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92. 첫째 계명③ (「가톨릭교회 교리서」 2095~2109항)

입력일 2022-11-08 수정일 2022-11-08 발행일 2022-11-13 제 3318호 1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하느님 섬기는 다섯 가지 방법: 흠숭, 기도, 봉헌, 성덕, 선교

하느님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의 허무를 인정하며
하느님께 마음 드높이는 ‘흠숭’
하느님 섬김의 가장 우선되는 일

10월 6일 멕시코에서 고향을 잃은 한 원주민 여성이 기도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흠숭의 표현이므로,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CNS 자료사진

영화 ‘47m’(2017)는 두 여성이 식인 상어로 우글대는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케이지 안에서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던 중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m 바닥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산소가 떨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케이지 안에서 버텨야 합니다. 위에서 산소통을 떨어뜨립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주우러 나가야 합니다. 그러던 중 한 구조대원이 인양을 위한 줄과 고리를 가지고 내려옵니다. 하지만 가까이 와서는 상어에게 당하고 맙니다. 어쩔 수 없이 두려움에 떨던 다른 여성도 케이지 밖으로 나가서 그 고리를 찾아 케이지와 연결합니다. 결국 그들은 구조되어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케이지의 줄이 끊어진 것은 원죄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우리 상태와 같습니다. 위에서 도움이 오지 않으면 수면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습니다. 이때 하느님은 케이지 안에서 버티라고 은총의 산소통을 떨어뜨려 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진리로 우리를 끌어올리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서는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첫 번째 계명을 위해 대략 다섯 가지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흠숭’입니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 하느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의 허무’를 인정하는 것”(2097)입니다. 또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2096)입니다. 위에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 벌써 흠숭의 시작입니다. 불안해서 개인행동을 하지 않고 하느님 자비를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우선되는 일입니다.

그다음은 ‘기도’입니다. 청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구조를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드높이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흠숭의 표현”(2098)입니다. 영화에서 두 여성은 끊임없이 도움을 청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루카 18,1) 이것이 흠숭의 다음 단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도 그분의 노력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 여성은 구조하러 오다가 희생당한 이를 위해 그 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와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할 수 있습니다.”(2100)

이를 위해서는 자기를 버릴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탐욕과 성욕, 그리고 교만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내가 필요한 일과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두 여성은 서로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버리는 노력을 통해 “복음적 권고(청빈, 정결, 순명)를 실천하겠다는 서원”(2103)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구원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보여야 합니다. 누구도 자신을 해칠 사람임을 안다면 구해주지 않습니다. 사랑 실천의 가장 중요한 일이 선교입니다. 구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유일하고 참된 종교의 예배가 있음을”(2105) 알려야 합니다. 흠숭, 기도, 봉헌, 성덕, 선교의 결심 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