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사랑의 흔적 /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제1대리구 서천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2-11-02 수정일 2022-11-02 발행일 2022-11-06 제 331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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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긴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자주 회자하는 노래들이 있습니다. 시월에 생각나는 노래를 하나 정해 보라면 위의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겨운 멜로디에서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과 더불어 지난날의 기억을 반추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곳은 다름 아닌 신학교 교정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삼십 분 정도 산책 후 묵주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둘 또는 서넛씩 짝을 이루어 시간이 되면 하상관이라고 불리는 강의실 건물 앞으로 모이곤 합니다. 무슨 남자들이 그리 말이 많은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와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타 선율과 함께 이 노래가 교정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들어 생소하기에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 매해 듣다 보니 어느 때부터인가는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뜻 모를 이야기를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흘러가는 멜로디를 통해 떠올리는 추억들은 모든 이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테마로 설명될 것입니다. 자신이 준 사랑일 수도 혹은 받은 사랑일 수도 있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에 남은 그 기억들은 가을을 가득 메우는 이 노래처럼 저마다의 마음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랑받았던 기억은 쉬이 잊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삶의 부산스러움에 잊은 듯하다가도 그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무엇 하나와 마주하게 되면 언제 잊혔냐는 듯 마음을 채우곤 합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해지기보다는 더 짙은 향기가 되어 다가오는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기까지 합니다.

사랑의 기억과 체험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우리들뿐만이 아니겠지요. 주님 역시 우리들과 나눴던 사랑이 그분 몸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여전히 그분에게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상흔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기억이자 흔적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은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며 그분이 진정 주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새겨진 흔적은 영원히 그분에게 남은 사랑 자국인 것입니다. 부활 이후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시작된다면 어찌 우리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나게 될 그 영광의 순간이 지금 나누는 사랑과 무관하지 않기에 오늘이 더욱 복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제1대리구 서천동본당 주임