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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4)성 요세피나 바키타 수녀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23-02-14 수정일 2023-02-15 발행일 2023-02-19 제 333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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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1947, 축일 2월 8일
노예로 끌려가 수녀가 되기까지… 모든 고통은 주님 품에서 멈췄다
노예제 폐지로 신분 자유 얻고
카노사 수녀회에서 수도생활
‘성인’으로 칭송받으며 살다가
선종 12년 만에 시복시성 추진

수단 제베로나 성 바키타 성당 벽화와 현지 아이들. CNS

성 요세피나 바키타 수녀(St. Josephine Bakhita, 1869~1947)는 수단 출신으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해방됐다. 이탈리아에서 카노사 수녀회 소속으로 수도생활을 한 바키타 수녀는 따뜻한 인품과 성덕을 지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이웃의 성인’으로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희망을 전한 바키타 수녀에 대해 알아본다.

노예의 비참한 삶

바키타 수녀는 1869년 지금의 수단인 다르푸르의 올고싸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다주족이었던 바키타의 아버지는 존경받는 부자였으며, 다주족 족장의 동생이었다. 바키타는 세 명의 남자 형제와 세 명의 여자 형제 사이에서 유복하게 자라났다. 그녀는 자서전에 “어릴 적 어려움을 모르고 근심 걱정 없이 살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7~8세 무렵, 바키타는 두 살 위 언니 한 명과 함께 아랍 노예상에게 붙잡혀 엘오베이드까지 끌려갔다. 엘오베이드에 도착하기 전 두 번, 이후 세 번 등 20살이 되기 전까지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기도 했다. ‘바키타’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었다. 노예로 잡힌 충격으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노예상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바키타는 아랍어로 ‘운이 좋은’이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과는 다르게 노예로서의 삶은 비참했다. 엘오베이드에서 맞은 세 번째 주인은 부유한 아랍인이었는데, 그는 바키타에게 자신의 두 딸의 시중을 들게 했다. 한 번은 그의 아들에게 두들겨 맞아 한달 동안 몸져눕기도 했다. 네 번째 주인은 더 가혹했다. 그는 터키의 군인이었는데, 자신의 노예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바키타는 “하루도 상처를 입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면서 “채찍질로 생긴 상처가 나을 만하면 또 채찍을 맞았다”고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전했다.

바키타를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건 몸에 새기는 표식이었다. 네 번째 주인은 바키타의 살을 칼로 파고 소금을 상처에 뿌려 표식을 새겼다. 바키타 몸엔 이 표식이 144개나 남아 있었다.

하느님을 만나 새로 태어나

바키타의 삶은 1883년 이탈리아 공사 칼리스토 레냐니의 소유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레냐니 공사는 이전 주인과는 다르게 바키타를 때리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2년 후 레냐니가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되자 바키타는 “같이 가게 해달라”고 청했다. 레냐니를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로 건너온 바키타는 공사의 친구 아우구스토 미키엘리의 손에 넘겨졌다.

바키타는 베네치아 인근 지아니고의 미키엘리 집에서 그의 딸을 돌봤다. 수단으로 영구 이주를 준비하던 미키엘리 부부는 바키타와 딸을 베네치아에 있는 카노사 수녀원에 잠시 맡겼다. 수녀원에서 지내며 교육을 받던 바키타는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바키타는 “성스러운 수녀님들이 인내하며 나를 교육시켰고, 내가 어릴 적 누군지도 모르면서도 마음속으로 느꼈던 하느님을 알게 해 줬다”고 회고했다.

수단에서 돌아온 미키엘리 부부는 딸 앨리스와 바키타를 다시 수단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바키타는 강하게 거부했다. 부부는 바키타의 소유권을 두고 이탈리아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1889년 11월 29일 바키타가 태어나기 전 영국이 식민지였던 수단에서 노예제를 폐지했고, 이탈리아 법은 노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키타는 노예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바키타는 카노사 수녀원에 남기로 했다. 1890년 1월 9일 바키타는 ‘요세피나 마가렛’이는 이름으로 세례와 견진을 받았다. 이날 바키타에게 첫영성체를 주고 견진성사를 한 사람은 베네치아의 주세페 사르토 추기경이었는데, 바로 훗날의 비오 10세 교황이다.

요세피나 바키타 성인. CNS

우리 이웃의 성인

1893년 12월 7일, 바키타는 카노사 수녀회에 입회했고, 1896년 12월 8일 사르토 추기경 주례로 서원했다. 바키타는 1902년 이탈리아 북부 빈첸차주의 스키오에 있는 수녀원으로 발령을 받고 평생 이곳에서 지냈다.

스키오의 수녀원에서 바키타는 요리와 성구관리, 문지기 등의 소임을 맡았으며, 마을 사람들과 자주 만났다. 카노사 수녀회의 여러 수녀원을 방문하며 아프리카 선교를 열망하는 수녀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며 돕기도 했다.

상냥하고 조용한 말투로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바키타는 빈첸차 사람들에게 유명했다. 사람들은 바키타를 좋아했으며 ‘갈색 엄마’ 혹은 ‘검은 엄마’로 불렀다. 바키타가 보여준 성덕의 향기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바키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두려워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바키타를 성인이라고 칭송했으며, 그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스키오에도 폭격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말년에 바키타는 통증을 동반한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지만, 바키타는 활기를 잃지 않았고, 상태가 어떠냐는 질문에 항상 “주님 뜻대로”라며 웃으며 답했다. 임종에 다다라서는 의식을 잃고 노예생활의 고통스런 시간이 떠오른 듯 “쇠사슬이 너무 꽉 조인다”며 “느슨하게 해달라”고 외치기도 했다. 결국 1947년 2월 8일, 바티카는 ‘성모님’을 외치며 주님을 품으로 돌아갔다.

바키타가 선종한 지 채 12년이 지나지 않아 그의 시복시성이 추진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78년 그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해 ‘가경자’로 선포했고, 1992년 시복했다. 이어 2000년 10월 1일 시성했다. 바키타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단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희망 보여줘

바키타는 ‘고통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바로 하느님이라면서 이 희망의 증인으로 바키타의 삶을 소개했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 바키타를 고통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분께 의지할 때 우리는 종살이에서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존엄을 확인하게 된다”면서 “바키타는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 모든 인간 생명의 참 주인이시라는 진리를 깨달았고, 이 체험이 아프리카의 이 겸손한 딸에게 큰 지혜의 원천이 됐다”고 강조했다.(32항 참조)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바키타의 축일인 2월 8일을 ‘인신매매에 반대하는 세계 기도와 성찰과 행동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국제수도회장상연합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날을 거행하도록 승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 2월 8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주례한 일반 알현에서 바키타 수녀의 사진이 담긴 책을 들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바키타 성인의 축일인 2월 8일을 ‘인신매매에 반대하는 세계 기도와 성찰과 행동의 날’로 정했다. CNS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