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979년 8월 26일자와 9월 2일자 사설에서 상반된 두 주장 모두를 나열하고, 주교회의 차원의 조사를 촉구하면서 결론을 보류했습니다. 셋째, 가톨릭시보는 8월 29일부터 수일간 두 명의 기자를 파견해 현지 조사를 했고, 내부 문건에서 이 사건의 본질을 오원춘 개인의 일탈로 규정했습니다. 보고서의 결론은 기사화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 조사는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입장을 뒷받침할 근거 탐색 및 보다 정확한 보도를 위한 자료 수집”을 목표로 했으나, 보고서가 그 목적을 충족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9) 1976년 3·1 명동 사건

불의 앞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은 1975년 12월 8일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를 반포했습니다. 1975년 성년 폐막에 즈음해,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10주년을 기념해 반포된 이 권고는 교회와 사회 정의 활동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즉 교회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은 나자렛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곧 교회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권고는 1974년 이후 폭압적 정권과 극도의 긴장 관계 속에 있던 한국교회에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불의한 현실 앞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유신독재 정권 폭압 종교계·재야인사 뜻 모아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발표 성직자 구속 등 탄압에도 민주화 염원 목소리 커져 유신 체제와 교회의 각성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유신체제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1974년 정부는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명분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을 대거 연행했고, 고문과 조작 수사는 일상처럼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유례없는 천주교 고위 성직자의 연행과 구속은 교회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제들의 자발적 모임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어 이후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5년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긴급조치가 잇달아 선포되었고, 언론과 시민사회는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에 놓였습니다. 특히 1975년 4월 새벽 단행된 인혁당 관련자들의 전격적 사형 집행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정권의 폭압성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고문과 불법 구금은 마치 정권의 통치 기술처럼 반복되었습니다. 모든 집회는 원천 봉쇄되었고, 주요 인사를 격리하고 성직자를 ‘순화’시키라는 지시가 각 경찰서로 속속 전달되었습니다. 억압이 불러온 결의 그러나 이러한 억압은 오히려 사회 정의 실현과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한 교회의 결의를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사제단은 공개 성명을 통해 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성당의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이 신앙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자유를 정면으로 탄압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기도회는 이 땅에 사회 정의가 구현되고 침해받는 인간의 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서 교회 본연의 사업을 실천하는 종교 행사이며… 신앙 행위를 문제성 있는 집회라 하여 봉쇄하려 함은 하느님의 뜻과 양심의 소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도덕적 타락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직접적인 종교 탄압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것이다….”(가톨릭시보 1975년 2월 9일자 1면) 정권의 폭압에 대한 국내외의 항의가 빗발치자, 정부는 결국 1975년 2월 17일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지학순 주교 등 일부 양심수를 석방했습니다. 명동 3·1선언, 유신독재에 대한 선명한 저항 1976년 한국 사회는 더욱 짙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반대 세력은 봉쇄되었고 재야 지도자들은 잇달아 구금되었습니다. 1974년 인혁당 사건의 문제를 제기했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소속 시노트 신부가 추방당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 사제들과 신앙인들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시대에 교회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곧 복음에 대한 배신이라는 자각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교단과 재야인사들이 뜻을 모아 마침내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재야인사와 개신교 목사들이 주도하고 천주교 신부들이 적극 협조한 사건으로,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의 의지를 집결시킨, 유신 독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저항으로 평가됩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 집전하는 3·1절 기념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미사 후에는 천주교 사제 7명과 문익환·김대중 등 개신교 성직자 및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시보 3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보도가 실렸습니다. “3·1절 기념미사가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약 7백 명의 남녀 신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20여 명의 사제 공동집전으로 봉헌됐다.”(가톨릭시보 1976년 3월 7일자 7면) 이 기사 자체는 매우 짧지만, 오히려 그 간략함이 사태의 심각성과 당시 언론의 제약을 짐작하게 합니다. 같은 해 가톨릭시보 3월 28일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성직자 3名을 구속 - 긴급조치 9호 위반, 4명은 불구속 입건 - 서울 지검은 10일 하오 서울대교구 응암동본당 주임 함세웅(35) 신부와 전주교구 해성중고등학교 종교감 문정현(36) 신부 및 원주교구 봉산동본당 주임 신현봉(46) 신부를 지난 1일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 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에 관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재야인사 8명과 함께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또한 서울대교구 신림동본당 주임 김승훈(36) 신부, 수색본당 주임 김택암(37) 신부, 동대문본당 주임 안충석(37) 신부, 영등포본당 주임 장덕필(36) 신부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발표했다.“(가톨릭시보 1976년 3월 28일자 1면) 당국의 발표문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긴 했지만 이 보도는 3·1절 기념미사와 선언이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에 못지않은 큰 파장을 불러올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명동성당에서는 매년 3월 1일마다 제2, 제3의 구국선언이 이어졌고, 명동성당은 자연스럽게 시국 기도회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라, 억압의 시대에 인간의 목소리가 어떻게 다시 길을 찾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74년부터 이어진 길고도 고통스러운 체험과 그 속에서 길러진 분노와 성찰의 시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8)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이견들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전격 구속되고, 같은 해 8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습니다. 초유의 고위 성직자 구속 사태에 충격을 받은 전국의 신자들은 지 주교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를 잇달아 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 사제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1월 20일까지 세 차례의 시국선언을 발표해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을 천명했고,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사제단은 불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분명히 하며, 사회 구조의 불의에 대한 고발과 저항, 변혁을 위한 행동이 복음 정신에 기초한 시대적 요청임을 천명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해 12월 18일 성탄 메시지에서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은 우리 교회에 정교분리와 교회·사회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추기경은 “우리는 사람이 정치에 질식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단언했습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부정적 의견들 그러나 교회가 불의한 사회 구조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선교사들을 비판하는 원로 사제들이 있었고,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반대하는 평신도들의 집단적 움직임도 확인됩니다. 특히 ‘한국천주교 정의신자단’이라는 정체가 불명확한 단체가 발행한 인쇄물 ‘횃불’이 교회 안팎에 배포된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4쪽 분량의 이 인쇄물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위장된 정치집회’로 규정하며,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난했습니다. 발행·편집인이 본당 회장과 군종후원회 부회장을 지낸 꾸르실리스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시각을 가진 신자들이 교회 안에 상당수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둘러싼 이견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독재가 더욱 강화되고 교회의 민주화 활동이 한층 격화되던 1978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움직임을 제지해야 한다는 원로 사제들의 호소문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그해 7월 문정현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구속되고, ‘오원춘 사건’에 대한 교회의 강한 항의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습니다.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 49명’은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에서 시국 문제를 바라보는 주교들의 불일치를 우려하며, 교회의 사회 참여에 관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했습니다. 아울러 사제들의 사회참여 활동을 비판하면서, 성직자들은 평신도 교육이라는 ‘제2선’에 머물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른바 ‘구국사제단’으로 불린 이들의 요구는, 비인준 단체인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교도권을 통해 제지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주교회의와 정의구현사제단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주교회의의 대응을 두고도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교회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주교회의가 고위 성직자 구속 사건에 대한 입장을 즉각 발표하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지 주교 구속 두 달 뒤인 9월 정기총회를 마치고, 주교회의 의장에게 보낸 건의문에서 주교단의 일치된 입장 표명을 요구하며, 불의에 맞서 정의를 지킬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에 명확한 지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결성 논의 과정에서 같은 요청을 한 바 있습니다. 주교회의가 공식 메시지를 통해 지 주교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1·2심 판결이 모두 종결된 이후였습니다. 10월 18일 가을 정기총회에서 주교단은 비로소 지 주교 사태에 대한 ‘심각한 유감과 우려’를 표하며, “교회의 사회 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지 주교께 깊은 존경과 양심적 지지를 보낸다”고 밝혔습니다. 지 주교가 구속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1975년 2월 28일, 주교회의는 그동안의 행동을 ‘반성’하고 교회 내부의 ‘일치를 도모’하며 외부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회 참여와 관련한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메시지는 교회가 정치 질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언제나 모든 정치 세력에서 초연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의구현사제단은 그간의 활동을 ‘반성’하고, ‘분열을 야기할 우려’를 이유로 공식 활동을 자제해야 했습니다. 이후 주교단이 책임지고 정부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고, 사제단의 활동은 중단됐습니다. 현실 안주적인 가톨릭시보의 보도들 안타깝게도 가톨릭시보 역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71년 12월 12일자 가톨릭시보는 지학순 주교의 성탄 교서 발표를 전했습니다. 교서는 당시 한국 사회의 불평등·억압·빈곤과 소수 특권층의 부정부패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불의에 대한 투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주인 12월 19일자에서 이 교서를 두고, 교회 문헌이라기보다 정치적 요소가 강한 ‘격문’에 가깝고, 지나치게 구체적 사안을 다룸으로써 비현실적이며,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시각은 ‘과격한 주장’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75년 5월 18일자 사설에서는 국가와 교회 간 견해차의 대표적 사례로 정의구현사제단과 정부의 갈등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국가의 안보보다 인권 유린과 부정부패, 불신 사조의 규탄에 열을 올렸고,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인권이나 부정부패보다 앞세웠다. …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정부와의 대화를 통한 시정을 가로맡고 나섰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고위 성직자에 대한 정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을 거치며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 실현, 민주화의 긴 여정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신적 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박해와 일제강점기의 경험 속에서 자기 보호적 태도가 강했던 한국교회 안에는 여전히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행동에 주저하는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198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과 험난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됩니다.

발행일 2025-11-23 제346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7)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1974년 7월 6일,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전격적으로 연행·구속된 사건은, 역설적으로 한국교회가 본격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로 이어지는 민주화와 사회정의 구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바야흐로 교회가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 주교의 구속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교회 내 움직임이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의회가 가르친 사회참여 한국교회가 이처럼 민족적 고통에 참여하고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크게 기인합니다. 시대의 징표에 민감할 것을 요청한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며 사회교리에 근거한 체계적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인간 기본권의 보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우리 사회의 시대적 아픔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1968년 초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었습니다. 노사 분규에 관여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자, 주교단은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해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이후 교회의 사목적 관심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고도성장 위주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됐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이 강화됐고, 1966년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됐으며, 1970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기구로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민주화 운동 촉발 한국교회는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 깊은 우려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교회가 본격적으로 불의한 정치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바로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입니다. 고위 성직자의 구속에 대한 범 교회적 대응은, 그 과정에서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정의 구현의 요구로 발전했습니다. 지 주교는 일단 석방됐지만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 소환을 거부하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시 연행된 지 주교는 결국 8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지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가 연이어 열렸습니다. 초유의 사태 앞에서 기도회 때마다 대책을 숙의하던 사제들은 8월 26일, 인천교구 사제단 주최로 답동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전국 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첫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제들은 성명에서 지 주교의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기도회를 계속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34명은 8월 29일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열린 회합에서 주교단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예언자적 소명에 따라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사제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9월 1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인간 기본권 회복 염원 - 조국과 정의와 민주회복, 옥중의 지 주교와 고통 받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회가 11일 오후 7시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200여 명의 신부들과 500여 명의 수도자를 비롯,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한 이날 기도회는 예기치 못했던 지학순 주교의 옥중 메시지 공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의문 발표로 그 절정에 달했다.”(가톨릭시보 1974년 9월 22일자 1면) 전국 각 교구에서 참석한 사제 300여 명은 9월 23일 원주에서 회합을 갖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한국인 사제가 639명, 외국인 사제가 285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제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제가 뜻을 함께했던 셈입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뒤 사제 40여 명과 수도자 300여 명, 평신도 200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날 시위는 사제들이 주도한 최초의 가두 시위였으며, 훗날 ‘촛불 집회’로 이어질 평화적 시위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날 사제들은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고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은 지속적으로 시국 기도회를 열어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정의 실현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이러한 사회적 실천은 독재 정권과의 긴장과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사제들의 시국선언 사제단은 11월 6일에는 제2차 시국 선언을 발표, “정부는 시민의 개인적 자유와 공공적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부정부패로 공동선을 위하기는커녕 소수 특권층의 사리만을 위해서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11월 20일에는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을 발표, 종교인이 사회 참여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사제단은 선언에서 “인간에게 희망과 이상을 제시한 하느님의 나라는 다가올 내세만이 아니고 인간화되고 그 구조와 면모가 일신된 현세까지를 포함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행동으로 선포할 때 그것이 정치적 여파를 몰고 오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일 뿐 아니라 행동이 복음에 입각한 것임을 입증한다. …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구실로 가난을 제거하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자기모순이며 배신임을 확신한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 1974년 11월 20일)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은 한국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자신의 선교정책 안으로 통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는 곧 일제의 부역이라는 부끄러운 혐의를 받아온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 수호라는 시대적 요청을 간파하고, 깊은 고뇌 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고통 속으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커다란 전환점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도 없지 않았습니다. ‘정교분리’라는 해묵은 이념 속에서, 교회 구성원의 사회 참여를 종교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논쟁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6) 지학순 주교 구속

가톨릭시보, 70년대의 전망 가톨릭시보는 1970년 1월 1일자 지령 700호에 맞춰 ‘70년대 한국교회를 전망한다’는 제목의 지상 좌담을 2개 면에 걸쳐 실었습니다. 이 좌담은 교회 안팎의 시급한 과제를 두루 짚으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맞게 될 새로운 10년을 전망했습니다. 55년 전의 좌담임에도 참석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놀라운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 운영과 관련해 한 참석자는 “공의회의 진정한 대화 정신을 교회 운영에서 살려야 한다”며 “주교와 신부 간, 신부와 신자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교회가 이제까지 신자를 통치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며 “교회를 민주화·현대화해 교회 기구 안에 평신도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 보편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향한 여정을 미리 보는 듯한 대목입니다. 경청과 식별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대화, 그리고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회 참여의 시대적 요청 그런데 이 좌담에서 우리는 더욱 놀라운 전망을 발견합니다. ‘사회 참여’와 관련된 논의에서 참석자들은 교회가 사회악을 방관하는 것은 곧 교회의 사명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한 참석자는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서 교회가 보여준 태도와 메시지 발표를 높이 평가하면서, 단순히 메시지 발표에 그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후 어떤 시대적 상황을 겪게 될지를 예견함과 동시에, 한국교회가 그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보여준 선구적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더불어, 시대의 아픔과 시련을 민족과 함께 겪으며 성장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 시련의 여정은 곧 한국 천주교회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던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의 구속으로 본격화됩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원주 지학순 주교 징역 15년 선고 -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12일 내란 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사건 선고 공판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로부터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보도된 판결문 내용을 요약하면 ‘피고인 등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유신체제를 부정,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명분으로 한 학원 소요를 이용해 현 정부의 타도를 획책해 오던 자들로서 민청학련에 주도된 국가변란기도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도 당연히 할 일을 다 한 양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돼 있다.”(가톨릭시보 1974년 8월 18일자 1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은 1974년 7월 6일,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연행·구금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지 주교의 체포 정황은 당시 가톨릭시보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신속한 후속 보도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1월 14일에는 긴급조치 3호를,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잇따라 선포해 정국을 강하게 조였습니다. 긴급조치 9호는 이듬해인 1975년 5월 13일의 조치였습니다. 이어 5월 29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 풍토의 조성을 위한 특별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정국 속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하다가, 지 주교 사건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원주교구 부정부패 추방운동 지 주교가 이끌던 원주교구에서는 1971년 10월 5일부터 사흘 동안 부정부패 추방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원주교구와 5·16장학회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원주문화방송국 내부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음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교구장인 지 주교가 직접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사회정의를 이룩하자”고 앞장서 시위와 농성을 주도했기에 파문은 더욱 컸습니다. 원주에서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번져 각지에서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가톨릭시보는 10월 17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하에서 안중근(토마스) 의사를 제외하고는 가톨릭 신자로서는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교회가 이제 공공연하게 데모를 강행했다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가톨릭시보 1971년 10월 17일자 사설) 이 논평이 말해주듯, 한국교회는 이후 불의한 현실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입장을 내기 시작했고, 불의한 정치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 1974년 7월 21일자 가톨릭시보 1면 중앙에는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전국의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은 10일 오후 6시 명동대성당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전국 각지에서 급거 상경한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지도급 인사 15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미사에서는 법 절차 없이 박해받는 이들과 사회 정의를 외치다가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엄숙히 기도했다.” 바로 그 아래에는 ‘지 주교 귀국, 성모병원서 가료 중’이라는 제목으로, 지 주교가 7월 6일 오후 4시43분 CPA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옆에는 사고 형식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난 7월 14일자 신문은 발행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지 주교가 7월 6일 귀국했는데 7월 14일자는 휴간했고, 10일에는 전국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급거 상경해 미사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지 주교의 신변에 매우 긴박한 사정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시대를 제외하면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위 성직자에 대한 ‘용공’ 혐의와 체포 그리고 중형 선고는,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천주교회와 정권 사이에 놓일 첨예한 긴장과 갈등의 성격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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