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기획] 가톨릭교회와 홀로코스트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23-01-16 수정일 2023-01-17 발행일 2023-01-22 제 332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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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 대신 피난 도운 교회… 85만 명 목숨 구해
유럽의 반유다 정서 기인한
유다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교회의 침묵’ 비판도 있지만
공개적으로 나치 비난할 경우
신자들이 위험해질 것 우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6년 7월 29일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죽음의 벽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있다. 교황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인류애의 표현이 아니라 이러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CNS 자료사진

매년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위령의 날(International Holocaust Remembrance Day)이다. 이날은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날로, 유엔은 2005년 11월 1일 총회를 통해 이 날을 제정했다. 1월 27일로 정한 것은 1945년 구 소련군이 나치의 유다인 수용소 중 가장 컸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해방시켰던 날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벌어졌던 수백만 명의 고의적인 살인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대부분 유다인으로 어린이 150여 만 명을 포함해 약 600만 명이 희생됐다. 홀로코스트는 대부분 당시 나치가 점령했던 유럽 전역에서 집중됐고, 유럽에 살고 있던 유다인 2/3가 학살됐다. 이들은 독가스, 총살, 교수형, 굶주림과 질병 등 다양한 방법으로 희생됐으며, 강제노역과 생체실험에 시달리기도 했다.

유다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유럽인들의 반유다 정서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유다인을 예수님을 죽인 백성이라고 생각해 박해했다. 유럽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국가에 의한 유다인 추방, 탄압의 사례는 빈번했다. 십자군 원정 중 유다인 마을에 대한 공격 사례도 적지 않았고, 1492년에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지 겨우 몇 달 뒤에 유다인을 추방하기도 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다인 학살에 침묵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 있다. 1963년 독일 극작가 롤프 호흐후트가 희곡 「신의 대리자」를 발표하면서 비오 12세 교황이 유다인 대학살에 연루됐거나 적어도 침묵했다는 비난이 불붙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58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한 비오 12세 교황은 유다인 수용소에서 학살이 진행되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한번도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비오 12세 교황은 ‘히틀러의 교황’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지난 2020년 3월 교황청은 사도문서고의 관련 비밀문서를 공개했는데,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 대해 비오 12세 교황은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교황청은 바티칸시국은 물론 교황 별장인 카스텔 간돌포, 각지의 교회와 수도원 등에 유다인의 피난을 허용해 최대 85만 명의 유다인을 구했다. 또 당시 교황이 명백하게 히틀러를 비난할 경우 독일을 비롯한 각지의 가톨릭 신자들이 위험에 빠질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1942년에 네덜란드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지도자들이 네덜란드 유다인의 강제 이송을 공개 비난한 ‘네덜란드 사건’에서 위트레흐트의 가톨릭 주교만이 끝까지 비난을 포기하지 않자, 나치는 그동안 강제 이송 대상에서 제외했던 그리스도교 유다인을 이송 대상에 포함시켜 결국 교회를 침묵시켰다. 이때 십자가의 베네딕타로 알려진 에디트 슈타인 수녀가 순교했다.

나치의 박해는 가톨릭교회도 비켜가지 못했다. 나치는 나치에 반대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체포,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는데, 특히 폴란드교회의 피해가 심각했다. 나치는 폴란드 점령지의 교회와 수녀원, 신학교를 폐쇄했으며 대다수의 사제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했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3000명이 넘는 폴란드 성직자들이 살해당했다. 많은 폴란드 성직자들이 독일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순교했는데, 이 수용소는 ‘세상에서 가장 큰 가톨릭 성직자 묘지’로 악명이 높았다. 나치는 특히 사상범들을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냈고, 약 2600명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이곳에 수용됐다. 지난해 시성된 네덜란드의 티투스 브란즈마 신부도 이곳에서 희생됐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