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의 선종 장소
서양 선교사들의 서한에는 최양업의 선종 장소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서한이 분실되거나 탈취됐을 경우 선종 장소가 노출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사 연구자들은 동료 선교사들이 남긴 서한, 집안의 전승과 현존하는 구전 등을 통해 최양업의 선종 장소를 추정하고 있다.
유력하게 지목된 곳은 진천과 문경이다. 정규량(레오) 신부가 1929년 최경신(바르나바·당시 82세)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문서에 따르면 ‘노인들에게 들으니 (최양업 신부가) 항상 길로 다니시고 고로 얼굴이 항상 그을고 갓끈 자리에 완연한 표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렇게 전교하시다가 진천군의 어느 공소에서 병드시어 부감목 신 신부(푸르티에 신부)께 최후 성사를 받으시고 선종하셨는데 그 귀한 시신은 배론 학당 뒷산 중턱에 안장됐다’고 전한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1929년 증언 당시 최경신씨는 용소막성당 아래 살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로 미뤄보아 증언들은 이장 당시의 목격 증인들에게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최양업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가 “그가 누워 있었던 집은 저의 거처에서 17리외(lieue) 내지 18리외 떨어져 있었다”라고 내용을 토대로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푸르티에 신부가 있었던 배론에서 배티까지의 거리가 17리외, 즉 86㎞ 가량이라고 추정하며 진천 선종설에 힘을 실었다.
문경 선종설의 근거가 되는 것은 최양업 후손들의 증언이다. 최양업의 셋째 동생인 최우정(바실리오)의 맏아들 최상종(빈첸시오)은 1939년 1월 10일 “최양업 신부님은 경상도의 전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환후침중(患候沈重)하여 문경읍에서 약국을 하고 있는 교우 이씨집에 들어가 치료하셨다”고 전한다.
이를 토대로 안동교회사연구소장 신대원(요셉) 신부는 “최 신부는 문경 어느 주막집에서 병을 얻었고, 그곳에서 문경 읍내에 있는 평창이씨 약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선종했다고 추정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