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대림 제1주일 - 결국에는 모든 것이 좋으리

입력일 2022-11-22 수정일 2022-11-22 발행일 2022-11-27 제 3320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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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와 탐욕이 짙게 드리운 세상
어둠은 마지막 완성 품은 못자리
좌절하지 않고 각자 소명 다하며
하느님을 따라 빛의 길 걸어가야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제1독서: 이사 2,1-5 / 제2독서: 로마 13,11-14ㄱ / 복음: 마태 24,37-44

전례력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첫 주일입니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를 1월이나 춘삼월이 아니라 11월 말에 시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교회가 로마인들의 태양 축제를 그리스도교화하면서 성탄 대축일 날짜를 정했고, 거기에 대림 시기를 더한 결과 지금의 전례력이 나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여기에는 영성적 의미도 엮여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낮이 가장 짧은 동지가 12월 22일쯤이지요. 그러니까 4주간의 대림 기간은 밤이 길어지면서 어두움을 가장 쉽게 체감하는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례력은 우리가 짙어가는 어둠 속에 빛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도록 초대하는 한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두움을 솔직히 바라보고 인정할 때 비로소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어두운 그림자는 있습니다. 마음속에 상처로 남은 어두운 기억도 있고,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늘진 면도 있습니다. 사람이 꼭 악하고 못된 성격이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인데 자신과 타인에게 예상치 못한 아픔을 주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는 일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간섭하고 억압하다가 끝내는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요!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무지와 어리석음, 탐욕과 이기심이 빚어내는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지적하시듯,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의 폐해는 우리 인간의 앞날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선택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미래를 앗아가는 폭력이 되는 일이 왕왕 생기지요. 내 작은 편리를 위해서 생태계의 희생을 강요하는 예가 그렇습니다.

이런 어두움을 피하려고 우리는 피상적인 해결책에 매달리거나, 자기 내면에도 존재하는 어두움을 남에게 투사하면서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말하듯,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로마 13,13) 속에 사는 것이지요. 겁에 질린 개가 더 크게 짖듯이, 품위를 잃고 자기를 부풀리면서 남과 다투는 행태를 바오로 사도는 ‘어둠의 행실’이라 부릅니다. 우리 내면의 어두움과 세상의 어두움은 원죄에 물든 인간 모두의 한계인데도, 자기만은 예외인 것처럼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너 때문이야’를 반복하는 것은 인간 현실에 눈감으며 잠든 상태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정직하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 눈을 뜨고 현실을 보는 사람은 우리가 어둠을 걷어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난 척하고 교만해도 결국 인간에게는 스스로 지우기 힘든 어두움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우리 재판관, 심판관이 되실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진실을 가려내시고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이사 2,3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둠이 짙어갈수록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은’(이사 2,2) 주님의 집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찬란하게 비칩니다.

이렇게 인간의 어둠에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빛을 향하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이사 2,4) 만듭니다. 불안하고 어두운 앞날 앞에서 더 날카로운 칼과 창날을 벼리는 대신,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희망을 삶 속에 싹틔우려 애씁니다. 그런 사람은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마태 24,39) 세상 흐름에 자신을 맡겨 버리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제자의 소명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실 때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알려주는 복음 내용에 주목해 봅시다.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은 다섯 담화가 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마지막 담화에 속합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이 대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데 비해서, 오늘 말씀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제자들을 향한 이 특별한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사람의 아들이 마지막 날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 또 그에 상응하는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다니 7,13-14)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은 마지막 날 현세 권력에 종지부를 찍고 세상에 하느님의 다스림을 영원히 실현하실 구세주를 뜻합니다. 그분이 오실 때 제자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태 24,42 참조) 그런데 그날에는 같이 있던 사람 중에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24,40) 것입니다. 무리에 속해 있다고, 대세에 편승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신 각자의 소명과 책임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안고, 빛의 길을 걷는 것이 제자도(弟子道)입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좋으리. 좋지 않다면 아직 끝이 아니리.”(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세계적으로 많이 인용되는 격언입니다. 지금 닥친 현실이 어둡게만 보일 때, 다가오는 날도 어둡게 보여서 맥이 풀릴 때, 그래서 남들 하는 대로 휩쓸리자며 자포자기할 때 기억해 봄직한 말이지요. 오늘 주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희망의 실현을 볼 것입니다. 어둠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어둠은 마지막 완성을 품고 있는 못자리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