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92.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 192항)

입력일 2022-11-08 수정일 2022-11-08 발행일 2022-11-13 제 331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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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향한 차별 없는 보살핌과 어루만짐이 필요한 때
고통 속의 욥을 더 괴롭힌 것은
친구들의 책임 회피와 표리부동
서로 도우려는 따스한 마음만이
다시 일어나도록 할 수 있어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추모 공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과 추모물품이 놓여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9-10)

■ 울부짖음과 통곡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어떤 시련도 시간이 흘러 이겨낼지 모르나 가족과 자식을 잃은 슬픔은 차마 그렇지 못할 겁니다. 재해나 불치병, 끔찍한 사건과 자살로, 혹은 일터에서 부모와 자녀를 잃은 분들이 계십니다. 지켜 주지 못한 죄스러움과 함께 망자는 산 자의 가슴에 남습니다.

성경에도 가족을 잃은 이들의 아픔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아들 압살롬을 잃은 다윗, 일곱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어머니(2마카 7장), 재난 속에서 모든 것을 잃은 욥까지. 뿐입니까? 예수님께 죽어가는 자식을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던 부모들도 그러합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 “강아지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라며 애걸한 이방인 여인의 심정이 비로소 이해가 갑니다.(마태 15,22-28) 그것은 진짜 사랑이었습니다.

■ 무의미한 언어와 사리사욕

만사형통해서 신앙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통과 죽음을 각자 몫이라 큰소리치다가도 사람은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합니다. 그래서 성경 저자들은 욥기를 정경으로 채택했나 봅니다. 누구나 겪는 고통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그 참혹한 울부짖음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욥은 뜻 모를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욥이 더 괴로운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친구들 때문입니다. 독자는 욥의 억울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파즈는 욥의 잘못과 책임을 탓하고, 초파르는 욥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느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 욥기의 결론 중 하나입니다. 왜일까요? 추정컨대, 공감하지 못하는 탁상공론, 수다스러우나 책임을 회피하는 무의미한 언어들, 친구의 아픔이 아니라 사익을 찾는 표리부동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 미안합니다. 기도합니다.

욥기는 고통에 대한 담론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 둡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느님 선하심에 대한 신뢰, 인간을 살리시는 사랑, 서로에 대한 예의와 도리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로 숨이 멎는 충격과 참담함을 느낍니다. 저는 단지 그곳에 없어서 희생자가 안 됐을 따름입니다.

친구와 이웃을 잃은 이번 인재(人災)로 많은 분들이 깊이 애도합니다. 눈물로써 미안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또한 더 미안한 것이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에 시달렸을 여러분들을 그간 많이 사랑해 주지 못해서 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왜 거길 갔느냐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 핼러윈이라 불리는 기념일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을 뿐입니다. … 취직만 하면, 코로나 시대만 끝나면,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오리라 믿으며 참아온 젊은이들. 엄마 손 꼭 잡고 거리두기 해제 후 첫 번째 핼러윈을 맞으러 간 15살 소녀도 있습니다. … 이 무참한 슬픔의 나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서로를 향한 무차별적인 돌봄과 보살핌과 어루만짐입니다. 서로의 손을 꼭 붙들고 어떻게든 서로를 도우려는 따스한 마음만이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정여울 작가 ‘가눌 수 없는 슬픔 속에 당신을 떠나보내며’ 중)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